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34

예맥조선(위만조선)은 漢나라 북동쪽에 있었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漢나라가 예맥조선의 북쪽에 있었다고 하면서 漢에 망하는 예맥조선의 왕검성은 현재의 평양이라 사기친다. 그러나 이는 완전한 거짓말이다. 위만은 요동고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동쪽으로 도주하였으며, 진한 교체기에 예맥조선에 중국인 망명자들이 모여들자 준왕은 이들을 서부에 살게 하였으며, 위만도 서쪽에 거주하게 해주면 서쪽을 지키는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예맥조선이 한반도 내라면 서쪽을 지킨다는 것은 바다를 지킨다는 말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기』 「흉노열전」은 BCE 200년 경 흉노의 상황에 대해 “모든 좌방의 왕과 장수는 동쪽에 위치하여 상곡을 지난 동쪽을 맡아 예맥조선에 접했다”라고 한다. 『사기』 「흉노열전」은 “이때 한(漢)은 동쪽으로는 예맥조선을 공격하여 군으로 삼았다”고 한다..

역사 2024.07.31

선진 시기 문헌에서 동이는 중국 동부의 번한 번조선을 일컫는다

강단유사사학이 위서라 주장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남국 기술이 『후한서』와 일치한다. 『규원사화』는 탕왕 때 후퇴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후한서』와 일치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후한서』가 우리 사서라면 날조라 주장했을 텐데 중국 사서여서 그러지도 못한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후한서』가 중국 동부를 동이의 땅이라 하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삼한이 방 사천리라 하므로 그에 부합하게 추론할 것이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날조에 날조를 거듭하고 억지에 억지를 거듭하여, 한민족은 BCE 12세기에 석기시대를 벗어나 BCE 7세기에나 요동에서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되지만 진개에 의해 평양으로 쫓겨났다가 漢의 식민지가 되고, 한반도 남부는 4세기까지 70여개 소국이 있었다가 왜의 식민지가 되..

역사 2024.07.28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

무왕은 사택씨 등 부여의 귀족 세력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였던 익산으로 천도하였다. 「관세음응험기」에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신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의 왕성과 제석사 유적, 제석사 명문 기와가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을 증명한다. 익산 쌍릉 중 대릉은 매장된 인골 분석상 무왕릉으로 추정된다. 『삼국사』는 무왕 시, 사비와 왕도를 구별하고 있어, 왕도는 익산임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임에도 무왕 33년 즉 632년에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다. 이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백제의 귀족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왕 사후 백제는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삼국사』는 의자왕 시 사비가 왕도임을 명시하고 있다.백제의 주된 왕도였던 서도 한성과, 서도 한성 ..

역사 2024.07.28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은 황하 동쪽

문주왕이 475년 천도한 웅진은 韓의 웅진이다. 문주왕은 천도 이듬해인 476년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대두산성은 온조왕이 마한을 CE 8년 멸망시킨 직후인 CE 9년 쌓은 성이므로 韓 지역에 있는 성이다. 마한을 멸망시킨 후 1년만에 한반도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두산성은 웅진 북쪽이며 한수 이북과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웅진이 수도가 되었으므로 웅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시켜야 하며, 주민을 멀리 이동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웅진을 한반도 웅진으로 보며, 대두산성을 주로 아산 일대로 보는데, 이는 소설에 불과하다. 한수 이북의 주민을 아산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공주 남쪽의 산성을 강화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대..

역사 2024.07.28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이유

전술한 바와 같이 소서노의 위례성(미추홀)이 BCE 18년 건국 시 도읍지이고, BCE 5년 온조의 찬탈 시 온조의 위례성(서도 한성)이 두번째 수도이다. 두 위례성은 모두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에 있었다. 그 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근초고왕이 동도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도 한성이 백제의 수도였다.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것은 서울이 근초고왕 시기에만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역사 2024.07.28

서동은 왜 선화공주와 혼인해야만 하였는가?

서동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혼외 왕족이다. 서동은 어머니와 익산에서 살면서 마를 캐다 사금을 발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부자가 되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으로 인해 서동은 백제의 귀족과 혼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서동은 신분세탁을 위해 신라의 공주와 혼인하려 하였고 이왕이면 백제에까지 미인으로 소문 난 선화공주로 결정하였다. 서동은 한편으론 진평왕에게 막대한 금을 선물하였고, 한편으론 선화공주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다.  서동은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부를 잘 활용하여 귀족들의 인심을 얻었고, 혜왕 법왕이 연이어 재위 2년만에 사망한 상태에서, 왕위를 승계받을 수 있었다.  삼국유사의 서동 선화공주 설화는 역사적 사실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가지가지의 소설을 쓰고 있다.  ..

역사 2024.07.26

선화공주는 설화상의 허구 인물인가?

일부 강단유사사학자는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설화이므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근거가 가관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택왕후 설명“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에서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에 의하면, 사택왕후는 재물을 희사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고, 639년(무왕 40)에 사리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 무왕의 비는 신라의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아니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무왕은 641년 재위 42년에 사망하였다. 639년 당시 사택왕후가 무왕의 비라고 선화공주가 무왕의 비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가? 입증이란 말을 이렇게 쉽게 하는 그들의 뇌는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지 궁금할 뿐이다. 당시 왕비가..

역사 2024.07.26

강단 사기꾼들의 견당매물사 날조

『입법구법순례행기』의 원문廿八日. 大唐天子差入新羅慰問新即位王之使, 州青兵馬使吴子陳· 崔副使· 王判官㝳卅余人登來寺裏相看. 夜頭張寶高遣大唐賣物使崔兵馬司來寺問慰.(839년 6월) 28일 당나라 천자가 새로 즉위한 왕을 위문하기 위해 신라로 보내는 사신인 州青兵馬使 오자진(吳子陳)과 최부사(崔副使) 그리고 왕판관(王判官) 등 30여 명이 절로 올라왔으므로 만나보았다. 초저녁 장보고가 보낸 大唐賣物使 崔兵馬司가 절에 와서 위문하였다.​ㅇ 大唐賣物使의 의미- 원문에 의하면 遣은 장보고가 엔닌에게 보냈다는 의미이고, 遣大唐賣物使란 직책은 없음. - 최훈의 직책은 大唐賣物使 겸 兵馬司로 당나라의 관직명임. - 대당매물사는 당의 물건을 파는 당나라의 수출관이란 의미임.- 최훈은 당나라 치청절도사 지분이 있는 무역선의 선..

역사 2024.07.25

경기도가 조조 위나라 영토였다는 강단 사기꾼들

『삼국지』에 의하면 245년경 조위는 辰韓 여덟 마을을 낙랑군에 귀속 시키려 했는데 韓이 반발하여 대방군을 공격하자,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韓을 침략하여 궁준이 전사하였지만 韓을 滅하였다. 진수는 韓을 멸하는 기사 바로 앞에서 공손강은 군대를 일으켜 倭와 韓을 공격하여 帶方에 복속시켰다 하므로 멸했다는 것은 복속시킨 것이 아니라 韓이라는 정치체가 있었다면 그것을 말 그대로 없앴음을 뜻한다. 여기의 韓은 황하 이동으로 황하 서쪽에 위치하게 되어 황하 동쪽의 韓백제에서 분리되었고, 그 결과 조위에 쉽게 멸망되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辰韓이 4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근거는 없다. 임나 선생님께서 4세기에 들어오시므로 4세기까지는 辰韓이 죽어도 버텨줘야 하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역사 2024.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