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낙랑군 위치와 낙랑군 위치 왜곡의 과정,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

역사회복 2023. 2. 9. 19:15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는 다르다.   https://taxecolaw.tistory.com/72

낙랑군 왜곡의 과정

강단·일제·중제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의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전제부터 근거없는 날조임이 드러난다. 더 이상 그들의 날조를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날조의 골이 깊어 날조의 과정을 더 살펴본다.

진수(233년-297년)는 낙랑과 대방, 환도성의 위치를 알았다. 조위의 공손씨 정벌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이 그의 생존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방군에서 왜의 북쪽 대안이라고 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 표시하고 있고, 그 경로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시하고 있다.

--------------------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조

(대방군에서 왜까지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는데,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北岸]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7천여리이다)

​--------------------

 

歷韓國은 대방군 해안에서 남쪽으로 韓國을 지나 간다는 말이다. 7천여리의 처음부분에서 韓國을 [韓國은 연제 사이의 번조선(韓 지역)이다] 지나치므로 한반도 남부가 韓이라는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이 한 문장만으로도 소설이 된다.

한국을 지나 산동성 봉래에서 섬을 따라 요동반도 대련으로 가서 한반도 해안을 따라 구야한국에 이르는 길을 진수는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즉 진수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보정시 부근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구야한국까지의 거리도 7천여리라고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김해까지 7천여리라면 대방군은 황해도가 될 수 없다. 이 때 강단유사사학의 억지 쓰는 특기가 발동된다.

-------------------------

里: 『春秋穀梁傳』을 위시한 고대 중국의 典籍 등에 따르면, 거의 모두 1里는 300步라고 기재되어 있다. 魏의 1尺은 24.5cm로 복원되고 있으므로 1里의 실제 거리는 435m 정도이다. 『三國志』의 道程이나 日程에 관한 전체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이 거리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는 하루 평균 육로로 40里, 수로로도 40里를 여행하였다(山尾幸久, 1972:62~70). 한편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000里라고 한 것은 실제 거리가 아니라 郡에서 구야한국까지 여행하는 데 걸린 날짜에 40里를 곱해서 얻은 수치일 가능성도 있다. 〈韓傳〉에서 “方四千里”라고 한 기록과 함께, 한반도 남부에 대한 정확한 지리적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거나 과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 관련 부분 주석 (2022.2.13. 현재)

---------------------------

그러나 억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범엽도 왜와의 거리를 “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 『후한서』 「동이열전」 왜조

(낙랑군의 변경에서, 그 나라(야마대국)까지는 만이천리이고, 그 서북 이웃인 구야한국까지는 7천여리이다)”라고 기술한다. 낙랑군 변경을 대방군이라 한다면 범엽도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천여리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부분을 “낙랑군의 변경에서 그 나라는 만 2천리 떨어져 있고, 그 나라의 서북방에 있는 구야한국에서는 7천여리 떨어져 있다”라고 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 관련 부분 번역 (2022.2.13. 현재)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의 거리가 7천리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한다. 아주 쉬운 문장이므로 이 번역은 고의적 날조이다. 여기에서 억지가 안 통하는 경우 오역으로 해결하려는 그들의 ‘실증적’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낙랑군을 고구려 평양(요양)이라 하기 위해 사기를 쳤다. 현존하는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이다. 『후한서』 志 30권은 범엽이 저술한 것이 아니라, 6세기 전반에 활동했던 양나라 사람인 류소가 사마표의 『後漢書』 8편을 취하여서 보결한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후한서』에 대한 주석. (2022.2.23. 현재)

현존하는 『후한서』 「군국지」는 낙랑군을 요양(고구려 평양)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군의 위치를 날조하면서 낙양에서 낙랑군이 5천리라 하는데, 이는 『후한서』 「동이열전」이 낙랑 변경에서 구야한국까지가 7천여리라 하는 것과 모순된다. 사마표가 3세기 말에 활동했던 사람이어서 낙랑군의 위치를 모를 수 없으므로 현재 전하는 「군국지」는 날조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남제서에서 백제가 위에게 대승하는 내용을 지워버렸다. 사서의 내용을 긁어서 지워버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용을 조작하는 것은 중국인들에게 식은죽 먹기일 것이다.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다.

『후한서』 「군국지」가 위서인 이유는 낙랑군 5천리 이외에도 차고 넘친다. 이 위서는 낙양으로부터 동북으로, 요서군은 3300리, 요동군은 3600리, 현도군은 4000리, 낙랑군은 5000리, 어양군은 2000리, 우북평군은 2300리, 탁군은 1800리라고 한다. 낙랑이 어양과 우북평 남쪽에 있음에도 낙랑까지의 거리가 어양의 2.5배나 된다. 후한 요수는 중역수로 요서군은 어양 서쪽이므로 요서군의 거리가 어양보다 1300리나 멀 수 없다. 어양과 우북평은 바로 옆에 있으므로 300리의 거리 차이가 발생할 수 없다.

「군국지」에는 광양군의 거리가 기재되어 있지 않고, 한관(漢官)에는 2천리라 되어 있다. 『후한서』 「군국지」 廣陽郡高帝置,為燕國,昭帝更名為郡。世祖省并上谷,永(平)〔元〕八年復。五城,戶四萬四千五百五十,口二十八萬六百。薊本燕國。刺史治。(漢官曰:「雒陽東北二千里。」)  廣陽 昌平故屬上谷。  軍都故屬上谷。  安次故屬勃海。

다른 군은 거리가 기재되어 있는데 광양군만 기재되지 않는 것도 이상하며, 또 상곡군이 3200리라 하고, 『후한서』 「군국지」 上谷郡秦置。雒陽東北三千二百里。八城,戶萬三百五十二,口五萬一千二百四。沮陽  潘永元十一年復。  𡩋。  廣𡩋  居庸  雊瞀  涿鹿  下落

광양군 조에서 광양군과 상곡군이 세조 시에는 병합되었다 하는데, 2000리 떨어진 광양과 3200리 떨어진 상곡이 병합될 수 없다는 점에서 거리가 조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군과 탁군의 거리 비교로도 위서임을 알 수 있는데, 대군은 탁군 남서쪽이므로 대군이 탁군보다는 낙양에서 가까워야 하는데 「군국지」는 탁군이 1800리라 하고 『후한서』 「군국지」 涿郡高帝置。雒陽東北千八百里。 대군은 2500리라 하기 『후한서』 「군국지」 代郡秦置。雒陽東北二千五百里 때문이다.

『후한서』 「군국지」가 날조된 증거는 또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146년에 있었던 고구려의 서안평 습격 사건을 기술하고 있는데, 7세기에 활동한 이현은 「군국지」를 근거로 서안평과 대방이 요동군에 속한다고 주석한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 質·桓之閒, 復犯遼東 西安平, 殺帶方令, (郡國志, 西安平·帶方, 縣, 並屬遼東郡.) 掠得樂浪太守妻子 [이현의 주석 해석: 「군국지」는 서안평과 대방은 현으로 모두 요동군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군국지」는 서안평은 요동군에서, 대방은 낙랑군에서 기술하고 있으며, 요동군의 호수는 6만인데 인구수는 8만이라고 한다. 이는 이현이 본 「군국지」와 현재의 「군국지」가 다름을 의미하며, 호수 6만과 인구수 8만은 날조과정에서 실수가 삽입된 것을 의미한다.

김진경은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가 명대에 삽입된 위사라고 주장하나, 김진경, 「고조선의 도읍지, 건국(建國) 년도, 국호 등에 관한 고찰」, 『선도문화, 16.0』 2014. 138-140쪽.

6세기 초 활동한 위(북위)의 역도원(466년경-527년)이 요양이 낙랑군이었다고 생각하고 수경의 패수 설명이 틀렸다고 생각한 것을 『水經注』 浿水, 考之今古 于事差謬 盖經誤證也 고려하면 역도원보다 이른 시기에 낙랑군이 요양이라는 날조가 행해졌고, 그것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12세기에 쓰여진 『삼국사』도 졸본을 설명하면서 요동군이 낙양으로부터 3600리 떨어져 있다고 한다. 『삼국사』 「잡지-지리」 고구려, 漢書志云, “遼東郡, 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여기서 漢書志는 『후한서』 「군국지」를 말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사기』 「조선열전」 패수에 대한 주석. (2022.5.27. 현재)]

 

덕흥리고분 태수래조도에 연국이 2300리로 씌어 있으므로(州治廣薊今治燕國去洛陽二千三百里) 후한 유주의 군들은 ±2300리로 보아야 타당하다. 낙랑군이 낙양에서 2300리 정도라는 것과 『후한서』 「동이열전」 낙랑군 변경(대방군)에서 구야한국까지 7천리라는 것을 고려하면, 낙랑군과 대방군은 결코 평양과 황해도에 있을 수 없고, 보정시 부근에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강단유사사학의, 여행에 걸린 날수로 里수를 측정한다는 억지에 의하면, 낙양에서 황해도까지는 고속도로로 금방 와서 2300리이고, 황해도에서 구야한국까지는 길이 험해 시일이 오래 걸려 7천리라는 말이 된다. 강단유사사학은 후한 때 이미 고속도로가 있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위사가 삽입되고, 다음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옛 왕검성이었다는 위사가 첨가된 후, 고구려의 수도가 하북성에서 요양으로 이동하자, 옛날의 왕검성(낙랑군)까지 새로운 고구려의 수도인 요양으로 따라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날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후한서』 「군국지」를 날조하였다. 여기까지가 중국인들이 만든 위사이고, 조선의 사대주의 유학자와 일제는 고구려의 수도가 현재의 평양이었다는 위사를 더 첨가하여 낙랑군이 보정시에서 머나먼 길을 달려 한반도의 평양까지 오게 되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