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광개토대왕릉비문 기해년 기사의 날조

역사회복 2023. 2. 5. 12:20

 

광개토대왕릉비문은 기해년 문장도 날조되어 있는데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于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喜後) (稱)其忠□ □遣使還告以□計

 

[太王(喜後)의 喜는 김병기의 추측이고 後는 필자의 추측이다. 궤파성지의 경우 태왕이 기뻐한 것과 모순되므로 글자를 지웠을 것이다.]

 

‘潰于城池’가 ‘潰破城池’로 날조되어 있고,[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166쪽.] 喜後가 지워져 있다. 날조를 바로잡아 해석하면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내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순시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있다가 성지(城池)에서 도주하여, 신이(노객은 항복한 나라의 왕 의미)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왕께 보고하여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기뻐한 후) 그 충성심을 (칭찬하고), 신라 사신을 돌려보내어 지시사항을 알리게 하였다.」이다. 

 

일제·중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은 날조된 글자를 수정하지 않고, 「永樂 9年(399) 己亥에 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倭人이 그 國境에 가득차 城池를 부수고 奴客으로 하여금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라고 해석한다.

 

이 해석은 문장이 되지 않고 앞뒤 문장이 연결되지 않는다. ‘奴客으로 하여금 倭의 民으로 삼으려 하니’는 말이 안 되는 문장이다. 구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고 命을 청하였는데, 강단유사사학은 命을 구원으로 날조하여 해석하고 있다. 구원을 청하는 것은 광개토대왕이 갸륵하게 여길 신라왕의 충성이 될 수도 없다. 광개토대왕이 계책을 알리는 것은 구원요청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없다. 

 

일제유사사학은 ‘潰于城池’를 ‘潰破城池’로 날조하여 왜의 항복을 신라를 깨뜨린 것으로 변조하였고, 그에 따라 광개토대왕이 기뻐한 것도 감추어야 하므로 太王(喜後)의 喜를 지웠을 것이다. 본고처럼 김병기가 수정한 문장으로 하고 결자를 喜後로 보완하여 해석해야, 광개토대왕이, 항복한 왜인을 백성으로 삼은 일을 보고한 내물왕의 충성심을 칭찬할 수 있고, 광개토대왕이 그 일에 대한 지시도 할 수 있다. 

 

기해년 날조에서도 이어지는 문장으로 인해 조작임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일제가 기해년 기사를 날조한 것은 399년에 포로가 된 영산강왜가 403년 이후 나라로 보내져 고구려계 국가의 지배를 받고 6세기 이후에는 백제의 지배를 받는 왜집단(일제유사사학에 의하면 야마토왜)임을 숨기기 위함이다. 

 

기해년 기사에서 침입한 것은 왜인데, 백제가 396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고 한 맹세를 어기고 왜를 사주했다는 것을 먼저 지적한다. 404년 기사는 요동반도 왜의 침입인데 백제와의 내통을 언급하고 있다. 백제가 왜의 신민이라면 왜의 침입 시 백제와의 내통이나 백제가 맹세를 어겼다는 사실을 도대체 언급할 수가 없다. 그것을 언급하면 말하는 사람만 바보된다. 내통이 있더라도 자기 부하에게 지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가 주인이고 왜가 종이기 때문에 종이 행동해도 주인인 백제가 미워, 백제가 사주한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