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은 황하 동쪽

문주왕이 475년 천도한 웅진은 韓의 웅진이다. 문주왕은 천도 이듬해인 476년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대두산성은 온조왕이 마한을 CE 8년 멸망시킨 직후인 CE 9년 쌓은 성이므로 韓 지역에 있는 성이다. 마한을 멸망시킨 후 1년만에 한반도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두산성은 웅진 북쪽이며 한수 이북과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웅진이 수도가 되었으므로 웅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시켜야 하며, 주민을 멀리 이동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웅진을 한반도 웅진으로 보며, 대두산성을 주로 아산 일대로 보는데, 이는 소설에 불과하다. 한수 이북의 주민을 아산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공주 남쪽의 산성을 강화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대..

역사 2024.07.28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이유

전술한 바와 같이 소서노의 위례성(미추홀)이 BCE 18년 건국 시 도읍지이고, BCE 5년 온조의 찬탈 시 온조의 위례성(서도 한성)이 두번째 수도이다. 두 위례성은 모두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에 있었다. 그 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근초고왕이 동도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도 한성이 백제의 수도였다.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것은 서울이 근초고왕 시기에만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역사 2024.07.28

서동은 왜 선화공주와 혼인해야만 하였는가?

서동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혼외 왕족이다. 서동은 어머니와 익산에서 살면서 마를 캐다 사금을 발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부자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으로 인해 서동은 백제의 귀족과 혼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동은 신분세탁을 위해 신라의 공주와 혼인하려 하였고 이왕이면 백제에까지 미인으로 소문 난 선화공주로 결정하였다. 서동은 한편으론 진평왕에게 막대한 금을 선물하였고, 한편으론 선화공주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부를 잘 활용하여 귀족들의 인심을 얻었고, 혜왕 법왕이 연이어 재위 2년만에 사망한 상태에서, 왕위를 승계받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동 선화공주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가지가지의 소설을 쓰고 있다.  ..

역사 2024.07.26

선화공주는 설화상의 허구 인물인가?

일부 강단유사사학자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화이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가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택왕후 설명“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사택왕후는 재물을 희사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639년(무왕 40)에 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비는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아니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무왕은 641년 재위 42년에 사망하였다. 639년 당시 사택왕후가 무왕의 비라고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입증이란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 그들의 뇌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당시 왕비가..

역사 2024.07.26

강단 사기꾼들의 견당매물사 날조

『입법구법순례행기』의 원문廿八日. 大唐天子差入新羅慰問新即位王之使, 州青兵馬使吴子陳· 崔副使· 王判官㝳卅余人登來寺裏相看. 夜頭張寶高遣大唐賣物使崔兵馬司來寺問慰.(839년 6월) 28일 당나라 천자가 새로 즉위한 왕을 위문하기 위해 신라로 보내는 사신인 州青兵馬使 오자진(吳子陳)과 최부사(崔副使) 그리고 왕판관(王判官) 등 30여 명이 절로 올라왔으므로 만나보았다. 초저녁 장보고가 보낸 大唐賣物使 崔兵馬司가 절에 와서 위문하였다.​ㅇ 大唐賣物使의 의미- 원문에 의하면 遣은 장보고가 엔닌에게 보냈다는 의미이고, 遣大唐賣物使란 직책은 없음. - 최훈의 직책은 大唐賣物使 겸 兵馬司로 당나라의 관직명임. - 대당매물사는 당의 물건을 파는 당나라의 수출관이란 의미임.- 최훈은 당나라 치청절도사 지분이 있는 무역선의 선..

역사 2024.07.25

경기도가 조조 위나라 영토였다는 강단 사기꾼들

『삼국지』에 의하면 245년경 조위는 辰韓 여덟 마을을 낙랑군에 귀속 시키려 했는데 韓이 반발하여 대방군을 공격하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韓을 침략하여 궁준이 전사하였지만 韓을 滅하였다. 진수는 韓을 멸하는 기사 바로 앞에서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다 하므로 멸했다는 것은 복속시킨 것이 아니라 韓이라는 정치체가 있었다면 그것을 말 그대로 없앴음을 뜻한다. 여기의 韓은 황하 이동으로 황하 서쪽에 위치하게 되어 황하 동쪽의 韓백제에서 분리되었고, 그 결과 조위에 쉽게 멸망되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辰韓이 4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없다. 임나 선생님께서 4세기에 들어오시므로 4세기까지는 辰韓이 죽어도 버텨줘야 하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역사 2024.07.24

강단유사사학에선 남쪽과 동쪽은 같은 말

강단유사사학은 근거도 없이 辰國을 한반도 중남부라 주장한다. 그들은 역계경이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는 말을 남하한 것으로 변경하며, 韓을 한반도 남부라 주장하고. 辰國과 韓이 모두 한반도 중남부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쪽의 韓으로 갔다고 하며, 『위략』은 역계경이 동쪽 辰國으로 갔다고 하므로,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그들은 요서에 위치한 전삼한의 辰韓=辰國을 부정하여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지워버리고 있다.

역사 2024.07.24

네가 辰國을 모르면 너는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

辰國은 단군조선 이래 요서를 차지한 우리 민족의 중심국을 지칭하는 말범엽이 삼한이 모두 옛 辰國이라 한 것은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사서에 『단군세기』와 같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수가 신한(辰韓)이 옛 신국(辰國)이라고 하였는데, 신한을 부를 때 辰國이라 하기도 하였다는 것과, 조선의 천자국을 일반적으로 辰國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부여나 북부여를 부를 때도 조선의 천자국(중심국)이라는 의미로 신국(진국)이라 하였을 것이다. 역계경이 우거와 정책 차이로 예맥조선을 떠나 동쪽의 辰國으로 갔는데, 역계경 집단이 예맥조선과 무역하는 나라와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당시 예맥조선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북부여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소위 발해의 국호가 진국(震國)..

역사 2024.07.24

난하설의 모순과 폐해

난하설의 자기모순재야유사사학은 강단유사사학처럼 후삼한남한설을 추종한다. 후삼한남한설은 좀비 삼한과 결합하여 야마토임나설이 된다. 난하설에 의하면 강단유사사학의 말처럼 소위 후삼한이 바닷속에 있게 되는데도, 재야유사사학은 아무런 설명 없이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인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 초기 신라와 백제가 낙랑 동부도위와 인접하여 있으므로 낙랑군이 북한에 있고, 공손씨와 조위가 한반도남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서, 낙랑군 평양설을 공격하고, 공손씨와 조위가 韓을 지배했다는 기사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나 설명도 없이, 공손씨와 조위가 남한을 지배했다는 주장에 분노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난하설의 폐해난하설에 따르면 韓을 발견할 수 없다. 韓을 발견하지 못하면 ..

역사 2024.07.21

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

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난하 갈석산설(창려 갈석산설)은 역사날조 총책 담기양이 제조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다. 윤내현이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는 근거는 요수가 난하라는 것과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다. 윤내현은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나, 이는 요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실질상 윤내현은 난하가 요수라는 단 하나의 근거로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하가 요수였던 적은 없다. 윤내현은 『여씨춘추』 「유시람」 고유 주석을 근거로 난하가 요수라 하나, 본고에서는 고유가 말하는 요수가 중역수임을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도 갈석산에 대해 주장하려면, 요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는 것이 ..

역사 2024.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