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 15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樂良

연가7년명 금동불상광배의 ‘연가(延嘉)7년’을 539년으로 보는데,​[7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본고에서 479년의 연호는 영화임을 밝혔다. 599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599년에는 북제, 북주, 수대의 조각양식이 등장하고 있어(곽동석, 『한국의 금동불 1』, 다른세상, 2016. 56쪽)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539년은 안원왕 9년인데, 안원왕으로의 승계 시 혼란으로 인해 연호의 사용이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불상광배 뒷면에 ‘高麗國樂良東寺’가 새겨져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樂良’을 지금의 평양이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듯이 6세기에 濼浪이 樂良으로 변하여 쓰여졌다면, 덕흥리고분과 안악3호분(동수묘)에 의해 고구려에 유주 濼浪郡이 있었음이 입증되므로, ‘高麗國樂良’은 고구..

역사 2024.06.05

강단의 永和十三年 사기질 (사마담에게 고마운 이유)

동수묘 묵서명은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으로, 나이 69세에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강단 사기꾼들은 영화13년을 사마담(동진 목제)의 연호로서 357년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사마담은 영화란 연호를 356년까지 사용하였고 357년에는 승평이라는 연호를 사용한다.​1. 고구려가 당시 밀접한 관계가 아니었던 남조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적..

역사 2024.06.03

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주 치소 광계와 지금 치소 연국은 낙양에서 2300리이다)

덕흥리고분 묵서명에서 후연 유주의 치소였던 광계와 후연의 수도였던 용성이 낙양에서 2300리라 한다. 즉 광계와 연국은 현재의 보정시 부근이다.  고구려는 후연을 정복하고 후연 남부에는 북연을 설치하여 위와의 완충지대를 만들었고, 서진의 유주와 평주 즉 당하에서 영정하까지의 후연 영토엔 고구려의 유주를 설치하여 영토화 하였다. 고구려 멸망 시까지 동성왕에게 탈취당한 시간 이외에는 이 영토를 유지하였고, 문자명왕 시에는 백제의 韓 지역까지 정복하였다. 강단사기꾼들은 평주의 낙랑군이 지금 평양이라 하는데, 서진의 유주 남쪽이 서진의 평주이고 평주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있었다. 즉 낙랑군과 대방군은 낙양에서 2300리를 넘지 못한다. 지금 평양과 황해도는 낙양에서 5천리가 넘는다. 그들이 교치했다고 주장하는 요..

역사 2024.06.02

安平樂未央과 長樂未央

강단유사사학은 단동에서 발굴된 기와에 ‘安平樂未央(평안함과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이라는 문구가 발견되기 때문에 단동을 서안평이라고 하면서, '서안평에서의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 이라는 의미라 주장한다.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gskh_007_0040_0010_0090_0020] 林起煥安平 註 001 樂未央 註 002 安平 註 001 樂未央 註 002db.history.go.kr​기와의 길상구를 지명으로 전환하는 유사사학자들의 천재성은 유사역사학계에 길이길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강단유사사학은 여대(旅大)에서 출토된, ‘長樂未央’명 와당에선 여대를 장이라는 도시로 보지 않고, 長樂未央(늘 즐거움이 다하지 않기를) 전체를 길상구로 본..

역사 2024.06.01

후한의 고구려에 대한 조공 중단 후

후한의 조공 중단으로 전쟁 발생전술하였듯이 대무신왕과 유수는 1세기 전반 낙랑군을 두고 1승 1패를 하였고, 모본왕은 CE 49년부터 후한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후한이 중기에 접어들며 초기 시행했던 북방예산을 조달하지 못하자 후한에 대한 불만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漢의 조공이 중단되자 105년 침입하였다.고구려가 111년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에 속하기를 구했고, 침입하였다는 것은 漢이 조공을 재개하라 요구한 것이고, 漢이 거부하자 바로 현도를 공격하였다는 것이다. 김부식은 이러한 전후관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어느 하나가 잘못이라 판단하였다. 조공을 받지 못한 오환선비는 121년의 공격처럼 고구려와 공동작전도 하였다. 고구려는 후한과 주로 현도군을 두고 싸웠다. 현도군이 가장 국경과 가까웠고, 요동군..

역사 2024.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