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북연을 세우면서 진번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 요동고새 남쪽 영토도 새로 획득하였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의 12군은 명확하며, 나머지 하나는 대방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 시 발해만 부근 국경]

* ‘韓 백제 북부’는 고구려가 396년 점령한 영토로 韓태수를 임명하여 다스린다.
연군은 후연의 용성으로 추정되고 대군은 태행산맥 서쪽이다. 따라서 이 13군은 하북성에서는 북쪽은 영정하, 남쪽은 당하까지를 영역으로 하고 산서성에서는 대까지를 영역으로 한다. 통역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이 지역을 점령한 407년에는 현지인을 태수로 임명하였고, 鎭이 첫 유주자사임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鎭이 후연의 유주자사였다고 주장하나, 진이 국소대형이라는 고구려의 것이 분명한 관직을 역임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주장이다. 고구려를 축소시켜 중국에 충성하려는 갸륵한 충성심의 발로로 보인다. 그들은 鎭의 관직명 중 중국의 것이 많아서 고구려의 유주자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나, 그들의 말대로라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들은 중국의 관작을 받았으므로 다 중국의 관료여야 한다. 고구려와 중국왕조 사이 외교관계의 일환으로 중국왕조가 고구려의 왕이나 유력한 관료에게 중국의 관작을 수여하는 것이 상례였고, 현지인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고구려가 중국왕조에 적당한 관작을 요구하여 받았을 것이므로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태수래조도 문구가 유주의 州治인 廣薊를 언급하면서 고구려의 국도가 아닌 洛陽에서 2300리 거리를 말하므로 진이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나, ‘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주 치소가 광계였다. 지금 치소 연국은 낙양에서 2300리이다)’라는 문구가 진이 고구려인임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유주의 치소가 후연 때 광계여서 처음 부임한 유주자사 진은 과거의 유주 치소에서 다스렸다. 고구려가 막 정복한 상황에서 진이 부임하였고, 아직 고구려가 새로운 치소를 만들지도 않았다. 진은 부임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진의 무덤에 묵서명을 기록할 때는 고구려가 연국에 새로 치소를 만들었다. 고구려는 초기 영정하까지 회복한 후 그 남쪽으로는 크게 영토를 확장하지 못했다. 광개토대왕이 중국을 일시적으로라도 거의 정복했던 연을 무너뜨리고 새로 그 영토를 점령했으니 고구려인들은 크게 기뻐했을 것이고, 초대 유주자사가 된 진이나 그의 후손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덤에 진이 업무했던 상황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 진이 유주자사로서 廣薊에서 업무를 보았던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어서 묵서명 기록 시의 치소까지 기술했다. 낙양에서의 거리를 기록한 것은, 지금 영국이 정한 위도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고구려는 당시 전쟁이 일상적인 상황에서 고구려의 지리정보를 비밀로 유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鎭의 관작이 허구였고 내조도(來朝圖)도 鎭의 상상이나 희망사항이라 주장하기도 하나, 그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그들처럼 남들도 쉽게 날조를 일삼는 줄 안다.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에 부합하지 않는 사료가 나타나는 경우 그들의 상투적 반응은 그것이 날조라 억지쓰는 것이다.
덕흥리고분 묵서명은 “永樂十八年 太歲在무신(戊申)년, 12월 신유(辛酉)달, 25일 을유(乙酉)일에 무덤을 완성하여 옥구를 옮겼다”라 하는데 당시 晉의 역법에 의하면 12월 1일은 辛酉가 아니라 庚申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묘지명 기록자의 단순한 착오라 주장하나, 유력자 묘지명을 적으면서 달의 간지에 착오가 있다는 것은 거의 가능성이 없다. 해의 간지인 戊申, 12월의 간지(그 달 1일의 간지)인 辛酉, 날의 간지인 乙酉를 명시했다는 것은 간지를 고려하여 시신을 무덤에 안치하는 날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쪽 벽에 ‘太歲在己酉二月二日辛酉成關此墪戶大吉吏’(己酉年 2월 2일 辛酉日에 완성하여 이 무덤의 문을 닫았으니 크게 길하리라)라 하여 무덤을 닫은 날을 명시하면서도 간지를 부기하고 있는데 역시 간지를 고려하여 택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택일에 간지를 고려했다면 기록자의 착오가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12월 1일의 간지가 다르다는 것은 고구려의 독자적 역법이 있었던 증거로 보아야 한다.
고구려인이 3년상을 치렀으므로 鎭이 407년의 유주자사가 되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으나, 3년상은 사망 후 3년째 길일을 택하여 매장하는 것이므로 매장완료일인 409년 2월 2일로 사망일을 판단할 수는 없다. 409년에 매장을 하였다면 사망일은 407년의 어느 시점도 가능하다. 鎭은 고구려의 첫 유주자사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노구에도 격무를 이어가다 부임 후 얼마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으므로 매장일을 이유로 鎭의 유주자사 취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태수래조도가 370년 전연이 망했을 때의 상황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로 인정되고 있으며 고구려가 전반적으로 백제에 밀리는 상황이었으므로 타당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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