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유사사학은 가야=임나의 멸망에 대해 뜬금없이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갑자기 창녕비를 들고나온다. 그들은 창녕비에 순수관경이라는 문구는 없어도 창녕비를 척경비(拓境碑)나 순수관경(巡狩管境)비로 볼 수 있어, 창녕이 당시 가야와 국경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진흥왕이 창녕까지 巡守해 와서 軍勢 시위를 하고 일련의 사면조치도 취하였고, 이는 가야연맹 제국에 대하여 위협과 유화의 시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러나 창녕비문 어디에도 순수관경이라는 문언이나 척경이라는 문언이 없다. 창녕비 어디에도 군세 시위를 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① 제목[題記] ② 순수배경과 경과[紀事] ③ 왕을 수행한 사람[隨駕人名列記]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