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서(隋書)』는 고구려에 평양성 國內城 漢城의 세 도회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평양에서 漢城이라 기록된 고구려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시대 때 서경이라 하였다.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면서 안북대도호부에 이르러 다른 부대와 합류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안북대도호부가 지금의 안주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따라 고려의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간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란군이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즉 지금의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볼 수는 없고 구구려의 평양은 최소한 안주 북쪽에 있었고, 현재의 평양은 각자성석이 밝히는 바와 같이 고구려의 漢城이라고 보아야 한다. 소위 강단사학계는 서울 강북이 고구려의 한성이라 하는데, 강북은 주로 백제의 영토였고, 고구려가 점령한 시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국경이 도회지가 되기는 어려우며, 각자성석이라는 명백한 증거에 반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근거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1. 평양에서 출토된 각자성석(刻字城石)
지금의 평양에서 출토된 각자성석(刻字城石)에 漢城이라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한성(남평양)은 지금의 평양임을 알 수 있다. 기경량의 각자성석 판독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판독: 丙戌二月中 漢城下後卩 小兄文達節 自此西北行[徏]之
∙해석: 병술년 2월 중에 한성에 있는 후부의 小兄 文達이 통제하여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오른]다.
2.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나타난 고려의 서경
김부식이 삼국사를 쓸 때 고려의 서경은 지금의 요양이다. 김부식이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ㄱ) 『고려사』 「김부식 열전」
〈김부식이〉 드디어 병사를 이끌고 평주(平州)를 경유하여 관산역(管山驛)에 당도하였으며 좌군(左軍)과 우군(右軍)이 모두 모이자 나란히 차례대로 행군하였다. 김부식(金富軾)은 사암역(射岩驛)과 신성부곡(新城部曲)을 거쳐 지름길로 성주(成州)에 도착하였고, 하루 동안 병사를 쉬게 하면서 여러 성에 급히 격문을 보내어 명을 받들어 적을 토벌한다는 뜻을 알렸다. 군리(軍吏) 노인해(盧仁諧)를 보내어 서경(西京)을 타이르게 하고 또 성 안의 허실을 엿보게 하였다. 모든 군사를 이끌고 연주(漣州)로 길을 잡아 안북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에 이르니 진숙(陳淑)과 이주연(李周衍) 등이 동계(東界)로부터 와서 모였다. 이보다 앞서 녹사(錄事) 김자호(金子浩) 등을 보내어 칙서(勅書)를 가지고 샛길로 다니면서 양계(兩界)의 성(城)과 진(鎭)을 돌면서 서경 사람들이 모반한 상황을 알렸는데, 인심(人心)은 오히려 형세를 관망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대군이 이르니 여러 성들이 떨고 두려워하며 나와서 관군을 맞이하였다.
(ㄴ) 『고려사절요』 인종 13년 1월 21일(음)
을축. 중군(中軍)이 군사를 인솔하고 평주를 거쳐 관산역(管山驛)으로 향하고 좌우군(左右軍)이 모두 서로 차례로 갔다. 중군이 사암역(射嵓驛) 신성부곡(新城部曲)을 경유하여 지름길로 성주(成州)에 이르러 하루 동안 군사를 쉬게 하고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馳檄] 적을 토벌하겠다는 뜻을 담은 말로써 깨우쳤다. (중략) 김부식이 군리(軍吏) 노인해(盧仁諧)로 하여금 서경을 초유(招諭)하도록 하고 또 성 안의 허실(虛實)을 엿보게 하여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연주(漣州)로 길을 잡아 안북부(安北府)에 이르니 진숙(陳淑)과 이주연(李周衍) 등이 동계(東界)로부터 와서 합세하였다. 〈이보다〉 앞서 녹사(錄事) 김자호(金子浩) 등을 보내 칙서를 품고 사잇길로 가서 양계(兩界)의 성과 진을 경유하며 서경의 반란군[西賊]이 반역을 일으킨 상황을 알렸는데[告諭] 인심은 오히려 관망하고 있다가 대군이 비로소 이르게 됨에 미쳐서는 여러 성이 두려워하고 떨며 관군을 맞이하였다.
(ㄷ) 『고려사』 「김부식 열전」
조광(趙匡) 등은 윤첨(尹瞻) 등이 하옥되었다는 일을 듣고서 반드시 〈처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여겨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중략) 김부식(金富軾)이 서경(西京)은 북으로는 산과 언덕을 등지고 삼면은 물로 막혔으며, 성이 또 높고 험하여 서둘러 함락하기는 쉽지 않으므로 성을 둘러싸고 진영을 펼쳐서 그들을 압박해야 한다고 여겼다.
안북대도호부는 요양을 공격하기 위해 진을 친 곳이므로 요양에서 가까운 곳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안북대도호부가 영주(寧州)이고 영주는 지금의 안주라고 한다. 강단유사사학의 말대로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간 것이 된다. 병력이 집중된 양계의 성주들이 형세를 관망할 정도이면 반란군도 상당한 규모이고, 고려정부도 동원 가능한 군대를 다 동원하였을 것이다. 동원된 군대가 대규모인 것을 보고 양계의 성주들이 김부식을 맞이하였다면 반란군을 제외한 고려의 모든 병력의 지휘권이 안북대도호부에 모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서경이 평양이라면 반란군은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김부식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런 상황을 만들 리가 없다. 김부식은 평양성 토벌에 1년이 넘게 걸릴 정도로 신중하였는데 토벌 대상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갈 리가 없다. 반란군은 평양성만 점거하고 있는데 왜 70km 북쪽으로 가야 하는가? 만약 평양 북쪽의 성도 반란군의 수중에 있었다면 평양성의 반란군이 개경을 점령하는 것은 더욱 더 쉬워진다. 고려의 서경이 지금의 평양이라는 주장은 고려는 지금의 압록강을 넘지 못했다는 일제의 교시를 떠받들기 위한 충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갸륵한 조작일 뿐이다.
서경이라는 것은 국토의 서쪽 중심지라는 것이므로 강단유사사학처럼 고려가 압록강 이남에 있었다면 평양은 북경은 될 수 있어도 서경은 될 수 없다. 신라와 당간의 전쟁은 지금의 요하와 태자하를 연결하는 선 부근에서의 전쟁이고, 이 전쟁에서 신라가 이겨 신라는 평양(지금의 요양) 이남의 고구려와 요동반도백제를 그 강역으로 만들었다. 신라를 계승한 고려의 강역에 요양도 당연히 포함되었고 고려는 북진정책을 위해 요양을 중시하여 서경으로 삼았으므로 현재의 평양은 서경이 될 수 없다.
['한 상고사'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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