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34

강단유사사학에선 남쪽과 동쪽은 같은 말

강단유사사학은 근거도 없이 辰國을 한반도 중남부라 주장한다. 그들은 역계경이 동쪽의 辰國으로 갔다는 말을 남하한 것으로 변경하며, 韓을 한반도 남부라 주장하고. 辰國과 韓이 모두 한반도 중남부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준왕이 바다를 건너 남쪽의 韓으로 갔다고 하며, 『위략』은 역계경이 동쪽 辰國으로 갔다고 하므로,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소설에 불과하다. 그들은 요서에 위치한 전삼한의 辰韓=辰國을 부정하여 우리 역사에서 고조선을 지워버리고 있다.

역사 2024.07.24

네가 辰國을 모르면 너는 우리 역사를 모르고 있다

辰國은 단군조선 이래 요서를 차지한 우리 민족의 중심국을 지칭하는 말범엽이 삼한이 모두 옛 辰國이라 한 것은 고구려로부터 탈취한 사서에 『단군세기』와 같은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수가 신한(辰韓)이 옛 신국(辰國)이라고 하였는데, 신한을 부를 때 辰國이라 하기도 하였다는 것과, 조선의 천자국을 일반적으로 辰國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부여나 북부여를 부를 때도 조선의 천자국(중심국)이라는 의미로 신국(진국)이라 하였을 것이다. 역계경이 우거와 정책 차이로 예맥조선을 떠나 동쪽의 辰國으로 갔는데, 역계경 집단이 예맥조선과 무역하는 나라와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당시 예맥조선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북부여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소위 발해의 국호가 진국(震國)..

역사 2024.07.24

난하설의 모순과 폐해

난하설의 자기모순재야유사사학은 강단유사사학처럼 후삼한남한설을 추종한다. 후삼한남한설은 좀비 삼한과 결합하여 야마토임나설이 된다. 난하설에 의하면 강단유사사학의 말처럼 소위 후삼한이 바닷속에 있게 되는데도, 재야유사사학은 아무런 설명 없이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인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 초기 신라와 백제가 낙랑 동부도위와 인접하여 있으므로 낙랑군이 북한에 있고, 공손씨와 조위가 한반도남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서, 낙랑군 평양설을 공격하고, 공손씨와 조위가 韓을 지배했다는 기사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나 설명도 없이, 공손씨와 조위가 남한을 지배했다는 주장에 분노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난하설의 폐해난하설에 따르면 韓을 발견할 수 없다. 韓을 발견하지 못하면 ..

역사 2024.07.21

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

재야유사사학이 토론을 거부하는 난하설의 소설성난하 갈석산설(창려 갈석산설)은 역사날조 총책 담기양이 제조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다. 윤내현이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는 근거는 요수가 난하라는 것과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다. 윤내현은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나, 이는 요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실질상 윤내현은 난하가 요수라는 단 하나의 근거로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하가 요수였던 적은 없다. 윤내현은 『여씨춘추』 「유시람」 고유 주석을 근거로 난하가 요수라 하나, 본고에서는 고유가 말하는 요수가 중역수임을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도 갈석산에 대해 주장하려면, 요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는 것이 ..

역사 2024.07.19

재야유사사학의 소양 부족

​ 재야유사사학도 강단유사사학처럼 토론을 거부한다. 정확히는, 재야유사사학은 학문적 소양이 부족하여 학문적 토론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 역사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학문적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주장을 방어하지 못하면 그들이 틀렸음을 인정해야 함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강단과 재야는 토론하지 않는다. 물론 강단은 거의 다 틀렸고, 재야는 강단보다는 덜 틀렸지만, 대중은 강단의 권위에 복종하므로 강단유사사학은 유지된다. 재야유사사학의 가장 큰 오류는 난하 갈석산설이다. 난하 갈석산설은 강단유사사학으로부터 삼한을 바닷속에 있게 하는 유사사학이라 공격을 받아왔다. 학문이 되려면, 난하설에 따르더라도 후삼한이 바닷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해야 하고, 반론을 못하면 난하설을 철회해야 한다. 그래..

역사 2024.07.19

유시민의 토착왜구성

소위 보수는 매국노를 계승하였으므로 그들이 토착왜구 행태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소위 진보도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한다. 강단유사사학에 속하지 않는 진보 지식인이라면 강단유사사학 해체를 주장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 지식인들은 강단유사사학을 명시적으로 옹호하거나 강단유사사학에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음으로써 강단유사사학 생태계의 구성부분이 되고 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유시민이다. 유시민은 박유하의 처벌을 반대하여 서명한 사람이다. 유시민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 그는 역사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모든 분야의 지식이 부족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하였다. 그의 역사책은 베스트셀러이다. 그가 쓴 역사책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 「나의 한국 현대사」, 「역사의 역사」, 「내 머리로 생각하는 역사 이..

역사 2024.07.18

한국과 일본 사회 저질성의 원인

일본은 스스로를 뿌리 없는 민족이라 가르친다. 한국으로부터의 이주민들이 그들의 조상이고, 열국의 일원으로 우리 역사에 참여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므로 그들은 조상을 찾을 수 없다. 조상이 없으면 즉 역사가 없으면 자기정체성이 있을 수 없다. 일제 전범들의 자기부정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다. 전범들 즉 무식한 하급 무사들의 맹목적 국가주의가 현재 일본의 이념이다. 그래서 일본 사회는 저질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우리 역사 부정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본처럼 한국 사회도 저질이다. 우리 조상은 중국 주변의 미개인들로서 중국의 문화로 개화되었고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로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남쪽은 야마토왜의 군사적 경제적 영향력 아래 있었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었다고 인식한다. 홍익인간의 이..

역사 2024.07.18

강단유사사학은 최재석을 왕따 시켰다

유사학문과 학문의 차이는 학문적 토론의 여부이다. 유사학문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한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과 재야유사사학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최재석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었다. 최재석은 학문적 토론을 거부하는 강단을 사기꾼이나 쓰레기나 유사학자라 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좋은 말로 타일렀다.   내가 그들의 학문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면 의당 (나의 비판이 타당한지 부당한지) 대답이 있어야 할 텐데도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2010)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병도(1989년 작고), 이기백(2004년 작고), 김철준(1989년 작고) 교수는 나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고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내 나이 이기동 교수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니 내 사후가 아니라 생존 시에 나의 비판에 답..

역사 2024.07.18

강단유사사학과 일제 육군 참모본부의 교시

강단유사사학과 일제 육군 참모본부의 교시최재석은 일본인 학자들의 수미불일치를 ‘서두의 위장법’이라 명명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스승을 좇아 항상 서두의 위장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고, 『삼국사』를 신뢰하고, 동북공정에 반대한다고 항상 서두에서만 말하고, 본론과 결론은 『삼국사』를 불신하고 야마토임나설과 동북공정을 추종한다. 전술하였듯이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1870년부터 역사 날조를 시작하였다. 참모본부는 야마토임나설에 관해서는 『황조병사』(1880년)와 『임나고』(1882년)를,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관하여는 1884년 「동부여영락대왕비명해」와 「고구려고비고」를 제작하였다. 일제는 야마토임나설을 날조하고,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자를 변조하거나 지워서 야마토임나설의 장해물을 제거하였다. ..

역사 2024.07.15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일제유사사학의 야마토임나설(임나일본부설) 쓰에마스의 「임나흥망사」(1949)는 일제유사사학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야마토왜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임나=가야를 직접 지배했다는 것으로 연민수는 쓰에마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末松說에 따르면, 백제는 367년 처음으로 일본에 遣使하여 국교를 열고 백제의 요청에 따라 己巳년(369년)에 일본이 대규모 출병을 단행하여 이를 계기로 이전부터 진행중이던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나아가 김해의 임나가라를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을 직접 지배 하에 두고 그 외곽에 있던 백제와 신라를 부용화시켜 간접지배 하에 두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이제국을 총칭하는 이른바 임나의 성립을 보게 ..

역사 2024.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