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사군의 날조성

역사회복 2023. 2. 9. 19:38
 
사마천은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만든 4군에 대해선 그가 살아있을 때의 일임에도 군명을 열거하지 않았다. 『사기』 「조선열전」 以故遂定朝鮮為四郡

설치하자마자 폐지된 서류상의 군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漢은 요동외요를 포기하고 요동고새로 후퇴하였으므로 진개가 만든 5군중 요동고새 바로 북쪽의 어양과 우북평만 유지하였다.

예맥조선을 침략한 후에는 진개가 만든 국경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새로 영토가 늘어난 부분은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이다. 진개의 요서군을 요서군과 현도군으로 나누었으므로 진개 때보다 영토가 증가한 것은 없다. 임둔군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다 일부 실효지배하던 곳은 낙랑군에 편입시켰다. 진번과 현도도 서류상 존재하다 실효지배하는 북경 북쪽에 현도군을 두었다. 낙랑군은 원래 漢의 영역이었다. 강단유사사학이 漢이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설치하였다고 주장하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 『한서』 「조선열전」 遂定朝鮮爲眞番·臨屯·樂浪·玄菟四郡. 중에서는 실제 새로 얻은 영토에 설치된 것은 현도밖에 없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새로 등장하는 군명을 영토가 확장된 4군이라 하면서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으로 날조하였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대동강이 조한전쟁 시의 패수이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사기』 「조선열전」 패수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2.7. 현재)

浿水 : 浿水는 漢과 朝鮮의 國境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衛滿의 亡命과 漢 武帝의 朝鮮침공 및 漢四郡설치 등과 관련하여 당시 古朝鮮의 位置와 領域을 알려주는 중요한 지역으로 파악된다.

浿水의 位置에 관해서는 종래 大同江說, 淸川江說, 鴨綠江說, 遼東方面說 등으로 구분되고 있다. 최근에는 난하, 혼하說 등이 제시되고 있다. 大同江說은 酈道元의『水經注』이래『隋書』·『新唐書』·『通典』 등 中國史書에 유지되어 浿水를 大同江으로 인식케 하는 작용을 하였다. 한편, 丁若鏞은 浿水에 관한 說이 鴨綠江說, 大同江說, 遼東泥河說, 猪灘水說 등으로 나뉘어져 韓國傳統史學者들 사이에서 논의 되었음을 언급하고, 자신은 鴨綠江說을 견지하여 浿水에 관한 이해가 다양하였음을 보여주었다. (『與猶堂全書』「疆域考」 浿水辯)

淸川江說은 李丙燾 등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列水를 大同江으로 확정하고 平壤 지역을 古朝鮮의 中心地로 이해하는 입장에서 제시되었다. (「浿水考」) 한편 申采浩는 蓒芉濼說을, (『朝鮮史硏究草』pp.45∼65) 鄭寅普는 淤泥河(大凌河)說을(『朝鮮史硏究』) 제기하여 浿水의 遼東방면 위치설을 구체화시켰다.

이와 같은 遼東방면설은 李趾麟 등에 의해 大凌河說로 연결된다. 즉, 浿水에 관한 최초언급으로서『水經』浿水條의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라는 기사를 검토하여, 현재 遼東, 遼西지역에서 東南으로 흐르다가 河流에 가서 다시 東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江은 大凌河밖에 없다고 하고 또한 이것의 古名이 白狼水(『熱河志』大凌河)였음을 밝혀 그 音相似도 설명하였다. 특히, 漢代 鏤方縣이 大凌河 유역이었음을 설명하여 이같은 견해를 제시하였다. (『古朝鮮硏究』pp.72∼83)

한편,『漢書』「地理志」 遼東郡 番汗縣條의 註 내용을 인용하여 浿水라는 명칭이 보통명사로서 파악된 연유 등을 설명하면서 浿水를 灤河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尹乃鉉,「古朝鮮의 位置와 疆域」 pp. 15~80) 그러나 고조선의 서쪽국경인 浿水와 고조선의 중심인 列水가 모두 灤河라는 견해는 수긍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즉,『史記』의 표현에 따르면 浿水의 위치는 遼東故塞의 位置와 고조선의 중심지인 列水의 位置 사이에서 찾게 된다. 따라서 遼東故塞를 秦長城의 東端에 위치한 것으로 보고, 列水를 遼河로 파악한 견해에 의하면 자연히 浿水는 大凌河로 이해된다. (리지린,『고조선연구』) 한편, 古朝鮮의 中心이 이동함에 따라 列水의 위치도 옮겨졌으리라는 견해를 따르면 자연 列水가 대동강에 비정되므로, 浿水는 대동강과 요하 사이의 강이 된다. 그리하여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은 淸川江(이병도)·압록강(정약용·천관우) 등이다.

그러나『史記』의 내용을 세밀히 검토하면 浿水는 遼東故塞(燕의 鄣塞)와 秦故空地사이의 江이다. 燕의 동방진출시 조선과의 국경선이었던 滿番汗이 자연계선이라면 浿水는 이와 병행하는 江이 된다. 滿番汗이 千山山脈 주변의 지명에 비정되므로 고조선의 중심 이동과 관계 없이 浿水는 요동지역의 강임이 틀림없다. 다만, 浿水는 조선계 지명으로 흔히 고조선의 수도 근처를 흐르는 강으로 이해되니,『漢書』「地理志」에 나오는 평양 남쪽의 후일의 浿水는 바로 고조선 말기의 중심지였던 大同江으로『史記』의 浿水와는 다른 강으로 이해된다. (徐榮洙,「古朝鮮의 위치와 강역」)

漢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했다고 한다. 그러나 탁군 바로 북쪽에 어양과 우북평이 있으므로 왕검성은 우북평 북쪽에 있어야 한다. 땅이 고무줄이 아닌 한 漢이 남쪽으로 예맥조선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단유사사학은 강 흐름도 동에서 서로 바꾸고 땅도 고무줄처럼 취급한다. 설사 강단유사사학의 주장대로 탁군에서부터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이 차례로 한반도까지 연결되어 있었더라도 朝漢의 남북이 뒤바뀌는 것은 불가능하다. 漢은 요동고새로 후퇴하여 어양과 우북평만 지켰기 때문이다.

다시 양보하여, 진개 5군을 다 확보하면서 한반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가정해도, 전술하였듯이 왜 그러한 비정상적 경계가 있었는가를 설명해야 한다.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5군 인구 다 합쳐야 얼마 되지도 않으므로 5군 인구를 다 국경 방어에 써도 모자라는데 무슨 이득이 있어서 그런 비정상적 경계를 흉노와 전쟁 중에도 유지했는가를 밝혀야 한다.

국가의 영역은 연결되어야 하고 밀집되어야 한다. Branch, Jordan. “How Should States Be Shaped? Contiguity, Compactness, and Territorial Rights.” International Theory, vol. 8, no. 1, 2016, p. 1.

 

밀집된다는 것은 뭉쳐 있다는 것을 말한다. 원이 가장 밀집된 형태이다. 영역의 연결성과 밀집성은 국방과 경제적 효율성은 물론 국민적 일체감의 형성에까지 영향을 준다. Branch, Jordan. 위 논문, 4쪽.

 

국민적 일체감은 통치의 용이성과 직결된다. 영역이 연결되지 않고 밀집되지 않은 경우엔, 그러한 이상한 영역으로부터 오는 국방과 경제적 정치적 비효율을 상쇄시길 다른 동기가 있어야 한다. Branch, Jordan. 위 논문, 9쪽.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한반도 북부를 지배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를 지배하는 비효율이 상쇄되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이러한 필요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漢이 흉노와 다투고, 조위가 촉·오와 다툴 때도 한반도 평양까지 차지했다면 무엇 때문인지를 밝혀야 한다.

역사는 사람의 행위이므로 괴상한 것이 나타난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그저 중국과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충실히 복무한다. 그들은 적반하장으로 객관적 역사연구를 민족주의에 경도된 유사학문이라고 주장한다. ‘중국과 일본의 침략적 민족주의에 경도된 유사학문’은 강단유사사학의 묘사에 가장 적절한 어구이다.

또 강단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이 한반도 남부와 교역하는 것을 막았다고 하나, 한반도 남부와 漢은 같은 농경사회여서 무역할 것이 많지 않다. 漢이 필요로 했던 말 등 무역의 이익이 있는 품목은 경제의 성격이 다른 몽골초원에 있지 한반도 남부에는 없다. 예맥조선이 무역을 방해한 나라와 관련하여 『사기』 「조선열전」의 ‘眞番旁衆國’이 판본에 따라 ‘眞番旁辰國’ 또는 ‘眞番·辰國’으로 되어 있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사기』 「조선열전」의 주석. (2022.2.7. 현재)

“『禮記』에 의하면 「宋本」에는 ‘辰’으로 되어 있다고 하며, 『考證』에도 「正義本」에는 ‘辰’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通鑑』과 『漢書』에도 ‘眞番·辰國’으로 되어 있으나, ‘衆國’이라 한 것도 문맥상 의미가 통한다.”

‘眞番旁辰國’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진번은 진번조선이 망한 후 하북성 북부 산악지역에 잔존한 소국으로 추정되므로 예맥조선과 북부여 이외에 다른 나라와 접하기가 어렵고, 진번 옆 신국인 북부여가 무역의 규모나 성격상 예맥조선의 무역이익 독점에 가장 강한 불만을 품고 漢과 교섭하려 했을 가능성이 크고, 진번 등 나머지 소국은 예맥조선의 횡포를 알아도 보복이 두려워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漢이 예맥조선과 대동강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북부여는 예맥조선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漢과 통할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에 따르면 『사기』 「조선열전」의 “眞番 옆의 북부여가 글을 올려 天子에게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또한 가로막고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라는 『사기』 「조선열전」 傳子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旁辰國欲上書見天子, 又擁閼不通.

사건이 불가능하게 된다. 예맥조선이 漢과 강화하기 위해 보내려 했던 말 5000필은 한반도 남부에서 키울 수 없다. 키워도 비싸서 漢이 수입하지 않는다.

강단유사사학은 문헌근거로는 낙랑을 대동강에 유지시키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평양의 유물이 중국의 것이라고 날조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평양 고분 출토 금은제 공예품이 모두 漢에서 낙랑의 지배계층으로 사여된 물품이라고 날조하였으나,

최근 북방 몽골의 고분이 발굴조사되면서, 평양 고분 출토품이 몽골 고분의 것과 양식이 같고 제작기법도 단조 및 타출기법으로 동일하고, 중국의 것은 양식도 다르고 주조기법으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으며, 중국제 공예품인 칠기와 한경 등은 몽골, 중앙아시아 멀리는 우크라이나에서까지 발견되어 정부의 사여품이 아닌 단순 교역품으로 밝혀졌다. 주경미, 「낙랑 고분 출토 금은제 공예품의 연구」, 『한국전통문화연구, 15』, 2015. 261-308쪽.

1세기로 추정되는 평양 석암리 9호분 부장품인 박산로는 봉황과 거북이 산을 받친 형태인데, 이러한 형태는 하북성 산서성의 것과 유사하고, 섬서성 북부의 내몽고에서 나온 것과도 유사하며, 이러한 형태는 중국의 중심부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국립중앙박물관 (2022.2.7. 현재)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recommend/view?relicRecommendId=439380

평양 박산로와 유사한 박산로의 출토지는 모두 삼조선의 강역에 해당된다.

강단유사사학은 평양의 묘제가 중국식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목관묘가 낙랑과 관련된 묘제 중에서는 등장 시기가 가장 빠른 형식이라 주장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2022.2.7. 현재)

https://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798&idx=5656&st_char=2&sk=

그런데 목관묘는 한반도 서북지역에서 기원전 3세기경에 나타났으며, 낙동강유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 등장하여 2세기 중반까지 유행하다가 목곽묘로 발전된다.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2022.2.7. 현재)

(http://ko.cbnucop.wikidok.net/wp-d/5b4767a21ff7845c20eda979/View)

평양 지역의 목관묘에 특색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있더라도 그것이 낙랑군 설치 때문인지는 어떻게 입증되는가? 강단유사사학은 평양 지역의 목곽묘는 목곽을 구성하는 판재를 잇기 위한 부재로 나무쐐기가 사용되는 특징이 있으므로 낙랑군의 목곽묘라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위 웹페이지, (2022.2.7. 현재)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왜 중국과 연관되는지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묘제라는 것은 지역이나 계층마다 약간씩의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특징이 낙랑군의 설치로 인해 발생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한 낙랑군과는 무관한 현상일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이러한 특징을 갖는 목곽묘의 상한이 낙랑군 설치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위 웹페이지, (2022.2.7. 현재)

즉 낙랑군 설치와는 전혀 연관이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전실묘(벽돌방 무덤)에 대해서 요동 지역의 전실묘와 유사성이 높으므로 낙랑군의 묘제라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위 웹페이지, (2022.2.7. 현재)

요동 지역을 말조선의 강역이라 본다면 요동의 묘제를 닮았다는 것은 중국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이 된다. 결국 평양의 묘제가 중국식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주장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아무 지역이나 지정하고 낙랑군이라 주장하면 된다. 어떤 지역이나 묘제에 약간의 특성은 있기 때문이다.

이종선은 서북한 지역의 목곽묘는 묘제와 반출유물로 보아 섬서성 북부 오르도스 지역과 유사하므로 칠기나 도장 등 불충분한 증거로 낙랑유적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종선, 「오르도스 후기금속문화와 한국의 철기문화」, 『고신라왕릉연구』, 2000. 430-431.

흉노계 분묘를 종합한 연구에 의하면 흉노 분묘의 유형이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낙랑고토에 모두 나타난다. 田廣金, 「匈奴墓葬類型和年代」 『內蒙古文物考古 2호』, 1988. 8-17쪽. 이종선, 위 논문 433쪽에서 재인용.

 

삼조선 시 ‘흉노’가 신조선의 서방 번국이었으므로 이들의 문화와 말조선의 수도 평양의 문화가 유사함은 당연한 현상이다. 백번 양보하여, 묘제가 중국식이고 중국을 모방했다 하더라도 단순한 문화의 전파일 수 있으므로 낙랑군 설치의 증거는 되지 못한다. 중국과 러시아에도 맥도날드와 코카콜라는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여기가 낙랑군이니까 여기의 묘제는 낙랑식이라고 주장했다가, 여기는 사서에 의하면 낙랑군이 될 수 없다고 반박하니까, 묘제가 낙랑식이니 여기는 낙랑군이라고 손톱 만큼의 근거도 없이 억지를 쓴다. 강단유사사학은 할 말 없으면 아무 말이나 하는 행태를 보인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낙랑군 패수가 서쪽으로 흐르므로 평양이 낙랑군이라 한다. 낙랑군은 조한전쟁 이전 漢의 영토이므로 왕검성의 위치와 관계는 없지만 강단유사사학 주장의 억지성을 알아보며 예맥조선의 패수인 영정하에도 관련되는 내용이 있으므로 낙랑군의 패수를 살펴본다. 조성훈, 「사기 ‘예맥조선’ ‘진번조선’에 대한 시론적 신론」, 『역사와 융합 제5집』, 2019. 41-42쪽의 내용을 참조하고 보완함.

낙랑군의 패수 관련 1차사료는 다음과 같다

(ㄱ)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 『한서』 「지리지」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縣二十五:朝鮮,䛁邯,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黏蟬,遂成,增地,莽曰增土。帶方,駟望,海冥,莽曰海桓。列口,長岑,屯有,昭明,南部都尉治。鏤方,提奚,渾彌,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東暆,不而,東(郡)〔部〕都尉治。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낙랑군, 무제 원봉 삼년에 설치되었다. 왕망은 낙선이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 호는 62,812이고, 인구는 406,748명이다. 장새가 있다. 현은 25개이다. 1.조선, 2.남감, 3.패수, 패수는 증지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왕망은 낙선정이라 했다. 4.함자, 대수는 대방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5.점제, 6.수성, 7.증지 왕망은 증토라 했다. 8.대방, 9.사망, 10.해명, 왕망은 해환이라 했다. 11.열구, 낙랑군의 열구는 황하 어귀이다. 황하 어귀도 물길이 여러 갈래로 흘렀다.

12.장잠, 13.둔유, 14.소명, 남부도위 치소이다. 15.루방, 16.제해, 17.혼미, 18.탄렬, 분려산은 열수가 나오는 곳이고 점제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는데 820리 흐른다. 19.동이, 20.불이, 동부도위 치소이다. 21.잠태, 22.화려 23.사두매, 24.전막, 25.부조.

(ㄴ) 『수경(水經)』 浿水조 『수경(水經)』 浿水,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으로 임패현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ㄷ) 『설문해자(說文解字)』 「水部」 『설문해자(說文解字)』 「水部」 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从水貝聲。一曰出浿水縣。

 

패: 강이다.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물을 의미하고 패 소리이다. 혹자는 패수현에서 나온다고 한다.

(ㄹ) 역도원 『수경주』 『水經注』 浿水, 其地今高句麗之國治,余訪番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 即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국도이다. 내가 고구려 사신을 방문하여 물으니 성은 패수의 북쪽에 있다고 말하였다. 패수는 한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의 군치인 조선현을 통과하여 서쪽으로 흐른 후 서북으로 흐른다.

강단유사사학은 “浿水, 水西至增地入海”, “帶水西至帶方入海”, “列水所出 西至黏蟬入海”를 ‘패수 대수 열수가 서쪽으로 ∼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고 해석하여 임기환, 「한사군은 어디에 있었나? 그리고 어떤 역사인가?」, 『내일을 여는 역사 60』, 재단법인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15.09. 169쪽. 박성현, 「한서 지리지 낙랑군 3수의 비정에 대한 검토」, 『한국 고대사 연구 79』, 한국고대사학회, 2015.09. 10쪽. (이들 외에도 모든 한사군 한반도설 주장자들은 『한서』 「지리지」 낙랑군 조의 강들이 서쪽으로 흐른다 해석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서쪽으로 흐르는 평양 일대의 강들을 묘사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올바른 해석은 ‘강이 ∼의 서쪽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이다. 당시 발해만 일대의 해수면은 더 높아 보정시 북쪽이 바다였다. 바다가 좁게 깊숙히 들어왔기 때문에 강이 바다의 북쪽이나 남쪽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하북성 중부의 강들은 서쪽의 태행산맥에서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강이므로 중간에 남쪽이나 북쪽으로 흐르는 경우는 있어도 전체적으로 동쪽으로 흐른다. 『한서』 「지리지」의 저자는 강들이 서쪽의 산에서 동쪽으로 발해로 흘러간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여 기술할 필요가 없었다. 강의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어느 지점에서 바다로 들어가는지 말하기 위해 증지현의 서쪽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라는 식의 표현을 한 것이다. 西는 至增地라는 술어의 부사어이다.

하북성 중부 지역이 삼각주로서 퇴적물이 쌓이며 육지가 늘어나고, 홍수 시 강줄기가 변하고, 해수면이 계속 내려가는 중이었으므로 현재의 강 흐름과 현재의 해안선에서 문헌 상의 표현만으로 과거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당시에도 낙랑군 증지현은 없다가 새로 생겼던 땅이다.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로 삼각주가 형성되지 않는다. https://namu.wiki 삼각주 해설: 한국의 경우 황해 쪽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황해의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한 관계로 흘러든 퇴적물이 바다로 빠져나가 삼각주가 잘 형성되지 않는 편이다. 대신 간석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동해 쪽으로 흘러드는 하천은 동해 수심이 너무 가파르게 깊어져서 또 잘 형성되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에 삼각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고, 대표적으로 낙동강 삼각주가 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에도 삼각지가 있다. 다만 압록강의 경우 중국 측 단둥시의 확장과 더불어 하중도가 육지와 붙어가는 중이고, 두만강의 경우엔 북한 쪽에 있던 하중도가 러시아로 붙어, 북한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조정이 있기도 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이 패수로 주장하는 대동강 재령강 예성강 하류에는 증지현이 생길 수가 없다. 『수경』과 『설문해자』도 패수는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다.

위의 역도원이 6세기 초에 쓴 『수경주』에서, 고구려 사신으로부터 들었다 하면서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고구려 수도를 경과하고 이후 서북으로 흐른다고 주장했는데, 당시의 고구려 수도인 평양은 요양이고, 후에 상술한다.

태자하는 요양을 서쪽으로 지난 후 서북으로 흐른다. 역도원은 낙랑군이 요양이라 생각하여 태자하를 패수로 간주하고 『수경』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역도원의 주장은 패수가 바다로 흘러든다는 『한서』 『수경』 『설문해자』의 기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태자하는 평양을 지나 북서로 흐르다 다시 남쪽으로 흘러야 바다로 갈 수 있어 남쪽으로 흐르는 다른 강에 유입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중제·강단유사사학은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서 대동강이 패수라고 하는데 대동강은 평양을 지나 남서로 흘러가므로, 조선의 패수와 고구려의 패수도 구분 못하는 역도원의 말과도 맞지 않는다.

결국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증거는 시멘트 묻은 점제현신사비와 날조된 목간, 일제유사사학이 북경에서 사온 날조 유물밖에는 없다. 사서에 의하면 낙랑군은 조한 전쟁 이전의 漢 영토 내에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