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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 영토가 아니라는 강단유사사학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 영토가 아니다강단유사사학이 기문국이라 주장하는 남원의 고분에서 백제의 금동신발, 청동거울, 계수호가 출토되었다. 지방세력에게 하사하는 위세품이 백제의 것이라면 당연히 그 지역은 백제가 지배한 지역이지 가야일 수가 없다. 충청도 전라도 모두 백제의 위세품이 발굴되므로 처음부터 백제의 영토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같은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충청도는 백제, 나주는 마한, 기문은 임나=가야라 주장한다. 그들이 백제 영역이 아니라고 사기 치는 곳에서 발굴되는 백제 위세품은 그 지역의 독립국이 백제와 교섭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세품은 백제의 지방통제방식이므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열도 등 백제의 위세품이 나온..

역사 2024.07.01

가야의 서부 확장은 소설 야마토임나의 하일라이트

강단유사사학은 사료의 글자 날조와 횡설수설과 고도의 가짜 음상사 기법을 통해 가야가 전라도로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의 확장은 없었다. 가야는 백제와 싸울 수 없다. 신라와 싸우기도 벅찼다. 백제는 김수로 집단의 한반도 이주에 도움을 주었던 나라로 추정되나, 신라는 탈해왕이 60년경 가야를 정복하려 하였다. 처음 신라와 가야는 비슷한 소국이었고, 백제는 대국이었다. 가야가 대국인 백제를 적으로 하면 뒤에서 신라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존치시켜 신라를 견제하게 한 후 고구려에 대비할 수 있었으므로 가야와 적대적일 필요가 없었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4세기 말부터 백제가 약해졌고, 신라는 국력이 커지면서 고구려에서 독립하기 위해, 5세기 중엽부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

역사 2024.07.01

백제영토를 임나로 날조하는 강단유사사학

기문과 대사를 각각 남원과 하동으로 보는 주류 강단유사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한다.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이 부딪쳐서 대가야와 백제는 「己汶」을 놓고 영역을 다투게 되는데, 당시에 기문은 대가야에 속해 있었다. 이 사실은≪백제본기≫를 토대로 하여 개작된 듯한≪日本書紀≫소재의 사료에 보인다. 여기서의 기문은 가야 계통 국명의 하나로서 ≪新撰姓氏錄≫ 吉田連條에 上·中·下의 3기문이 나오고, ≪梁職貢圖≫ 소재의 百濟旁小國 중에 상기문이 나오며, ≪삼국사기≫ 樂志의 우륵 12곡명 중에 상·하의 奇物이 나온다. 기문은 상·하 또는 상·중·하로 나뉘는 것으로 보아 넓은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남원(옛 지명 古龍郡) 및 임실(옛 지명 任實郡 居斯勿縣)지방으로 비정된다. 그들..

역사 2024.07.01

6세기 초 백제의 열도 소국간 구역 조정

강단유사사학이 기문을 남원, 대사를 하동이라 주장하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일본서기」의 반파, 기문, 대사 관련 부분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발생한 사실이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임나4현의 소속 변경도 동일한 성격의 행위이다. 임나4현이나 기문 대사 다사진의 마을국가간 이동은, 6세기 초 백제가 고구려의 열도 위성국으로부터 열도를 완전히 탈환한 후, 고구려계 지배하의 기존 마을국가들간 역학관계를, 백제의 지배에 편하도록 재편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일본서기」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ㄱ) 513년 6월그리고 따로 “반파국(伴跛國)이 신의 나라의 기문(己汶)이라는 땅을 약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르게 판단하여 원래 속한 곳에 돌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ㄴ) 513년..

역사 2024.0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