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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의 위치, 예(왜)군 남려

북부 번조선은 제와 제장성을 경계로 산동반도와 韓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산동반도 지역에 원절식 돈칼만 나타나므로 제에게 산동반도 지역을 빼앗긴 것으로 추측된다. ​ 황하 동쪽이고, 제수와 대야택 북쪽은 번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최후까지 지킨 韓 지역이다. 세력이 약해진 번조선은 요동고새 북쪽의 「한혁」편의 한후국과 결합하여 진번조선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연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열전」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築鄣塞 (전 연의 시기에 진정 처음으로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킴을 경험하였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 ​ 중국 동해안의 번조선 중 이 지역이 최후까지 남았고, 왕을 한(칸)이라 하였으므로 중국인들도 이..

역사 2023.02.11

왕망전(新錢)이 증명하는 김일제 후손의 이주 [가야와 계림국]

​ 강단유사사학은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일제유사사학의 교시를 좇아, 김수로와 허황옥을 부정하고, 서기 42년 고대국가로서의 가야 건국도 부정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신편한국사 7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2. 가야사의 범위 > 3) 가야사의 시기 구분 (2022.10.9. 현재) ​ “전기 가야사는 1∼4세기 동안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한 경남해안 및 낙동강 유역의 변진 12국의 역사를 말한다. 이 시대를 세분하면, 철기를 수반하는 토광목관묘 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경까지를 가야문화 기반 형성 시기로 볼 수 있고, 토광목곽묘 문화가 형성되는 기원후 2세기대를 加耶 諸國 성립 시기..

역사 2023.02.10

현재의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는 나라를 말아먹는다.[창녕 ∉ 가야]

창녕은 가야가 아니다. 지난 정부 강단유사사학은 우리 역사를 조선총독부가 창작한 역사로 팔아먹으면서 그것을 세계적으로 공인 받기 위해 거짓 세계유산등재를 시작하였고, 현정부에서도 이를 계승하여 올해 조선총독부 소설이 세계적으로 공인 받을 위기에 처해 있다.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자신의 조상이 가공의 야마토왜 식민지 사람이 될 위기에 있다. 조선총독부 간첩으로 의심되는 대학교수 강단유사사학은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다 거짓말이지만 가장 뻔뻔한 거짓말은 창녕이 가야라는 것이다. 1. 창녕은 낙동강 동쪽이므로 가야가 될 수 없다. 2. 창녕에서는 신라 유물이 나오고 가야 유물이 나오지 않는다. 3. 『삼국사기』는 명백히 가야의 비사벌과 신라의 비사벌을 구분하고 있다 가야 ..

역사 2023.02.10

재야 난하 갈석산설의 폐해

1. 난하 갈석산설의 무근거성 ​ 난하 갈석산설은 역사날조 총책 담기양이 제조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다. 윤내현이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는 근거는 요수가 난하라는 것과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다. 윤내현, 「한사군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 『한국학보, 11.4』, 1985. 7-9쪽. ​ 윤내현은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나, 이는 요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실질상 윤내현은 난하가 요수라는 단 하나의 근거로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하가 요수였던 적은 없다. 윤내현은 『여씨춘추』 「유시람」 고유 주석을 근거로 난하가 요수라 하나, 윤내현, 『한국고대사 신론』, 일지사, 1993. 43-44쪽. 본고에서는 고유가 말하는 요수가 중역수..

역사 2023.02.10

갈석산 위치의 명명백백한 증거: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 ​ ​ 지도의 바다에 쓰여 있는 문구가 다음과 같다. ​ -------------------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 而後西向以上大河 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 而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 則碣石在右 故曰夾右碣石 ​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바치려면, 고수 역수 탁수 요수로부터 바다로 간 후, 서쪽으로 대하를 올라가서 멀리 기주의 도읍지에 도달한다. 이 때 구하(황하)가 바다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어, 갈석을 의지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 ​ 다른 많은 사료도 황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기주협우갈석도는 시각적으로 명..

역사 2023.02.10

한사군의 날조성

사마천은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만든 4군에 대해선 그가 살아있을 때의 일임에도 군명을 열거하지 않았다. 『사기』 「조선열전」 以故遂定朝鮮為四郡 ​ 설치하자마자 폐지된 서류상의 군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漢은 요동외요를 포기하고 요동고새로 후퇴하였으므로 진개가 만든 5군중 요동고새 바로 북쪽의 어양과 우북평만 유지하였다. ​ 예맥조선을 침략한 후에는 진개가 만든 국경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새로 영토가 늘어난 부분은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이다. 진개의 요서군을 요서군과 현도군으로 나누었으므로 진개 때보다 영토가 증가한 것은 없다. 임둔군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다 일부 실효지배하던 곳은 낙랑군에 편입시켰다. 진번과 현도도 서류상 존재하다 실효지배하는 북경 북쪽에 현도군을 두었다. 낙랑군은 원래 漢의 영역이었다...

역사 2023.02.09

낙랑군 위치와 낙랑군 위치 왜곡의 과정,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

​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는 다르다. https://taxecolaw.tistory.com/72 ​ 낙랑군 왜곡의 과정 ​ 강단·일제·중제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의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전제부터 근거없는 날조임이 드러난다. 더 이상 그들의 날조를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날조의 골이 깊어 날조의 과정을 더 살펴본다. ​ 진수(233년-297년)는 낙랑과 대방, 환도성의 위치를 알았다. 조위의 공손씨 정벌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이 그의 생존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방군에서 왜의 북쪽 대안이라고 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 표시하고 있고, 그 경로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시하고 있다. ​ --------------------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

역사 2023.02.09

소련은 왜 자유시학살을 자행하였는가?

윤상원은 슈먀츠키가 독립군을 일본과 싸우도록 보내기 위해서 통합하려 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7-248. ---------------------- 극동비서부의 전권위원 슈먀츠키는 일본과의 관계로 인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극동공화국과는 달리 “세계혁명의 총참모부”로 자처하는 코민테른의 대표였기 때문에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까지 2천여 베르스타(약 2000km)의 장정을 위해서 중국영토를 통과하는 한인들의 행군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시베리아에서 한인 무장부대통합 준비기관으로 극동비서부에 의해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

역사 2023.02.09

자유시 학살의 성격

[소련과 날조좌파가 소련의 독립군 학살을 독립군 내분으로 날조] ​ 윤상원은 자유시사변은 무장부대 통합운동의 과정에서 군통수권을 둘러싼 내부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윤상원. "만들어진 ‘신화’." 한국사학보. 51 (2013): 316. ​ 그러나 한 쪽은 독립군이 아닌 소련군이므로 내부 대립이라 할 수 없다. 자유시학살은 독자적 작전권을 유지하려는 독립군을 소련군이 탄압하고 학살하여 소련군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 박일리야 등 독립군 측은 극동공화국 대통령인 크라스노쇼코프의 적극적 지원으로 1921년 1월 20일 “인민혁명군 안에 있는 모든 한인부대를 즉시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로 재조직”하라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헤의 명령을 이끌어냈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

역사 2023.02.09

레닌자금의 귀속자는 누구인가? 김구의 김립 처단은 테러인가 처벌인가?

레닌자금의 귀속자 (반병률의 날조) ​ 반병률은 “당초 소련정부가 차관을 약속했을 때, 자금은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고 그 자금활용의 책임은 한인사회당이 참여하고 있던 임시정부였다”라고 기술하여 레닌 자금의 수혜자는 임시정부라 명시하고 있다.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2집, (2005): 93. ​ 자금을 받아 낸 한형권은 1920.1.22. 국무회의의 선정에 따라 임시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갔고, 반병률, 위 글, 82. 소련과의 교섭과정에서 그의 자격이 한인사회당의 대표로 변경된 적도 없다. 따라서 그가 당초라는 단서를 달아 추후에 뭔가 다른 변경사항이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수혜자에 관한 변경사항은 없었고 반병률 자신도 변경사항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 2023.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