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수로

역사회복 2023. 2. 8. 06:39
 
 

1. 김수로의 이동과 건국

 

新을 건국한 흉노 세력은 新이 망하자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김알지는 대구에 계림국을 건국하였다가 서기 65년 탈해의 신라와 결합하고 김수로는 서기 42년 가야를 건국하였다.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삼국사』 「김유신열전」은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가 같은 성이라 하며, 『삼국유사』는 문무왕이 김수로왕도 자신의 15대 시조라며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한다.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新을 건국하였다가 新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는 함께 한반도로 도피하였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는 한반도로의 도피를 “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어려운 때를 피해 멀리까지 갔다. 그리하여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일제유사사학의 교시를 좇아, 김수로와 허황옥을 부정하고, 서기 42년 고대국가로서의 가야 건국도 부정한다. 그러나 김해를 중심으로 발굴되는 新錢(소위 왕망전)은 김수로의 실존과 중국에서 김해로의 이동을 명확히 입증한다. 新錢은 김해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도 대마도 구주 북쪽에서 발견된다. 오수전은 유철 때 제작되어 이연 시기까지 무려 700년이 넘도록 사용된 최장수 화폐로서, 가장 성공한 화폐로 평가되고 있는데도, 한반도 남부에서는 그 통용 기간 및 발행량에 비해 극히 적은 양이 확인되어 유통기능을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新錢은 新이 20년도 존속하지 못했고, 건국 이후에도 잇달아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가 정세가 매우 혼란했음에도 거문도 난파선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오수전을 제외하면 오히려 오수전보다 많은 양이 확인된다. 또한 한반도 북부와 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오수전에 비해 新錢은 수량 측정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만 발견되는데, 이는 오수전과 新錢의 존속 시기를 고려할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 대마도, 구주에서 新錢이 발견되는 것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라는 지리적 거리와 극히 짧은 유통기간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한반도 남부와 중국간 무역이 新나라 시기에만 있었을 리는 없으므로, 이러한 현상을 무역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김수로 집단이 新의 실세로 있다가 유수를 피해 김해로 오면서 많은 양의 新錢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新錢이 김해를 중심으로 발견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이유는 찾을 수가 없다. 

 

2. 김수로의 리더싶

 

1) 백제와 제휴하여 한반도로 이동

ㅇ 유수에 쫓기는 상황이고, 왕망이 서기 12년 유리왕을 죽였으므로 고구려에는 갈 수가 없었음

 

2) 평화적으로 가야 건국

ㅇ 구간의 추대로 건국(가락국기), 무력에 기반하였겠지만 무력 사용 자제

ㅇ 수로왕은 직위의 명칭이 농부의 칭호라 하면서 계림의 직제를 취하여 관제를 정비하였다. 수로왕이 관제를 개편하기 전에는 토착세력의 관제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김수로 세력과 토착세력은 전쟁보다는 평화적 교섭을 통해 가야를 건국

 

3) 허씨집단과 제휴하여 권력 강화

ㅇ 토착세력과 권력을 나누어가지지 않기 위해 토착세력의 혼인 요구 거절

ㅇ 대신에 중국에서 경제적 기반을 잃은 허씨집단과 제휴

허씨집단은 타밀인(인도 남부로 이주한 조선인)으로 남중국과 남인도 사이의 무역에 종사했다. 당시 남인도 타밀인들의 남중국과의 무역경로는 타밀지역과 광동(廣東)및 천주(泉州)의 항구들을 통한 해양루트와 타밀-아쌈-차마고도-중국 남서지역으로 이어지는 깜루쁘(Kamrup)루트가 있었다. 고대의 아쌈은 해로를 통하여 타밀과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타밀 상인들이 미얀마를 거쳐서 중국으로 가는 주요 거점이었고 기원 전후 시기 벵갈-델타(Bengal-delta)는 바다였으며, 아쌈은 바다와 직접 닿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주의 위치상 허씨집단은 깜루쁘루트의 육상부분 즉 아쌈-차마고도-보주를 담당한 무역집단으로 보인다. 47년 후한에 대항한 이들을 후한이 양자강변 무한으로 축출하자, 황해를 중심으로 양자강, 황하, 동남아까지 무역을 했던 백제와 접촉하게 되었고, 백제의 중매로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혼인하게 되었다. 

 

4) 신라 격퇴

ㅇ 신라가 황하 하류에서 나와 한반도로 이주하였는데, 가야를 차지하려 함

ㅇ 탈해와 싸워 승리- 탈해가 중국에서 온 배가 정박하는 곳에서 계림의 국경으로 도주

 

5) 민본정책

ㅇ 그는 임시로 대궐을 세우게 하고 거처하면서 다만 질박(質朴)하고 검소하니 지붕에 이은 이엉을 자르지 않고, 흙으로 쌓은 계단은 3척이었다.

ㅇ 도성 공사: 1월-3월, 10월-다음해 2월, 농번기를 피함.

즉위 2년 계묘 정월(43년)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서울을 정하려 한다”라고 하고 –--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해서 마침내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이곳에 1,500보 둘레의 성과 궁궐(宮闕)과 전우(殿宇) 및 여러 관청의 청사(廳舍)와 무기고(武器庫)와 곡식 창고의 터를 만들어 두었다. 일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와 두루 나라 안의 장정, 인부, 공장(工匠)들을 불러 모아서 그달 20일에 성 쌓는 일을 시작하여 3월 10일에 공사를 끝냈다. 그 궁궐(宮闕)과 옥사(屋舍)는 농사일에 바쁘지 않은 때를 기다려 이용하니 그해 10월에 비로소 시작해서 갑진 2월(44년)에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