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 25

살수대첩의 살수는 연태하

552년 양원왕은 장안성을 쌓았다. 평원왕은 586년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당서』는 평양성은 장안이라 불렸다고 하고, 『고기』는 평양으로부터 장안으로 옮겼다고 하므로 김부식은 두 성이 동일한지 다르다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장안성은 평양과는 다르다. 중국인들은 고구려가 줄곧 평양을 수도로 하여 고구려의 왕이 있으면 평양이라고 불렀다. 장안성은 지금의 금주인데, 고구려가 중국 동북부의 대륙을 경영하기에는 평양(요양)이 너무 멀어 금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국력이 강화되면서 집안-요양-금주로 수도가 계속 서쪽으로 이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안성이 지금의 금주임은 수나라의 2차 침공에서 알 수 있다. 수나라 군사는 611년 탁군에 모였다. 수군은..

역사 2024.05.31

비류백제=예부여의 역사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지리적 위치예부여는 한나라 바로 옆에서 건국하였으므로 후한에 예속될 수밖에 없었다. 예부여는 49년부터 후한에 조공하였다. 예부여는 111년 낙랑군을 공격한 후 바로 귀부하고, 167년 현도군을 공격한 후에도 174년 바로 귀부하는데, 이는 예부여의 위치상 漢에 귀부하지 않으면, 漢은 물론 고구려나 백제 선비 등 다른 세력에 의해 바로 점령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漢이 소국인 예부여를 놓아 두었던 이유는 다른 세력들을 통제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단석괴의 지배단석괴가 그 영토를 3부로 나누어서 그 중 동부가 우북평에서 요동까지인데, 부여와 예맥과 접한다. 여기서 부여는 예부여이고, 예맥은 고구려이다. 단석괴는 영토 내 호수에 물고기가 많아서, 이를 식량으로 활용하기..

역사 2024.05.29

비류계(비류백제)는 황하의 이동으로 백제로부터 독립

동부여는 CE 22년 고구려에 의해 망했다. 비류계 세력은 BCE 6년 소서노 사망 시 온조계에 의해 숙청된다. 온조 정권에서 버림 받은 비류계 세력이 비류 후손을 중심으로, 대방고지(후에 대방군이 되는 지역)가 황하의 수류변동으로 황하에 의해 온조백제와 격리되자 독립하였다. 이들이 부여를 국호로 한 것은 당시 동부여가 망한 상태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비류백제의 건국은 CE 22년 이후이다. 『후한서』는 CE 49년에 부여가 조공한 후 해마다 사절이 왕래하였다고 한다.따라서 예부여의 건국은 22년에서 49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 추측할 수 있다.예부여가 본래 현토군에 속해 있었고 漢 말 공손씨에 복속했다는 것과夫餘王의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언제나 옥갑을 현토군에 미리 갖다두었다가 王이 죽으면..

역사 2024.05.28

강유사사학은 중국 동부의 우리 역사를 부인하기 위해 백제유민을 부정한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은 백제유민을 신라인 당인 송상 왜구 등으로 변조하여 숨기고 있다. 중국 동해안의 해상세력이 백제유민인 것만 밝혀져도 그들 소설의 한국사 날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백제유민 날조는 낙랑군 평양설, 후삼한 남한설과 같은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다. 중국 동해안 백제가 부인되면, 번조선과 번한이 부인되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역사강역 전체가 왜곡된다. 백제유민의 역사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한국사이다.김성호는 노 키 나침반은 백제가 발명했고, 백제가 1세기에 노·돛·키의 3요소를 모두 구비한 노형해선(櫓型海船)을 만들었다고 보는데, 노·돛·키의 3요소를 가진 배는 백제 이전 중국 동해안을 지배했던 번조선인들이 발명했을 가능성이 크다. 백제가 韓에서 CE 9년 마한을 병합한 후 바로 요동..

역사 2024.05.27

백제유민에 대한 대응이 우열을 뒤집었다.

조선(고려)은 1389년 1396년 1419년 대마도의 정착지를 공격하여 힘을 보여주면서, 귀화 허용, 관직 부여, 삼포를 통한 무역 허용을 통해 이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포용하였다. 그러나 삼포왜란과 사량왜변 후 무역 규모를 줄이고 규제를 강화하여 이들을 실질적으로 격리하였다. 조선과 단절된 이들은 중국 동해안에서는 반상반구(半商半寇)가 되어 밀무역과 해적활동을 하고 여타 지역에서는 무역을 하며 일본의 해외무역상이 되었다. 1635년 일본은 해외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나가사키로 이주시켰는데, 1670년대에 이르러서는 나가사키 전체인구 약 6만 명의 6분의 1인 약 1만 명이 이들 무역상일 정도로 번성하였다. 나가사키의 백제유민은 흥복사를 중심으로 한 삼강방 (三江幇: 절강·강남·상서), 복제사를 ..

역사 2024.05.27

주원장이 경인왜구 침입의 원흉

원의 쿠빌라이는 사무역을 금지하고, 관민 합자의 무역선(관7, 민3)만 허용하였지만, 성종은 해금을 철회하고 적성국이었던 일본과의 무역까지 허용하였으면서도, 백제유민과 고려와의 왕래는 금지시켰다. 고려와 백제유민이 결합할 경우 원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 말엽인 1348년부터 백제유민인 방국진과 장사성은 원의 쇠약을 틈타 독자세력화 하였지만, 주원장이 이들을 제압하고, 1368년 즉위하여 백제유민의 본거지격이었던 주산군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해금정책을 실시하자, 생활기반이 파괴된 백제유민은 해적이 되었다. 명나라는 이들을 왜구라 불렀다. 명이 이들을 왜구라 한 이유는 전술하였듯이 양자강 어귀가 원래 왜인들이 정착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대 왜구의 왜는 고대에 사용되..

역사 2024.05.27

칼돈(소위 명도전, 연도 제도 등)의 문양은 明이 아니라 朝鮮이다

도폐의 문양​도폐의 문양은 아사달 문양이다. 아사달 문양이 朝鮮이므로 이 문양은 明이 아닌 朝鮮이다. 도폐의 문양이 연나라나 제나라의 화폐가 아닌 조선의 화폐임을 명백히 표시하고 있다. ​​아사달 문양아사달=朝鮮은 아침해가 뜨는 언덕을 말한다. 즉 鮮은 언덕을 의미한다. ​ㅇ 朴光敏. "고조선 국명 및 지명에 대한 어원적(語源的) 고찰(考察)." 온지논총 60. 2019. 211쪽은 [‘鮮’의 古訓에는 ‘작은 산’의 뜻이 있는데, 詩經 에, “度(탁)其鮮原 居岐之陽; 작은 산과 언덕을 헤아려 岐山의 남쪽에 터를 잡으셨네.”라고 하여 ‘鮮’을 ‘山’의 뜻으로 썼다. 西周 때 著作으로 알려진 逸周書 권4 에도, “王乃出圖商, 至于鮮原; 왕께서 마침내 商[殷]을 도모하여 언덕에 이르셨네”라고 하였는데,..

역사 2024.05.25

역현은 연소왕이 수도로 한 계이고 연하도는 호타하 남쪽이다.

역현은 연소왕이 수도로 한 계이고 연하도는 호타하 남쪽이다. 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북경 부근의 계는 사기이다. ​진개 침략 전 연나라의 수도는 남역수와 요동고새 사이이다. 한비자는 연소왕이 계(薊)를 수도로 삼았다고 했는데, 강단유사사학은 薊를 북경이나 천진 부근이라 하고, 현재의 역현(이현)을 武陽 즉 연하도라 주장한다. 역현은 소왕의 영토확장 전 국경인 요동고새의 북쪽인, 중역수와 북역수 사이이다. 진개의 침략으로 북경까지 영토로 하자 연소왕은 수도를 요동고새 북쪽인 역현으로 옮겨 계라 하였다.​ 따라서 역현의 초기 유물은 진번조선의 유물이다. 역현 신장두 30호묘에서 한국식 꺽창과 흉노계통의 금장식이 출토되었다. 조선의 화폐인 명도의 고식(古式)이 하북성에서 발견되었고, 그 거푸집이 역현과 승덕에서 ..

역사 2024.05.22

미사흔을 볼모로 잡고 박제상을 살해한 왜는 고구려 위성국인 안라국

실성왕은 402년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광개토대왕이 나라에 설치한 고구려계 국가이다. 열도 정벌 시 고구려군에 협조한 안라국일 가능성이 크다. 400년에 광개토대왕이 열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지배 범위가 축소되고 고구려계 소국이 힘을 얻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열도 백제에 승리하였으므로 백제관료인 왜왕에게는 볼모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실성왕이 정적도 제거하고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나라의 안라국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계 국가에 미사흔을 보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백제의 관료인 백제 왜왕이 아니다.

역사 2024.05.21

백제 멸망 후 열도는 8세기까지 당나라, 신라, 대진의 부용국

당은 백강전투에서 승리 후 664년 쓰쿠시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672년 5월 철수할 때까지 8년간 약 2,000명으로 구성되는 부대를 6회에 걸쳐 파견하여 열도를 지배하였다. 「일본서기」 38대 천지의 재위 기간인 668년-672년은 당나라의 열도 지배기간에 포함되므로, 열도에 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38대 천지도 당나라와 교섭한 백제인을 모델로 하여 날조된 인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은 672년 요동반도백제와 평양(요양)의 전투에서 신라의 우세가 거의 확정되므로 열도를 지배하기 어려워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열도에서 떠난 후, 672년 6월 신라는 2만 병력을 파견하여 임신전쟁을 통해 친신라정권을 세우고 열도에 최초의 고대국가를 성립시킨다. 「일본서기」 39대 천무..

역사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