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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 시기 문헌에서 동이는 중국 동부의 번한 번조선을 일컫는다

강단유사사학이 위서라 주장하는 『단군세기』와 『규원사화』의 남국 기술이 『후한서』와 일치한다. 『규원사화』는 탕왕 때 후퇴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후한서』와 일치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후한서』가 우리 사서라면 날조라 주장했을 텐데 중국 사서여서 그러지도 못한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후한서』가 중국 동부를 동이의 땅이라 하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삼한이 방 사천리라 하므로 그에 부합하게 추론할 것이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날조에 날조를 거듭하고 억지에 억지를 거듭하여, 한민족은 BCE 12세기에 석기시대를 벗어나 BCE 7세기에나 요동에서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되지만 진개에 의해 평양으로 쫓겨났다가 漢의 식민지가 되고, 한반도 남부는 4세기까지 70여개 소국이 있었다가 왜의 식민지가 되..

역사 2024.07.28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

무왕은 사택씨 등 부여의 귀족 세력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였던 익산으로 천도하였다. 「관세음응험기」에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신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의 왕성과 제석사 유적, 제석사 명문 기와가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을 증명한다. 익산 쌍릉 중 대릉은 매장된 인골 분석상 무왕릉으로 추정된다. 『삼국사』는 무왕 시, 사비와 왕도를 구별하고 있어, 왕도는 익산임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임에도 무왕 33년 즉 632년에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다. 이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백제의 귀족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왕 사후 백제는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삼국사』는 의자왕 시 사비가 왕도임을 명시하고 있다.백제의 주된 왕도였던 서도 한성과, 서도 한성 ..

역사 2024.07.28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은 황하 동쪽

문주왕이 475년 천도한 웅진은 韓의 웅진이다. 문주왕은 천도 이듬해인 476년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대두산성은 온조왕이 마한을 CE 8년 멸망시킨 직후인 CE 9년 쌓은 성이므로 韓 지역에 있는 성이다. 마한을 멸망시킨 후 1년만에 한반도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두산성은 웅진 북쪽이며 한수 이북과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웅진이 수도가 되었으므로 웅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시켜야 하며, 주민을 멀리 이동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웅진을 한반도 웅진으로 보며, 대두산성을 주로 아산 일대로 보는데, 이는 소설에 불과하다. 한수 이북의 주민을 아산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공주 남쪽의 산성을 강화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대..

역사 2024.07.28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이유

전술한 바와 같이 소서노의 위례성(미추홀)이 BCE 18년 건국 시 도읍지이고, BCE 5년 온조의 찬탈 시 온조의 위례성(서도 한성)이 두번째 수도이다. 두 위례성은 모두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에 있었다. 그 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근초고왕이 동도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도 한성이 백제의 수도였다.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것은 서울이 근초고왕 시기에만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역사 2024.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