역사 323

함안에 안라국이 있었다는 소설

다음은 안라가 함안이 아님을 알려주는 「일본서기」 관련 부분이다. (ㄱ) 249년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ㄴ) 552년 5월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

역사 2024.07.09

성왕이 임나 재건을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는 소설

성왕이 임나 재건을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다음 이야기를 근거로 성왕이 김해 창원 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고 주장한다. (ㄱ) 541년 4월 여름 4월에 안라(安羅)의 차한기(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한기(卒麻旱岐), 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의 자식, 다라(多羅)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의 자식, 자타한기(子他旱岐)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미마나야마토노미코토모치)의 길비신(吉備臣;키비노오미)[이름이 빠졌다.]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서(詔書)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 천황이 조를 내린..

역사 2024.07.09

함안의 안라국이 임나 재건을 위해 안라회의를 주재하였다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안라회의와 사비회의라는 회의 형식의 새로운 코미디를 개발하여 소설 「야마토임나」를 풍성하게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위 「일본서기」 529년 3월 이야기를 근거로 529년 3월 함안의 안라국에서 김해 창원 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한 회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함안이 가야의 지방이 아니라 독립성이 강한 가야라고 보아 함안의 안라국이 회의를 주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에 의하면 함안이 아나가야 또는 아시량국이므로 함안이 안라국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안라가 아나나 아시량과 음상사라는 가짜음상사로 함안이 안라국이었다고 우긴다.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백제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를 외교력으로 ..

역사 2024.07.09

「일본서기」의 남가라가 김해라는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남가라가 김해라 주장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남가라는 김해일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남가라 관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ㄱ) 249년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ㄴ) 527년 6월 21년 여름 6월 임신삭 갑오(3일), 근강모야신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㖨己呑)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때 축자의 국조(國造) 반정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지 수년이 지났다. (ㄷ) 529년 3월 같은 달,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신라에 천황의 칙..

역사 2024.07.08

봉수망을 운영했다는 장수의 반파국 소설

일부 강단유사사학은 반파국이 장수를 수도로 하고 전라도 동부지방을 영역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장수가 철의 생산과 유통으로 국력을 다져 봉수망을 구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주장엔 전혀 근거가 없다. 그들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직은 반파국과 제철유적의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지만, 반파국 가야 고총에서 단야구와 편자를 중심으로 마구류, 무구류 등 지역색이 강한 철기류가 출토되어 그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일단 반파국이 봉화 왕국으로 융성하는데 철의 생산과 유통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것으로 유추해 두고자 한다. 이들 강단유사사학도 여타 강단유사사학처럼 고분이 가야식이라고 하면서 전라도 동부를 가야라고 주장하나, 묘제는 한반도 남부식이지 가야식이 아니다. 이들이 장수의..

역사 2024.07.06

가야가 평양의 낙랑군과 해상으로 교역했다는 소설

가야는 평양의 낙랑군과 해상으로 교역했다전술하였듯이 新錢(소위 왕망전)은 김해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도 대마도 구주 북쪽에서 상당량이 발견되며, 강단유사사학이 한4군 지역이라 사기 치는 북한과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미미하게 확인된다. 이는 왕망 정권의 실세였던 김씨 집단이 김해로 도망 온 것을 의미하며 CE 42년의 가야 건국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王莽錢, 김해 良洞里 토광묘의 後漢代 尙方鏡, 창원 茶戶里 목관묘에서 나온 前漢代 星雲鏡·五銖錢·琴形帶鉤·小銅鐸, 창원 성산패총에서 나온 五銖錢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 대로 新錢이 평양의 낙랑군과 가야의 교역에 사용되었다면 낙랑군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한다. 따..

역사 2024.07.02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 영토가 아니라는 강단유사사학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 영토가 아니다강단유사사학이 기문국이라 주장하는 남원의 고분에서 백제의 금동신발, 청동거울, 계수호가 출토되었다. 지방세력에게 하사하는 위세품이 백제의 것이라면 당연히 그 지역은 백제가 지배한 지역이지 가야일 수가 없다. 충청도 전라도 모두 백제의 위세품이 발굴되므로 처음부터 백제의 영토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같은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충청도는 백제, 나주는 마한, 기문은 임나=가야라 주장한다. 그들이 백제 영역이 아니라고 사기 치는 곳에서 발굴되는 백제 위세품은 그 지역의 독립국이 백제와 교섭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세품은 백제의 지방통제방식이므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열도 등 백제의 위세품이 나온..

역사 2024.07.01

가야의 서부 확장은 소설 야마토임나의 하일라이트

강단유사사학은 사료의 글자 날조와 횡설수설과 고도의 가짜 음상사 기법을 통해 가야가 전라도로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의 확장은 없었다. 가야는 백제와 싸울 수 없다. 신라와 싸우기도 벅찼다. 백제는 김수로 집단의 한반도 이주에 도움을 주었던 나라로 추정되나, 신라는 탈해왕이 60년경 가야를 정복하려 하였다. 처음 신라와 가야는 비슷한 소국이었고, 백제는 대국이었다. 가야가 대국인 백제를 적으로 하면 뒤에서 신라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존치시켜 신라를 견제하게 한 후 고구려에 대비할 수 있었으므로 가야와 적대적일 필요가 없었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4세기 말부터 백제가 약해졌고, 신라는 국력이 커지면서 고구려에서 독립하기 위해, 5세기 중엽부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

역사 2024.07.01

백제영토를 임나로 날조하는 강단유사사학

기문과 대사를 각각 남원과 하동으로 보는 주류 강단유사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한다.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이 부딪쳐서 대가야와 백제는 「己汶」을 놓고 영역을 다투게 되는데, 당시에 기문은 대가야에 속해 있었다. 이 사실은≪백제본기≫를 토대로 하여 개작된 듯한≪日本書紀≫소재의 사료에 보인다. 여기서의 기문은 가야 계통 국명의 하나로서 ≪新撰姓氏錄≫ 吉田連條에 上·中·下의 3기문이 나오고, ≪梁職貢圖≫ 소재의 百濟旁小國 중에 상기문이 나오며, ≪삼국사기≫ 樂志의 우륵 12곡명 중에 상·하의 奇物이 나온다. 기문은 상·하 또는 상·중·하로 나뉘는 것으로 보아 넓은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남원(옛 지명 古龍郡) 및 임실(옛 지명 任實郡 居斯勿縣)지방으로 비정된다. 그들..

역사 2024.07.01

6세기 초 백제의 열도 소국간 구역 조정

강단유사사학이 기문을 남원, 대사를 하동이라 주장하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일본서기」의 반파, 기문, 대사 관련 부분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발생한 사실이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임나4현의 소속 변경도 동일한 성격의 행위이다. 임나4현이나 기문 대사 다사진의 마을국가간 이동은, 6세기 초 백제가 고구려의 열도 위성국으로부터 열도를 완전히 탈환한 후, 고구려계 지배하의 기존 마을국가들간 역학관계를, 백제의 지배에 편하도록 재편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일본서기」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ㄱ) 513년 6월그리고 따로 “반파국(伴跛國)이 신의 나라의 기문(己汶)이라는 땅을 약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르게 판단하여 원래 속한 곳에 돌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ㄴ) 513년..

역사 2024.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