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동성왕, 백제의 최전성기

역사회복 2023. 2. 9. 05:56
 
 

동성왕 479-501 재위

1. 즉위 시의 상황

ㅇ 고구려는 475년 9월 개로왕을 살해하였다.

ㅇ 해구가 477년 동성왕의 아버지 곤지(개로왕의 동생)와 문주왕 살해

ㅇ 해구가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13세)을 즉위시키고 전횡

ㅇ 479년 11월 즉위 (혼란기에 정치력과 무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라 추정)

2. 고구려에 복수하고 고구려 영토 획득

ㅇ 개로왕은 서도 한성에서 전사, 문주왕은 한반도 웅진으로 천도

ㅇ 480년이나 481년부터 482년이나 483년까지 고구려와 전쟁

- 광개토대왕에게 뺏긴 한백제 북부 회복하고 고구려의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 탈취

- 당시 고구려 낙랑태수였던 동수 481년 전사

- 당시 장수왕이 90 정도의 고령이어서 고구려 대응이 허술했을 가능성. 이를 이용한 동성왕의 작전이 좋아서 백제가 이겼을 것임.

3. 위와 3차례 전쟁에서 승리

(ㄱ) 484년 패배

- 『건강실록』: 영명 2년(484년) 북위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변도(弁都)를 크게 깨트렸다. 『建康實錄』 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 百濟王弁都

 

- 『태평환우기』: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했다. 『太平寰宇記』 卷一百七十二 宋-樂臾撰 後魏孝文帝 遣衆征破之

- 『통전』: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정벌했다 『通典』 邊防一 東夷上 百濟, 後魏孝文遣衆征破之

(ㄴ) 488년 대승

- 『삼국사』: 동성왕 10년에 위(魏)가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三國史』 「百濟本紀」 東城王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 『자치통감』: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資治通鑑』 卷一百三十六 齊紀二 世祖武皇帝上之下 (永明六年(488) 十二月)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 『남제서』: 삭제된 324자 대부분이 위나라의 치욕적 패배를 기록한 부분이다.

※ 『남제서』를 쓴 소자현은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의 손자 즉 남제는 소자현 할아버지의 나라이다. 『남제서』는 위를 위로(魏虜)라 하여 오랑캐로 간주하고, 『남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조에서 위가 중국 왕조인 남제와 오랑캐인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南齊書』 「東南夷列傳」 高句麗 永明七年(489), 平南參軍顔幼明·冗從僕射劉思斅使虜. 虜元會, 與高麗使相次. 幼明謂僞主客郞裴叔令曰: 「我等銜命上華, 來造卿國. 所爲抗敵, 在乎一魏. 自餘外夷, 理不得望我鑣塵. 況東夷小貊, 臣屬朝廷, 今日乃敢與我躡踵.」 思斅謂僞南部尙書李思沖曰: 「我聖朝處魏使, 未嘗與小國列, 卿亦應知.」 思沖曰: 「實如此. 但主副不得升殿耳. 此閒坐起甚高, 足以相報.」 思斅曰: 「李道固昔使, 正以衣冠致隔耳. 魏國必纓冕而至, 豈容見黜.」 幼明又謂虜主曰: 「二國相亞, 唯齊與魏. 邊境小狄, 敢躡臣蹤.」

백제가, 남제를 소자현이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고구려와 동일하게 취급한 위를, 격퇴한 것은 소자현에게 유쾌한 사건이었다. 소자현에게 백제와 위의 전쟁은 춘추필법이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었고 오히려 신나는 사건이었으므로 자세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중원을 차지했던 위가 백제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는 기록을 본 후세의 중국인들이 이 부분을 삭제했다. 중국인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한적전자문헌자료고는 『남제서』 「동이열전」 백제조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있다. (http://hanchi.ihp.sinica.edu.tw. 2022.3.17. 현재)

 

- 백제는 488년 위에게 대승을 한 후 489년 10월 천지에 제사를 지내고 잔치

(ㄷ) 490년 승리

- 『남제서』: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賛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南齊書』 「東南夷列傳」 百濟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 『남제서』: 建武 2년(495년)에 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庚午年에는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후략)” 『南齊書』 「東南夷列傳」 百濟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강단유사사학은 백위전쟁의 실체가 중국 사서에 의해 분명함에도 백위전쟁이 아닌 고백전쟁이라고 함.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위 격퇴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3.20. 현재)

북위[魏]가 군사를 보내 와서 … 우리에게 패하였다 : 이와 관련된 내용이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보인다. 그러나 이 경오년(庚午年) 기사는 영명(永明) 8년(490; 동성왕 12년)이 되어 본서와 2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본 기사의 연대는 『資治通鑑』 권136 齊紀2 世祖 永明 6년(488)조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북위가 해로로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7, 399쪽)가 있다. 반면 북위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백제가 중국 화북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전쟁이 가능하다는 대륙진출설을 주장하는 견해(金庠基, 1967; 方善柱, 1971)도 있다. 백제를 공격한 위의 실체에 대해서는 본서 기술대로 북위로 보는 견해(李明揆, 1983, 91~92쪽), 고구려로 보는 견해(兪元載, 1992, 92~94쪽), 북위와 고구려의 연합군으로 보는 견해(朴眞淑, 2000, 96~97쪽) 등이 있다. 이 중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나오는 ‘흉리(匈梨)’ 또는 ‘험윤(獫狁)’이 고구려의 멸칭이라는 점을 고려(兪元載, 1995, 263∼289쪽)해서 대체로 고구려로 보고 있다.

『삼국사』는 물론 중국 사서인 『건강실록』 『태평환우기』 『통전』 『자치통감』 『남제서』를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볍게 부인

4. 494년 고구려에 패배하여 빼앗은 고구려 영토 상실

- 남제가 494년 7월 문자명왕을 도독영평이주로 책립

- 예부여가 494년 2월 고구려에 귀부, 『삼국사』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3년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

- 위와의 전쟁으로 국력 쇠약해졌고, 젊은 문자명왕이 고구려 지휘

5. 죽음

1) 실정

- 497년 대홍수,

- 499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다. 겨울에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 499년 신하들이 창고를 열어 진휼하여 구제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음

- 500년 봄에 임류각(臨流閣)을 궁궐 동쪽에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丈]이었다. 또한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반대하며 상소하였으나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궁궐 문을 닫아 버렸다. 5월에 가물었다. 왕이 측근[左右]들과 더불어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며 밤새도록 환락을 즐겼다.

2) 직접 원인

- 동성왕은 501년 요동반도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를 보내는데, 『三國史』 「百濟本紀」 東城王 二十三年秋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苗加鎮之

백가는 오지로의 인사 즉 숙청에 대해 불만을 품고 동성왕을 암살. 『三國史』 「百濟本紀」 東城王 二十三年冬十一月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沘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王以苩加鎮加林城, 加不欲徃, 辝以疾. 王不許. 是以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謚曰東城王

- 백가는 486년에 위사좌평(경호실장)에 임명되어 동성왕과 동고동락한 인물.

[백제가 고구려 유주 점령 후 위 격퇴 시 ]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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