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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흔을 볼모로 잡고 박제상을 살해한 왜는 고구려 위성국인 안라국

실성왕은 402년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광개토대왕이 나라에 설치한 고구려계 국가이다. 열도 정벌 시 고구려군에 협조한 안라국일 가능성이 크다. 400년에 광개토대왕이 열도를 정벌하여 백제의 지배 범위가 축소되고 고구려계 소국이 힘을 얻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열도 백제에 승리하였으므로 백제관료인 왜왕에게는 볼모를 보낼 필요가 없었다. 실성왕이 정적도 제거하고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목적으로, 나라의 안라국으로 추정되는 고구려계 국가에 미사흔을 보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미사흔을 볼모로 받는 왜는 백제의 관료인 백제 왜왕이 아니다.

역사 2024.05.21

백제 멸망 후 열도는 8세기까지 당나라, 신라, 대진의 부용국

당은 백강전투에서 승리 후 664년 쓰쿠시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672년 5월 철수할 때까지 8년간 약 2,000명으로 구성되는 부대를 6회에 걸쳐 파견하여 열도를 지배하였다. 「일본서기」 38대 천지의 재위 기간인 668년-672년은 당나라의 열도 지배기간에 포함되므로, 열도에 왕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38대 천지도 당나라와 교섭한 백제인을 모델로 하여 날조된 인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당은 672년 요동반도백제와 평양(요양)의 전투에서 신라의 우세가 거의 확정되므로 열도를 지배하기 어려워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당이 열도에서 떠난 후, 672년 6월 신라는 2만 병력을 파견하여 임신전쟁을 통해 친신라정권을 세우고 열도에 최초의 고대국가를 성립시킨다. 「일본서기」 39대 천무..

역사 2024.05.21

김부식이 열도의 백제 영토를 기술하지 않은 이유

김부식은 『삼국사』에서 왜왕 취임이나 백제 왕족이 열도에 공무로 출장가는 것을 인질로 표현했고 왜왕의 보고와 왜왕에 대한 지시를 사신(외교관계)으로 표현했다. 이는 「일본서기」를 역사서로 간주한 김부식의 무지로 인해 생긴 표현이다. 그는 백제의 관직명 ‘왜왕’을 왜국의 왕으로 생각하였다. 낙랑군이 요양이라고 생각하여 대륙백제의 사료를 싣지 않았던 것처럼, 김부식은 올바른 원사료를 변개(김부식의 생각에선 오류를 수정)하였거나 올바른 사료를 버리고 「일본서기」와 같은 그른 사료를 채택하여 기록하였다. 아신왕이 397년 왜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은 태자가 왜왕으로 취임하였음을 의미한다. 태자를 왜왕으로 보냈다는 것은 당시 광개토대왕과의 전쟁으로 열도 경영(물자와 인력 수탈)이 중요해졌기..

역사 2024.05.21

우전팔번화상경은 무령왕의 동생이 왜왕이었다고 한다

와카야마의 우전팔번 신사에서 발견된 거울(우전팔번화상경)에서도 열도는 백제관료인 왜왕이 다스리는 곳임이 드러난다. 거울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 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泰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竟 명문의 내용은 “계미년 팔월의 날, 삼년상의 마지막 해(503년)에, 남동생 왕이 어시사가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가 길이 태평하기를 바라며,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두 사람 등을 보내 최상품 구리 이백근을 취하여 이 거울을 만들었다.”이다. 이 명문에서 무령왕 초기 왜왕은 무령왕의 동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형인 무령왕은 백제왕으로서 삼년상을 치르고 있었고,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왜왕에게 거울을 보냄으로써 동생에 대한 신임을 확인하여 주어 열도 통치의 안정을 ..

역사 2024.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