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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도 근초고왕 시 낙랑군을 영토화했다

246년 이후 백제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낙랑은 당연히 낙랑군 본군이다. 韓 지역 즉 백제는 낙랑군 동남쪽이다. 286년 책계왕이 대방왕과 혼인으로 동맹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서이다. 304년 분서왕이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는 것은 오류로 보인다. 『삼국사』 편찬자들이 온조왕의 낙랑군 동부도위에 대한 언급을 본군으로 착각하고 낙랑 동쪽 현을 취하였다는 기사를 낙랑 서쪽 현을 취하였다고 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이왕과 분서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것은 황하 항해의 안전을 위해 황하 서쪽인 낙랑군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서진 말 ‘흉노’ 선비 등 중국 북부의 조선인들이 중국으로 남하하여 중국 북부를 통치하는 소위 북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그 혼란기를 ..

역사 2024.05.17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광서성) 출신

흑치상지 묘지명에 ‘그 조상은 부여씨로부터 나왔는데 흑치지역에 봉해지면서 흑치를 성으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양자강 하류 이남의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빈랑(檳榔)이라는 나무 열매를 항상 씹어 이가 검게 된다고 한다.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 모두 “黑齒常之 百濟西部人(흑치상지는 백제의 서부인이다)”이라 하는데, 『구당서』와 『신당서』는 월주가 백제의 서부 지역이라고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월주는 전술하였듯이 진평을 의미한다. 『중국장수전전(中國將帥全傳)』도 흑치상지의 출신지인 백제 서부가 지금의 광동성 흠현 서북이라고 하는데, 흠현이 광서성 남령시(南寧市) 동남쪽이므로 흠현 서북은 백제향 즉 진평이다. 진평=흑치는 백제의 동남아 무역을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백제가..

역사 2024.05.17

백제의 진평은 광서성

『송서』, 『양서』, 『양직공도』, 『남사』, 『통전』의 진평과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 서부 지역인 월주는 광서성(廣西省) 장족자치구이다. 『송서』에 의하면, 광주(廣州) 울림군(鬱林郡)에 진평현이 있었으며, 『中國地圖集』(1995년판)에는 宋나라가 설치했던 진평현 경내에 지금까지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살아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도 장족자치구의 현지인들은 백제향의 중심지인 백제허를 대백제(大百濟)라고 읽으며, 전라도에서 사용되었던 외다리방아와 맷돌을 사용하고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도 진평현이 광서성에 있다고 한다. 진평이 북조의 사서에서 언급되지 않는 것은 진평이 중국 남쪽 즉 남조 영역의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2024.05.17

백제 첫 수도인 비류의 위례성은 두번째 수도인 온조 위례성의 동북쪽

BCE 2년에 낙랑군 동부도위가 불태운 위례성은 한수 동북쪽의 주민을 징발하여 수리한 것으로 보아 비류의 첫 위례성이고, 이로부터 미추홀이 낙랑 동부도위와 더 가까운 위치에 있었으며 비류의 위례성이 온조의 위례성 동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이 인천을 비류, 온조를 서울이라 하여 한반도에 비정하는 것은 두 위례성의 위치관계 확인만으로도 날조임이 드러난다.

역사 2024.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