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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흥리고분 묵서명과 태수래조도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북연을 세우면서 진번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 요동고새 남쪽 영토도 새로 획득하였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의 12군은 명확하며, 나머지 하나는 대방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 시 발해만 부근 국경] * ‘韓 백제 북부’는 고구려가 396년 점령한 영토로 韓태수를 임명하여 다스린다. 연군은 후연의 용성으로 추정되고 대군은 태행산맥 서쪽이다. 따라서 이 13군은 하북성에서는 북쪽은 영정하, 남쪽은 당하까지를 영역으로 하고 산서성에서는 대까지를 영역으로 한다. 통역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이 지..

역사 2023.02.08

홍범도

『독립신문』 1920.12.25. 제88호 제4면은 봉오동전투의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부관은 안무이며, 홍범도는 연대장이라 하고, 최진동의 지휘에 따라 전투가 수행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홍범도가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다고 날조한다. ​ 홍범도는 존경할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최고사령관의 작전명령을 무시했다. 자유시로 간 이후에는 소련에 영합하여 독립군의 해체에 동의했고 그 후 그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 살았다. 레닌이 준 권총으로 독립전쟁에 나서라고 충고한 독립투사를 두 명이나 사살하고도 뉘우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국좌익은 홍범도를 영웅시한다. ​ 매국좌익도 우리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민족주의가 계급투쟁에 방해가 될까봐 매국우익의 역사왜곡에 동조한다..

역사 2023.02.08

김수로

1. 김수로의 이동과 건국 新을 건국한 흉노 세력은 新이 망하자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김알지는 대구에 계림국을 건국하였다가 서기 65년 탈해의 신라와 결합하고 김수로는 서기 42년 가야를 건국하였다.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삼국사』 「김유신열전」은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가 같은 성이라 하며, 『삼국유사』는 문무왕이 김수로왕도 자신의 15대 시조라며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한다.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新을 건국하였다가 新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는 함께 한반도로 도피하였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는 한반도로의 도피를 “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역사 2023.02.08

이세민(598-649)

김성규 "수말(隋末)·당(唐) 건국기의 정정(政情)과 이세민(李世民) 당 태종 이세민 연구." 건지인문학, 29.0 (2020): 5-26. 김성규 “唐의 군웅 제압에서 ‘玄武門의 變’ 발발까지에 대한 소묘: 당 태종 이세민 연구(2)”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제77집 2021.02 123 – 148(26 pages) ㅇ 실록 열람 및 개찬 - 이세민의 황위 계승은 형을 죽이고 또 부친 이연을 핍박해서 얻은 것이며 인륜에 반하는 사건이었다(626년 현무문의 변). 이를 최대의 오점으로 자각한 태종이 끝내 실록을 열람하고 역사를 개찬(639년에 실록 열람 시도 640년에 열람하고 조작). 그 결과 『고조실록』과 『태종실록』 등의 주요 기록에서 태종의 공로가 부각된 반면, 자신의 정적이 ..

역사 2023.02.07

장보고

ㅇ 국적: 당나라 사수 연수현 출신, 백제 유민 ㅇ 이정기 세력 (4대, 765-819) 공격 시, 친당 세력인 왕지흥의 소장으로 복무. 장보고는 이정기 토벌의 공로로 819년 등주 적산포 신라소의 초대 대사로 임명됨.  - 당나라는 번진(藩鎭)의 반란을 진압한 후, 819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국 동해안 백제의 유민들에게 과세할 목적으로 신라방·신라소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를 대사(大使)라 하였다. 당나라 기본법전인 대당육전(大唐六典)」에도 “무릇 모든 군진의 대사와 부사 이상은 모두 겸인(시종)을 거느린다(凡諸軍鎭大使副使皆有廉人)”고 되어 있으며 이들의 임기는 4년(四年一替)이었다. 즉 신라방·신라소는 당나라의 지방행정기구이고, 그 책임자인 대사는 당나라의 관리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역사 2023.02.07

광개토대왕릉비문 병신년조 기사 초입부의 올바른 해석 (소위 신묘년조 비문 해석) (전치문설은 개솔)

1. 일제가 본 광개토대왕릉 병신년조 문장의 초입부는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제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臣民(=신라)을 위하여, 영락 6년 丙申년부터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156-163쪽에 의해 入貢于가 渡海破로 변조되었다고 보았다. (날조된 글자의 글씨체가 다르고 글자의 위치도 다르다) - 계연수가 1898년 탁본한 내용을 토대로 이유립이 복원한 이유립본에 근거하여 聯侵으로 보았다. (윤창열, 「광개토태왕비문과 환단고기의 整合性..

역사 2023.02.06

광개토대왕릉비문 기해년 기사의 날조

광개토대왕릉비문은 기해년 문장도 날조되어 있는데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于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喜後) (稱)其忠□ □遣使還告以□計 [太王(喜後)의 喜는 김병기의 추측이고 後는 필자의 추측이다. 궤파성지의 경우 태왕이 기뻐한 것과 모순되므로 글자를 지웠을 것이다.] ‘潰于城池’가 ‘潰破城池’로 날조되어 있고,[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166쪽.] 喜後가 지워져 있다. 날조를 바로잡아 해석하면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내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순시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있다가 성지(城池)에서 도주하여, 신이(노객은 항복한 나..

역사 2023.02.05

「일본서기」의 일본은 열도백제이다. 야마토정권은 없었다.

「일본서기」에 倭나 大倭(大和)는 일본의 속국으로 기술되어 있고, 대왜가 야마토로 발음될 수도 없다. 예군 묘지명에서 일본은 백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일본은 백제이지 일본의 속국으로 기술된 大倭(大和)가 될 수 없다. 「일본서기」는 백제가 열도를 지방행정구역으로 지배하다가,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별칭인 ‘일본’으로 독립하면서 열도인을 다스릴 목적으로 가공의 역사를 기술한 책으로 용비어천가와 같은 문학서이다. 열도에 왜계의 야마토 정권이 성립한 적이 없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야마일(邪馬壹) 또는 야마대(邪馬臺)국은 가야계의 나라로 왜가 아니다. 일제유사사학은 일본이 한국이었음을 부정하기 위해 야마토왜라는 가공의 왕조를 창작하였다. 일제유사사학이 만든 일본고대사는 ..

역사 2023.02.04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고구려의 초기 수도

동천왕은 관구검에게 패하였는데,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에 의하면 관구검은 동천왕이 옥저로 도망가자 왕기를 시켜 추격하게 하였고, 추격군은 옥저를 지나 1,000여 리를 추격하여 관구검기공비를 세웠다. 그 관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조조의 위나라가 고구려를 통쾌하게 이긴 것을 기록한 것이므로, 크게 왜곡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부분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집안 서쪽 1,000여 리에 옥저가 있었고 그 서쪽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소위 강단사학계는 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에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이..

역사 2023.02.03

우리나라 역사학은 친일매국의 본부

일제 부역자들 승계 ​ 해방 후, 미국과 이승만은 각각 남한 내 확실한 반공정권 수립과 집권을 위해 일제 부역자와 협력하였다. 일제의 한국사 날조에 부역한 일제유사사학의 승계자들이 해방 후에도 학문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제에 대한 부역을 학문연구로 위장하였다. 날조를 실증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날조된 사실이 객관적 학문연구의 성과인 것처럼 왜곡하여 그들의 부역 사실을 은폐하였다. 날조된 사실이 학문연구의 대상이 되는 순간 부역자로서의 정체성이 공개되므로 그들은 어떠한 반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 객관적 연구는 투명인간의 투명논문인 것처럼 왕따시켰다. 최재석, 신용하, 김석형, 김성호 등의 연구에 무시로 일관하였다. 학문이 아니라 교리가 된 것이다. 날조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날조를 객관적인 학..

역사 2023.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