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은 관구검에게 패하였는데,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에 의하면 관구검은 동천왕이 옥저로 도망가자 왕기를 시켜 추격하게 하였고, 추격군은 옥저를 지나 1,000여 리를 추격하여 관구검기공비를 세웠다. 그 관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조조의 위나라가 고구려를 통쾌하게 이긴 것을 기록한 것이므로, 크게 왜곡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부분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집안 서쪽 1,000여 리에 옥저가 있었고 그 서쪽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소위 강단사학계는 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에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이라는 사서와, 관구검기공비를 무시하고 옥저의 위치와 고구려의 강역에 관해 소설을 쓰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오늘날 함경남도 함흥 일대는 동옥저, 두만강 하류 유역은 북옥저라 한다. 즉 옥저가 한반도 동해안 한 곳이라 한다. 그러나 『삼국지』와 『후한서』는 동옥저, 남·북옥저 셋을 기술하고, 『삼국지』는 동옥저는 좁지만 길이가 천리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이 말한 함흥과 두만강 하류를 하나로 합쳐도 1,000리가 되지 못하므로 강단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또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 모두 옥저를 지나(過) 또는 가로질러(絕) 천여리를 가서 숙신의 남계에 공을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이 말한 옥저를 지나거나 가로지르면 바다속으로 천여리를 가게 되고 숙신은 동해바다에 뗏목을 뛰워놓고 사는 집단이 된다. 또한, 관구검(무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관구검이 가로지른 옥저는 집안에서 서쪽으로 천여리에 있다는 것이 되어 강단유사사학의 날조는 산산히 부서져 버린다. 『삼국사』도 『삼국지』와 『후한서』처럼 세 옥저를 기술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조위군은 먼저 환도성을 점령하였다. 『양서』 『북사』 『삼국사』 동일하다, 동천왕이 옥저로 도망가자,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저조에 의하면 위군이 옥저를 침략하여 점령하고 동천왕은 다시 북옥저로 달아난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과 『양서』 『북사』에 의하면 관구검은 왕기를 시켜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추격하도록 하여 이들은 숙신의 남계(관구검기공비를 세운 집안)에 이른다. 『삼국사』에 의하면 왕기의 추격을 받은 동천왕은 남옥저로 도망갔는데, 계책이 다하였다고 하므로 동천왕이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는 신라와의 경계 고구려의 끝 바닷가까지 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기의 남옥저는 보정시 동쪽의 남옥저가 아니라 동옥저의 남쪽을 가리킨다. 왕기가 보낸 추격군도 『삼국지』 「위서 동이전」 동옥조조에 의하면 바닷가까지 와서 노인에게 바다 건너에 대해 물었다. 동천왕이 다 죽었다고 생각할 무렵 유유가 목숨을 바쳐 조위의 추격부대장을 죽이고 고구려군이 반격에 성공한다.
낙랑군 동부도위가 설치된 보정시 동쪽의 옥저는 남옥저이다. 남옥저는 동천왕이 조위와 싸워 도망갈 곳이 절대 아니다. 그곳은 조위가 238년 공손씨를 점령하면서 조위의 영토이거나 바닷가의 조그만 마을로 조위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고 환도성에서 남옥저로 간다는 것은 조위 영토를 거쳐 가는 것이므로 항복하려 하지 않는 한 갈 수 없는 곳이다. 환도성에서 동천왕이 동쪽으로 도망가면 칠로도산 동쪽 해안의 옥저로 도망갔어야 한다. 『삼국지』와 『후한서』는 그곳을 동옥저라 하나, 『삼국사』에 의하면 북옥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구려는 하북성 북부 홀본에서 건국하여 한반도 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삼국사』가 고구려가 서기전 28년에 북옥저를, 32년에 낙랑국을, 56년에 동옥저를 점령하였다 하므로, 북옥저는 『삼국지』와 『후한서』가 말하는 동옥저, 낙랑국은 평양, 동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의 옥저여야 영토 확장의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지』와 『후한서』가 남옥저와 북옥저의 거리가 800리라 하였는데 남옥저로부터 800리의 거리에 있는 것은 칠로도산 동쪽의 옥저이기 때문이다. 북옥저와 동옥저 사이는 직선거리로 2천리이다. 진수와 범엽이, 관구검이 고구려에서 탈취한 사료를 해석하면서 고구려의 지리를 몰라 북옥저와 동옥저를 혼동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북옥저가 동쪽 바닷가이므로 동옥저라 생각하였고, 남옥저와 북옥저가 어디인지는 모르고 둘 사이의 거리가 800리인 것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조위의 추격군이 한반도 동해안에 이르렀음에도 그곳이 옥저인 줄도 몰라 동옥저까지 갔다고 기록하지 않았다. 북옥저를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한다는데, 구루를 城으로 置를 역참으로 보면 치구루는 역(말)이 있는 성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는 영토가 넓어 중간 지역인 북옥저에는 역참이 반드시 있었어 한다. 북옥저는 길이가 오백리 정도 되므로, 『후한서』가 동옥저가 오백리라 한 것은 북옥저에 대한 언급이고, 『삼국지』가 동옥저가 천리라 한 것은 진실된 동옥저에 대한 언급으로 추측된다.
위 사서들에 의하면 조위군은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추격하였다. 따라서 지나간 옥저는 북옥저(중국 사서에 의하면 동옥저)이고, 천여리 간 곳이 관구검기공비를 세운 집안 판석령이다. 동천왕은 동옥저의 남쪽 끝까지 몰렸다가 유유의 충성으로 조위군을 쫓아낼 수 있었다. 동천왕이 해안가로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위군이 평양 쪽도 점령했기 때문이다. 조위군이 패하고 낙랑에서 후퇴했다고 하는 것은 평양이 낙랑이었기 때문이고 이는 보정시의 낙랑군과는 전혀 다른 곳이다. 그리고 환도성은 결코 집안이 될 수 없다. 환도성은 북옥저 서쪽에 있어야, 동천왕이 환도성으로부터 북옥저로 도망칠 수 있으므로 환도성은 하북성에 있을 수밖에 없다. 환도성은 북경 북쪽의 옥전현(玉田縣)에 있었던 성이다. 조위군이 환도성에 불내성이라 새긴 것은 이 당시의 사람들이 진수처럼 낙랑 동부도위가 있었던 곳을 착각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사』에 나타나는, 신라에 사신을 보낸 동옥저는 남옥저이다. 남옥저가 이웃 신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신라는 신라 동쪽에 있어 동옥저라 한 것이다. 신라는 마한도 서한이라 하여 자기 위치에서 본 방위를 붙이고 있다. 백제에 귀순한 구파해도 남옥저 사람이다.
『삼국사』는 고구려의 대패와 영토 끝까지 내몰린 동천왕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삼국사』 초기기록 불신론의 허구성을 동천왕 기사에서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모든 사서가 옥저가 세 개라 하며, 중국의 사서들이 하나같이 옥저를 지나 천여리를 와서 집안에 이르렀다고 해도 한반도 동해안에만 옥저가 있다고 사기를 친다. 환도성이 집안에 있었다는 주장은 중국의 사서들과 관구검기공비에 의하면 도저히 설명히 불가능함에도 입 닫고 아무 문제가 없는 척 어거지를 쓴다. 이러한 침묵을 그들은 묵언수행이라고 할지 모른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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