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재야 난하 갈석산설의 폐해

역사회복 2023. 2. 10. 08:00
 
1. 난하 갈석산설의 무근거성

난하 갈석산설은 역사날조 총책 담기양이 제조한 것이다. 근거가 전혀 없다. 윤내현이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는 근거는 요수가 난하라는 것과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다. 윤내현, 「한사군의 낙랑군과 평양의 낙랑」, 『한국학보, 11.4』, 1985. 7-9쪽.

윤내현은 고죽국이 난하 동부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라고 하나, 이는 요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실질상 윤내현은 난하가 요수라는 단 하나의 근거로 창려 갈석산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난하가 요수였던 적은 없다. 윤내현은 『여씨춘추』 「유시람」 고유 주석을 근거로 난하가 요수라 하나, 윤내현, 『한국고대사 신론』, 일지사, 1993. 43-44쪽.

 

본고에서는 고유가 말하는 요수가 중역수임을 밝힌 바 있다. 무엇보다도 갈석산에 대해 주장하려면, 요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보다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윤내현은 갈석산에 대한 사료를 검토하지 않는다. 담기양의 날조를 지원하기 위해 고홍장(高洪章)과 동보서(董寶瑞)가 제작한 글을 高洪章・董寶瑞, 「碣石考」, 『歷史地理』 3輯, 上海人民出版社, 1983, 225~228쪽. 인용하고 윤내현, 위 책, 44쪽.

책 뒤에 번역본을 첨부하기만 한다. 윤내현, 위 책, 355-364쪽.

고홍장과 동보서는, 담기양이 1976년에 제작 발표한 「碣石考」에서 ‘碣石溣海說’을 부정하고 옛 갈석산을 창려현 갈석산으로 본 것에 동의한다고 말한다. 윤내현, 위 책, 355쪽.

갈석논해설은 갈석산이 물에 잠겼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진짜 갈석산은 일부러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 같다. 담기양은 황하 갈석산 즉 보정시 낭아산이 갈석산이 되는 경우 북경이 명대를 제외하고 유사 이래 동이의 땅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창려 갈석산설을 날조했다. 고홍장과 동보서가 담기양을 지원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 윤내현, 위 책, 355-356쪽.

 

---------------------------

碣石의 지리적 위치에 관한 『尙書』 「禹貢」의 기록은 상당히 정확하다. “견산과 기산을 지나 형산에 이르고 --- 太行山脈과 恒山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기록이 「禹貢」 <도산>에 보인다. 여기에 언급된 산맥의 형세로 보아 갈석은 당연히 태행·항산 양대 산맥과 연결되고 그 형세가 이 산맥들과 상응하는 높은 산봉우리였을 것이다. 항산은 상산이라고도 부르는데(西漢 때 文帝 劉恒의 諱를 피하여 常山이라 고쳤다.) 태행산맥의 북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燕山山脈과 連接되어 있다. 그리고 갈석산은 연산의 주봉이 발해 연안으로 뻗어나가 돌출한 支脈이다. 따라서 “太行山脈과 恒山으로부터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는 표현은 중국 북부의 이 지역 일대에 있는 전체 산세의 방형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또한 이 「禹貢」의 기록은 『新唐書』 「地理志」 <嬀州> 懷川郡 懷戎縣조에 “동남쪽 50리에 거용새가 있고 동쪽으로는 노룡·갈석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은 태행산맥·상산에 속하여 있으니 실로 天下의 險地이다.”라는 기록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거용새는 바로 거용관인데 그곳은 서쪽으로는 太行山脈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연산의 여러 봉우리(여기서 말하는 盧龍은 당연히 盧龍塞인데 바로 燕山山脈의 능선이다.)와 연결된다. 이로써 일찍이 2000여 년 이전의 갈석산은 바로 渤海 北岸에 있었던 하나의 유명한 큰 산이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

독자를 속이기 위해 그들은 「우공」의 끝부분을 일부러 인용하지 않는다. 이미 전술하였듯이 이 부분은 “태행산(太行山)과 항산(恒山)의 물은 갈석산(碣石山)에 이르게 하여 바다에 들어가게 했다”로 끝난다. 고홍장과 동보서는 끝 부분을 제외하고 인용하면서 원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연산산맥을 첨부한다. 태행산맥이 산세가 연산산맥과 연결되어 있으니 연산산맥 끝인 창려 갈석산이 「우공」에서 말한 갈석산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불쌍할 뿐이다. 먹고 살려고 사기를 치고 있다.

뒤의 문장은 독자를 더 우울하게 한다. 전술하였듯이 거용새는 상곡이다. 즉 거용새는 보정시 서북쪽에 있었다. 현재의 거용관은 북경시 서북쪽에 있다. 거용새의 위치를 속이면서 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들의 주장은 현재의 거용관이 연산산맥에 위치한 것으로 볼 수 있으니 창려 갈석산이 『신당서』 회융현조의 갈석산이라는 것이다. 『신당서』도 연산산맥을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신당서』는 회융현이 동쪽으로 갈석산에 연결되고 동남쪽 50리에 거용새가 있고, 서쪽으로 태행산맥과 접한다고 한다.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 媯州媯川郡,懷戎。上。天寶中析置媯川縣,尋省。媯水貫中。北九十里有長城,開元中張說築。東南五十里有居庸塞,東連盧龍、碣石,西屬太行、常山,實天下之險。有鐵門關。西有寧武軍。又北有廣邊軍,故白雲城也。

그들의 위치 비정을 따를 때, 그들의 주장은 『신당서』의 저자는 직선거리로 300km 넘는 곳에 위치한 창려 갈석산을 회융현 주변 설명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강단유사학의 뺨을 여러 번 칠 정도의 독창성을 발휘한다. 회융현과 300km가 넘게 떨어진 갈석산이 운명적으로 연결되었던 사실을 그들이 발견했다.

『신당서』 회융현의 설명은 갈석산과 거용새가 가까운 곳에 있음을 말하므로 갈석산은 낭아산이고 거용새는 본고에서 비정한 상곡에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사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순수문학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우공」 ‘島夷皮服夾右碣石入于河’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윤내현, 위 책, 356쪽.

 

------------------------------

碣石에 관한 「禹貢」의 또 다른 기록인 “碣石을 오른쪽으로 끼고 河로 들어간다.”(『史記』 「夏本紀」에서는 “海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에 대하여 우리는 더욱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 「禹貢」의 이 구절 앞에는 “冀州, ……島夷皮服”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동일한 구절이 몇 군데 더 보인다. '島夷'는 『史記』 「夏本紀」에 따르면 ‘鳥夷’의 오류임이 분명하다. ‘鳥夷皮服’은 새를 토템으로 하는 민족이 獸皮를 貢物로 삼았음을 말한다. 그런데 이 내용을 “碣石을 오른쪽으로 끼고 河로 들어 간다.”는 문구와 연결시켜 볼 때, 冀州에 있었고 獸皮를 貢物로 하였던 鳥夷는 碣石山을 지나 서쪽으로 河口로 들어가서 그들의 都城에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지금의 碣石山은 바로 옛 黃河의 河口(대략 지금의 天津市 부근에 있었다.) 동북쪽에 있으므로 “碣石을 오른쪽에 끼고”라는 표현과 부합된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陸路나 水路, 특히 광대한 海上을 항해하여 貢物을 바치러 갈 때면 반드시 큰 산을 標準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의 碣石山은 크고 작은 100여 개의 산봉우리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 둘레는 사방 수십 리에 달하며 昌黎·盧龍·撫寧 3縣을 포괄하는데 그 主峰인 仙臺頂(속칭 娘娘頂)은 해발 695m로서 渤海 연안의 海陸 교통상 요충지에 해당하는 큰 산이다.

------------------------

그들은 河와 海를 날조한다. 「우공」에 河로 되어 있고, 『사기』에 海로 되어 있으면, 그것은 황하이다. 우가 황하를 치수하지 우의 입장에서 오랑캐인 외국의 강을 치수하는 것은 아니다. 고홍장과 동보서는 여기에서도 원문에 없는 ‘그들의 도성’을 첨가하여 河나 海가 황하가 아닌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황하가 아니라고는 하지 않는다. 옛 황하의 하구가 천진시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주장은 河나 海가 황하는 황하인데 천진으로 흘러서 천진과 창려현이 가까우므로 황하 하구에 창려 갈석산이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진과 창려 갈석산은 직선 거리로 250km이다. 250km 떨어진 갈석산을 보고 황하로 들어온다는 것은 그들의 뛰어난 희극감각을 잘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또 고대 황하는 천진 방향으로 흘렀을 뿐이고, 발해가 서쪽으로 깊숙히 들어와 보정시 즉 낭아산 부근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갈석산과 황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은 들어온 발해의 남쪽에 있었고, 천진은 당시 들어온 발해의 바닷속이나 바다의 북쪽에 가까우므로 그들의 주장은 완전한 날조이다.

그들은 전혀 문맥과도 맞지 않는 ‘그들의 도성’을 추가하기 위해 ‘도이피복’이라는 네글자만 인용하면서, 거짓말해야 하는 자신들의 불안한 심리를 달래기 위해 ‘더욱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본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문장은 인생의 고달픔을 깨우쳐주는 순수문학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난하 갈석산설은 전혀 근거가 없다. 근거도 없고 동북공정 총책에 의해 주장되고 있음에도 우리 역사를 회복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난하 갈석산설을 신봉하고 있음은 괴이한 일이다.

2. 난하 갈석산설의 폐해

한국 역사학계의 주류는 동북공정을 극복한다면서 동북공정을 추종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유사역사학을 통해 재물과 지위를 추구하는 카르텔이므로, 여기서 한국의 역사학계는 강단유사사학을 제외한 역사학을 학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동북공정 총책이 말하는 난하 갈석산설을 신봉하고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611쪽. 윤내현, 『한국고대사 신론』, 일지사, 1993. 44쪽.

 

후삼한남한설을 [ 弁韓이 있다가 弁辰으로 되며 이들은 중마한의 마을 속국에 불과하므로 후삼한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논의의 편의를 위해 후삼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후삼한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삼국사』 초기기록 불신론이다.] 추종한다. 안경전 역주, 『환단고기』, 상생출판, 2012. 362쪽. 윤내현, 『한국고대사 신론』, 일지사, 1993. 40쪽.

후삼한남한설은 좀비 삼한과 결합하여 야마토임나설이 된다.

난하 갈석산설에 의하면, 강단유사사학의 말처럼 소위 후삼한이 바닷속에 있게 되는데, 이들은 이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인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 초기 신라와 백제가 낙랑 동부도위와 인접하여 있으므로 낙랑군이 북한에 있고, 공손씨와 조위가 한반도남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후삼한남한설을 받아들이면서, 낙랑군 평양설을 공격하고, 공손씨와 조위가 韓을 지배했다는 기사에 대한 적절한 해명이나 설명도 없이, 공손씨와 조위가 남한을 지배했다는 주장에 분노하는 것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

난하 갈석산설을 유지하는 것은 주류 역사학을 유사역사학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강단유사사학이 불리하면 묵언수행하므로 유사역사학이 되는데, 난하 갈석산설도 강단유사사학의 공격에 묵언수행한다. 학문이 되려면, 난하설에 따르더라도 후삼한이 바닷속에 빠지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해야 하고, 반론을 못하면 난하설을 철회해야 한다. 그래야 학문이다. 그렇지 않고 묵언수행하면 강단유사사학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최재석은 『역경의 행운』 191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그들의 학문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였다면 의당 (나의 비판이 타당한지 부당한지) 대답이 있어야 할 텐데도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2010)까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병도(1989년 작고), 이기백(2004년 작고), 김철준(1989년 작고) 교수는 나의 비판에 응답하지 않고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내 나이 이기동 교수보다 20세 정도 연상이니 내 사후가 아니라 생존 시에 나의 비판에 답을 주기 바란다. 내 생전에 침묵을 지키다가 사후에 이러쿵저러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기 학문에 대한 비판이 나왔으면 그것에 대해 인정을 하든 반박을 하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 학문하는 사람의 도리 아니겠는가?

난하설에 따르면 韓을 발견할 수 없다. 韓을 발견하지 못하면 중국 동해안이 통째로 우리 역사에서 사라지고, 신라와 백제의 뿌리가 없어진다. 난하설에 의하면 우리 역사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동북공정 총책이 난하설을 주장하여 북경을 사수하고 있다. 갈석산이 난하에 있으면 중국 동해안의 우리 역사는 사라지고 그 이전의 역사도 연계가 없어져서 사라진다. 결국 강단유사사학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전술하였듯이, 『산해경』은 “조선은 열양의 동쪽, 대야택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축소된 번조선을 말한 것이다. 번조선이 주나라 제후국 제의 침략으로 남북으로 갈라지고 제장성 북쪽의 번조선이 제에게 더 밀려나 韓 지역으로 축소된 상태를 『산해경』이 기록하고 있다. 『산해경』이 기록한 韓을 말살시키는 난하설은 결과적으로는 동북공정이나 야마토임나설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