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지지』에 “백제국 서남 발해 중에 큰섬 15개가 있는데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이 거주한다. 백제에 속한다.”라고 요동반도백제가 기술되어 있다. 발해 중에 서남쪽에 큰 섬이 있는 곳은 요동반도밖에 없다. 『구당서』 『신당서』 『통전』 『삼국사기』에 백제 땅을 신라와 대진(소위 발해)이 나누어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요동반도가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소위 강단사학계는 요동지역으로 옮겨진 웅진도독부를 대진이 차지하여 『구당서』 『신당서』 『통전』 『삼국사기』가 헛소리를 하였다고 주장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괜히 백제와 무관한 곳에 웅진도독부를 옮겼다는 말이 더 헛소리일 것이다. 『괄지지』는 638년부터 642년까지 편찬된 책으로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위 『괄지지』의 기사를 인용한 장수절의 『사기정의』가 『사기』의 3가주석으로 인정 받는 권위 있는 사서이고 736년에 저작된 만큼 『사기정의』가 인용한 『괄지지』의 백제 영토 기사는 부인하기 거의 불가능한 자료이다. 소위 강단사학계는 8세기에 살았던 장수절이 백제가 존재하고 있었던 때 기록한 지리지를 인용한 것을 부인하는 놀라운 투혼을 발휘한다. 『괄지지』의 위 기사에 의해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차지한 영토가 대동강 원산만이라는 일제의 날조는 누가 보더라도 소설이 된다. 소위 강단사학계는 아직도 대동강 원산만 교시를 추종하고 있다.
1. 괄지지
【正義】括地志云:「百濟國西南渤海中有大島十五所,皆邑落有人居,屬百濟。」
2. 신당 전쟁의 전장
이 요동반도백제가 신라와 당의 주 격전지가 된다. 『삼국사』는 무조(무측천)가 의자왕의 증손인 경(敬)으로 하여금 백제의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발해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어서 그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있다고 기록한다. 백제의 영역 중 신라와 발해에 의해 분할될 수 있는 곳은 요동반도 백제밖에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요동지역으로 옮겨진 웅진도독부를 대진이 차지하여 이러한 표현이 나왔다고 비학문성을 드높이는 소리를 낸다. 웅진도독부가 옮겨진 곳은 그곳이 백제였기 때문이다. 백제와 무관한 곳에 웅진도독부를 옮겼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러한 곳을 차지한 것을 백제 영토를 나누어가진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조상의 강역을 줄여 중국에 충성하려는 강단유사사학의 무한한 노력에 우리는 경의를 보내야 한다.
한반도백제에서 웅진도독부인지 웅진부성(府城)인지 하는 당나라조직은 665년에 사라졌다. 한반도백제 내의 백제 부흥세력은 663년 임존성의 항복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665년 부여융과 문무왕의 회맹은 당의 희망사항으로 신라에겐 무의미했다. 665년에 유인원과 부여융이 당으로 돌아갔고, 671년 문무왕이 설인귀에 보낸 답서에서, 문무왕이 한반도백제에 왔던 당군 1만명이 4년 동안 신라에서 입고 먹어서 병사들의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665년 당시에는 당군도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실제는 신라가 한반도백제를 완전히 병합했다. 신라와 당은 한반도백제는 신라가, 대륙에 있던 백제는 당이 차지하기로 협의했을 것이다. 그들의 최종 목표인 고구려가 남아있기 때문에 한반도백제를 가지고 당이 다툴 상황은 아니었다. 따라서 백제와 당군이 다시 등장하고 그 부근으로 보이는 평양(지금의 요양) 일대에서 신라와 당이 전쟁을 하는 670년 이후 기사의 백제는 요동반도백제이다.
한반도에서 쫓겨난 당조직(웅진도독부)이 요동반도백제로 신라보다 먼저 와서 백제를 장악하였다. 요동반도백제는 세력이 미약하였고 이미 본토인 한반도백제가 신라에게 합병되고 중국 동해안백제는 당에 의해 약화된 상태여서 먼저 들어온 당이 쉽게 장악할 수 있었다. 당은 고구려 공격 전 667년이나 668년 신라에게 평양(지금의 요양)이남 고구려와 요동반도백제를 주기로 약속했다. 즉 이세민(당태종)의 평양이남과 백제 발언을 재확인했다. 이는 671년 문무왕의 답서에 나타난, 3∼4년 사이에 줬다 뺏었다 한다는 말과, 이세민이 했다는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平壤) 이남과 백제 땅은 나란히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백제 영토 중에 평양 이북인 땅은 없으므로 ‘平壤已南百濟土地’는 平壤已南 고구려와 百濟의 土地로 해석해야 한다. 당은 한반도백제는 신라에 주려고 664년이나 665년 당군을 철수시켰다. 당에겐 백제보다 고구려가 문제였고, 만약 한반도백제를 신라에 주지 않으면 고구려 침공에 신라를 이용할 기반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고구려 침공 시 신라를 활용하기 위해 당은 평양이남 고구려와 그 때까지 어느 세력권에도 속해 있지 않은 요동반도백제를 주기로 한 약속을 재확인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위 기사의 백제도 한반도백제라 하는데, 664년에 신라가 완전히 장악한 지역이 왜 다시 전투를 치러야만 점령할 정도로 신라의 세력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당전쟁 후 신라의 영역은 대동강 원산만 선 아래에 있었다는 일제 참모본부의 교시를 지키기 위해 억지쓰기라는 가공할 무기로 그저 헌신할 뿐이다.
3. 요동반도는 대진(발해)과 신라가 나누어 가짐
강단유사사학은 백제 땅을 다는 아니고 많이 취득하였다는 『삼국사』 기사 ‘然多取百濟地, 遂扺髙句麗南境爲州郡(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지역까지 받아 주군으로 삼았다)’를 역시나 날조 해석한다. 신라와 대진이 백제를 나누어가졌다는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의 기록이 ‘然多取百濟地’(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취하였다. 다 취한 것이 아니다)와 일치하므로 신라가 백제를 다 차지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구당서』 권 제220 신라전 “然多取百濟地 遂扺高句麗南境矣.”과 『당회요(唐會要)』 권제95 신라전 “旣盡有百濟之地 及高句麗南境”를 열거한 후 『당회요』의 문언에 따라 “이미 백제의 땅을 모두 차지하고 고려(고구려)의 남쪽 경역에 이르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삼국사』와 『구당서』가 ‘多取百濟地’라 하고, 『삼국사』 『구당서』 『신당서』 모두 ‘그 땅을 신라와 대진이 나누어가졌다(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고 하여, 『당회요』를 제외한 모든 사서가 일치하여 백제 땅을 신라가 전부 차지하지 못하였다고 거듭 언급하고 있다. 『통전』은 이를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면서 ‘땅이 신라로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토지가 신라와 말갈에 편입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요동반도 대부분이 신라에 편입되었으므로 표현상은 상이한 두 표현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당회요』가 신라가 백제 땅을 다 차지하였다는 것은 ‘거의 다’를 간단히 ‘다’라고 쓴 것에 불과하다. 강단유사사학은 어떻게든 요동반도백제를 부인하여 일제·중제유사사학에 충성하기 위해 초탈문헌주의에 기반하여, 명백한 것을 비틀려는 가련한 울부짖음을 내던지고 있다.
4. 여진은 신라와 고려의 지방주민
신라는 요동반도를 차지하고, 요양(고구려 평야) 부근까지 차지하였다. 신라는 이전의 고구려 남쪽 영토 내에 3주를 설치하였는데, 서쪽 제일 첫 번째를 한주(漢州), 그 다음 동쪽을 삭주(朔州), 그 다음 동쪽을 명주(溟州)라고 하였다. 따라서 요동반도 지역은 신라의 한주가 된다. 강단유사사학의 대동강 원산만 설에 의하면 한주 삭주 명주는 땅이 없게 된다. 이미 진흥왕이 서쪽으로는 한강 이북에서 최소 예성강선까지 영토로 하였고, 동쪽으로는 원산만을 훨씬 넘어 황초령비 마운령비가 있는 곳까지 영토로 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족 여진집단인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인 또는 고려인이라는 사실은 신라 고려의 영토 내에 여진집단의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집단은 신라와 고려의 주민이었다. 신라 말 여진집단으로 간 신라왕족은 남의 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고려 중앙권력의 힘이 약한 신라 즉 고려의 변방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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