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자유시 학살의 성격

역사회복 2023. 2. 9. 14:45
 
 

[소련과 날조좌파가 소련의 독립군 학살을 독립군 내분으로 날조]

윤상원은 자유시사변은 무장부대 통합운동의 과정에서 군통수권을 둘러싼 내부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윤상원. "만들어진 ‘신화’." 한국사학보. 51 (2013): 316.

그러나 한 쪽은 독립군이 아닌 소련군이므로 내부 대립이라 할 수 없다. 자유시학살은 독자적 작전권을 유지하려는 독립군을 소련군이 탄압하고 학살하여 소련군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박일리야 등 독립군 측은 극동공화국 대통령인 크라스노쇼코프의 적극적 지원으로 1921년 1월 20일 “인민혁명군 안에 있는 모든 한인부대를 즉시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로 재조직”하라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헤의 명령을 이끌어냈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3. 윤상원은 1920년으로 기술하였으나, 이는 1921년을 잘 못 쓴 것이다. 그가 인용하는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명령 37호는 1921.1.20.의 것이라 윤상원의 주에 기재되어 있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헤의 서명이 들어있는 이 명령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178.

1. 인민혁명군 내에 있는 모든 한인부대는 즉시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로 재조직할 것.

2.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는 체르니고프스꼬예-끄라스노야로보와 마자노보 지역에 집결할 것.

3. 부대장은 박창은으로 임명함.

4. 참모장은 그리고리예프로 임명함.

5. 김동지는 박창은이 도착하면 부대를 넘기고 박창은의 지휘를 받을 것. 부대 이월과 접수에 대해 보고할 것.

6. 부대장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종속될 것.

이 명령서에 의하면 독립군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직속이고 한국인이 지휘권을 갖는 특별조직인 빨치산부대(비정규군)이다. 이에 근거하여 독립군 측은 1921년 3월 중순경 전한의병대회를 소집하여 전한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전한군사위원회의 지휘 아래 마자노프로 이동하였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4-245.

 

그런데 1921년 1월 15일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국이 슈먀츠키를 극동주재 코민테른 대표자로 임명하여 그에게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 동양민족부의 재편을 위임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에 따라 이르쿠츠크에 ‘극동의 모든 공산주의사업과 일반적인 혁명사업을 조정하는 기관’으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조직되어,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조선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윤상원. 위 글, 247-248.

극동비서부 전권위원 슈먀츠키는 3월 중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그 위원장으로 러시아 빨치산운동의 영웅인 칼란다리쉬빌리를 파견하였고,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총사령관은 칼란다리쉬빌리, 부사령관은 오하묵으로 하고, 소련의 5군단 산하 카프카즈 기병 600여명과 합동민족연대 내 한인부대 600여명을 부속시켰다. 윤상원, 위 글, 248.

6월 6일 칼란다리쉬빌리가 카자크 기병 120명을 이끌고 자유시에 도착하여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성립되었다. 윤상원, 위 글, 249.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 197쪽에서 이르쿠츠크파가 “극동비서부를 통해 高麗革命軍政議會를 조직하고 이를 중심으로 통합을 이룰 것을 결정했다.”라고 기술하여 마치 슈마츠키나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의 꼭두각시인 것처럼 말하지만 이는 내분으로 조작하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독립군을 소련군으로 편제하는데 한인의 지지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이르쿠츠크파를 이용한 것이 진실이다.]

 

고려혁명군정의회 산하 한인은 자유대대 200명과 합동민족연대 내 한인부대 600여명이다. 자유대대는 1920년 3월 아무르주한인대회의 결의로 조직된 빨치산부대가 大韓國民議會의 주선으로 1920년 7월 말 제2군단 소속 特立韓人步兵大隊로 재편된 부대이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172.

소련 국적의 오하묵은 제2군단 제6연대장으로서 흑하지방 수비대장위수사령관 서리로 있다가 자유대대가 극동국 제2군단 소속으로 재편 시 대대장으로 전보되었다. 반병률. “(1920년대 전반) 만주 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51.

윤상원은 위 글 197쪽에서 오하묵이 자유대대의 지도자라고 날조한다. 오하묵은 자유대대로 발령 받은 소련군 장교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라 자유대대를 지휘하는 사람이지 지도자라 할 수는 없다. 그는 오하묵이 소련군의 전보명령에 의해 자유대대장으로 발령받은 사실을 숨기고, 지도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자유대대가 소련의 정규군이 아니라 독립군인 것처럼 날조한다. 이는 독립군간 내부의 대립이라는 날조를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1920년 러시아인민혁명군 5군 사령관의 주도로 국제연대가 조직되었는데 국제연대의 일부로 한인공산대대도 조직되었다. 윤상원, 위 글, 173.

합동민족연대(合同民族聯隊)로 불린 이 부대는 1920년 1월 이르쿠츠크에서 11개 민족으로 구성되었고, 한인도 35명 가담하였다. 1920년 이르쿠츠크에서 적군이 승리하며 이르쿠츠크를 완전히 점령하게 되면서 사단 규모로 편성된 합동민족연대는 1920년 2월 해체되었는데, 한국과 중국 혁명에 복무할 목적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으로 구성된 합동민족대대는 재조직되었다. 세계한민족 문화대전 (http://www.okpedia.kr) ‘합동민족연대’ 설명

 

적군 제5군단은 이르쿠츠크 주변의 한인 소부대들을 집결시키고, 옴스크의 사관학교(러시아 공산당내 고려부 주동자가 설립한 사관학교) 졸업생 81명과 크라스노야르스크의 한인부대 40여명을 고려특립 중대에 통합함으로써 6백여명의 고려 특립대대를 만들었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37. https://blog.naver.com/hwachan20/222427463127에서 재인용.

대장은 소련 국적자인 최길래였다.

 

두 세력의 대립은 크라노쇼코프와 슈먀츠키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다. 독립군은 크라노쇼코프의 지지 아래 독자적 항일투쟁을 전개하려 했고, 슈먀츠키는 한인들을 자신이 정치위원으로 있는 적군 제5군 산하로 편입하려 했다. 오세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1919~19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1호. (2020): 153.

 

따라서 대립이 있다면 크라노쇼코프와 슈먀츠키의 대립이 본질이고, 크라노쇼코프가 독립군의 독자적 작전권에 우호적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독립군과 슈먀츠키 즉 독립군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간의 대립이다. 오하묵이 독립군의 전한군사위원회에 반발한 것은 그가 소련인으로서 한국의 독립투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립에 관심이 있다면 독립군의 독자적 작전권 확보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소련군 장교로서 소련군에 남아 출세하는 것을 원했지 빨치산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하묵은 소련군 하급장교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군인일 뿐이지, 독자적 작전권 확보를 위해 움직이는 독립군의 상대방이 될 수 없다. 독립군을 탄압하고 학살한 주체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이고 그 명령을 받아 수행한 자는 칼란다리쉬빌리이다. 오하묵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오하묵이 아닌 다른 소련군 장교가 있었어도 어떤 차이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박일리아와 오하묵간의 대립으로 자유시학살이 생겼다는 주장은 날조이다.

 

독립군을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사용된 무력을 보면 너무 명확하다. 독립군에 대한 공격은 칼란다리쉬빌리의 요청에 따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2군에 의해 계통적으로 이루어졌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212.

윤상원의 박사논문에 나타난 공격과정은 다음과 같다. 윤상원, 위 글, 21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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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사할린부대 지휘관들은 자신들에게 다시 3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해왔다. 그러나 29연대 사령부는 더 이상 작전의 실행을 미룰 수가없었다. 연대는 수라세프까 평원으로 돌격했다. 기병대는 보츠까료바로부터 후방으로 돌진했으며, 기갑부대는 교량에서 포격을 실시했다. 동시에 보병이 투입되었다. 장갑차의 출현에 놀란 박 그리고리 등은 무장을 넘겨주는데 동의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인부대의 전권위원으로 선출된 이들은 다시 회의할 시간을 요구했다. 2시 20분 29연대 병력 1000명과 고려혁명군정의회에 속한 한인 병사 300명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29연대 사령관 말라호프의 지휘 아래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 개시와 동시에 장갑차 부대가 움직였다. 2시 30분 사할린부대측으로부터 응사가 있었다. 29연대와 고려혁명군정의회 병사들은 기관총과 대포를 쏘며 공격했다. 30분만인 오후 3시쯤 전선은 평정되었다. 3시 50분 29연대는 반항하는 병사들을 진압하고 수라세프까 들판으로 진입했다. 장갑차를 앞세운 기갑부대는 수라세프까역에 도착했다. 결국 4시 수라세프까 들판의 한인들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일부는 무기를 버리고 제방쪽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5시 15분 수라세프까 들판의 한인들은 무장해제되어 포로로 생포되었다. 제방쪽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저녁 8시 17분 전투는 거의 정리되었다.

8시 10분 쉬사노프까역으로부터 제2기갑부대가 도착했다. 세 곳에 한인들이 남아 있었다. 공동묘지와 섬에 일부가 남아 있었고 2개 중대 병력은 보르다고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 중 섬에 있던 병력 약 300명은 포위되어 항복했다. 여기에는 安武의 국민회군대가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회 군대 부대원이었던 김희영은 “自由市에서 우리 동지는 死亡者가 無하다”라고 하여 피해가 없었음을 진술했다. 이들은 체포되었으나 다음날 모두 석방되었다.

공동묘지에는 사령부와 약 300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백병전 끝에 포로로 잡혔고 그 중에는 박 그리고리가 있었다. 무장충돌 과정에서 실제로 피해를 입은 병력은 바로 공동묘지 부근에 있던 그룹과 보르다고 방향으로 도망한 병력으로 생각된다. 공동묘지 부근에 있던 병력은 백병전 끝에 포로로 생포되었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해가 진 뒤 벌어진 최후의 돌격전에서 4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는 기록은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르다고 방향으로 도망한 그룹은 제야강에 빠져 익사했거나, 도망했거나, 행방불명이 된 병력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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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병, 장갑차, 기병 등이 동원되었다. 기갑부대는 두 부대나 왔다. 이는 오하묵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다.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다. 오하묵 휘하 병력 늘리기 위해 소련 제2군단이 동원된다는 것은 웃기지도 않는 소리이다. 날조집단은 소련에 충성하기 위해 소련이 만든 헛소리를 앵무새 이상으로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