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유사사학은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일제유사사학의 교시를 좇아, 김수로와 허황옥을 부정하고, 서기 42년 고대국가로서의 가야 건국도 부정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신편한국사 7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2. 가야사의 범위 > 3) 가야사의 시기 구분 (2022.10.9. 현재)
“전기 가야사는 1∼4세기 동안 김해 가락국을 중심으로 한 경남해안 및 낙동강 유역의 변진 12국의 역사를 말한다. 이 시대를 세분하면, 철기를 수반하는 토광목관묘 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경까지를 가야문화 기반 형성 시기로 볼 수 있고, 토광목곽묘 문화가 형성되는 기원후 2세기대를 加耶 諸國 성립 시기, 3∼4세기는 김해지역의 우월성이 드러나는 전기 가야연맹 시기이면서 가야문화의 전성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전성기의 말미인 400년경에 국제관계에 휘말려 중심 소국들이 고구려·신라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단 멸망함으로써 전기 가야연맹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김해를 중심으로 발굴되는 新錢(소위 왕망전)은 김수로의 실존과 중국에서 김해로의 이동을 명확히 입증한다. 新錢은 김해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도 대마도 구주 북쪽에서 발견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신편 한국사 8 삼국의 문화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1. 선사시대 문물의 일본 전파 (2022.10.9. 현재)
오수전은 유철 때 제작되어 이연 시기까지 무려 700년이 넘도록 사용된 최장수 화폐로서, 가장 성공한 화폐로 평가되고 있는데도, 蕭淸. 『中國古代貨幣史』. 人民出版社, 1984. 113쪽. 김지희, 「왕망전(王莽錢) 분포 현황으로 본 한반도 남부와 동아시아」, 『아시아리뷰 12(1)』, 2022. 308쪽에서 재인용.
한반도 남부에서는 그 통용 기간 및 발행량에 비해 극히 적은 양이 확인되어 유통기능을 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김지희, 위 글, 308쪽. 현재까지 남한 지역에서 발견된 오수전은 총 1,060매로 추정되는데, 그 중 980매가 여수 거문도 난파선에서 발견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新錢은 新이 20년도 존속하지 못했고, 건국 이후에도 잇달아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가 정세가 매우 혼란했음에도 거문도 난파선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오수전을 제외하면 오히려 오수전보다 많은 양이 확인된다. 김지희, 위 글, 311-312쪽. 왕망전은 한반도 남부에서 94매 발견되었다
또한 한반도 북부와 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오수전에 비해 新錢은 수량 측정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만 발견되는데, 이는 오수전과 新錢의 존속 시기를 고려할 때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김지희, 위 글, 312-313쪽.
따라서 한반도 남부, 대마도, 구주에서 新錢이 발견되는 것은 중국과 한반도 남부라는 지리적 거리와 극히 짧은 유통기간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김지희, 위 글, 305쪽.
한반도 남부와 중국간 무역이 新나라 시기에만 있었을 리는 없으므로, 이러한 현상을 무역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김수로의 실존과 중국에서 김해로의 이동을 부인하고, 평양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강단유사사학의 입장에서, 낙랑군인 평양보다 한반도 남부에서 新錢이 많이 발굴되는 것은 변명이 필요한 현상이다. 김지희는 新나라 시기 낙랑군에 대한 중앙의 통제가 이완되었는데, 김지희, 위 글, 324-327쪽.
고구려를 제어하고, 낙랑군을 보호하면서도 견제하기 위해, 新이 한반도 남부의 어떤 정치체와 직접 교섭하면서 新錢을 위세품으로 수여하여, 한반도 남부에 新錢이 유입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김지희, 위 글, 334-336쪽.
여전히 평양은 낙랑군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김지희의 주장에는 논리가 전혀 없다. 新이 자기나라 군현인 낙랑군도 통제하지 못하는데 낙랑군보다 먼 한반도 남부와 교섭한다는 것은 이상하며, 자기나라 군현인 낙랑군을 견제하기 위해 외부 세력과 교섭한다는 것도 괴상하며, 자기나라 군현을 보호하면서 견제한다는 말도 모순이며, 그들의 소설에서 낙랑군 남쪽에 있는 낙랑군보다 미약한 세력인 한반도 남부의 정치체를 고구려 제어에 활용한다는 것도 지리적 역학적으로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동전은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원숭이 사회에서나 동전이 위세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新이 낙랑군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후한서』 「왕경전(王景傳)」은 경시제가 패배할 무렵 낙랑군의 토착민 왕조가 태수 유헌(劉憲)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자칭하였다고 하므로(“更始敗, 土人王調殺郡守劉憲, 自稱大將軍樂浪太守.) 낙랑군이 중앙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新이 망한 후인 25년 이후이다. 강단유사사학은 土人을 조선인으로 보나, 본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낙랑군은 원래의 漢 영토 내에 설치된 군이므로 土人은 漢人일 가능성이 크다.
김지희는 『위략』의 염사치 기사를 근거로, 낙랑군이 기본적 호구관리를 못하여 1500명에 달하는 漢人 노예가 韓에 잡혀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보아, 新이 낙랑군을 통제하지 못하였다고 주장한다(김지희, 위 글, 323-326쪽). 그러나 염사치 기사로는, 진한의 우거수가 왜 낙랑에 망명하였는지, 진한이 1500명을 잡아 노예로 부릴 정도의 힘이 있었는데 왜 말만 듣고 순순히 노예를 내어 주고 죽은 노예에 대해 보상하였는지, 호래는 노예임에도 아무 제지 없이 염사치를 따라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 사실성이 의심되며, 사실이라 하더라도 염사치의 신분이나 노예의 규모는 매우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또 염사치 기사에 보이는 행정체계는 함자현이 군에 보고하고 군이 바로 대응하며, 군이 만명의 군사를 보낼 수 있다고 하는 염사치의 협박을 진한이 믿을 정도이므로, 염사치 기사는 낙랑군의 행정체계가 잘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될 수 있어도, 新이 낙랑군을 통제하지 못하는 증거로는 되기 어렵다. 실제 낙랑군에, 왕조가 태수 유헌을 죽일 때까지 태수가 없었다거나 태수의 기능이 마비되었다는 사료는 전혀 없다.
新錢에 의해서도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것은 강단유사사학의 소설임이 밝혀진다.
김수로 집단이 新의 실세로 있다가 유수를 피해 김해로 오면서 많은 양의 新錢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新錢이 김해를 중심으로 발견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른 이유는 찾을 수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투후 김일제가 가야와 신라 김씨의 조상이 아니며 김씨들이 사기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연식, 「문무왕릉비의 화관(火官)」, 『역사민속학 44』 2014. 9쪽.
“문무왕은 수로왕을 신라 종묘에 모셔 제사지내게 하여 가야 왕실과 신라 왕실을 완벽하게 하나로 합한 장본인이다. 그러므로 화관과 투후의 이야기는 두 가문의 통합과 관련되어 파생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사실 소호 금천씨나 화관이나 투후 김일제의 이야기는 중국의 것일 뿐 신라의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흉노족 김일제가 언급된 것을 보더라도 비문의 문구는 설화를 끌어들여 가공한 수사적(修辭的)인 허구로 보인다.”
김수미, 「문무왕릉비에 나타나는 북방(北方)과 출계 인식의 변화」, 『역사학연구(구 전남사학), 74.0』, 2019. 65-94쪽.
“투후제천지윤전칠엽은 김일제 고사의 내용처럼 한에서 번영한 그의 집안 7대를 의미하는 상투적 기술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기록으로 신라왕의 대수나 세수를 역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신라 김씨 왕실이 그들의 출계를 화관지후와 투후지윤전칠엽이라는 중국적 관념에서 찾았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 김씨부인 묘지명의 출계는 신라 중대의 금석문인 「문무왕릉비」에서 보이는 출계와 그 인식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즉 소호금천씨에서 투정후 김일제로 이어지는 시조 인식이 동일하였다. 김씨부인이 신라의 왕족 김씨 출신임을 보여주는 출자관이다. 다만 실제적인 시조로 파악되는 태조성한이 빠져 있다. 이것은 증조 때 당으로 이주한 신라인의 후예 김씨부인의 묘지명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중대 문무왕대에 보였던 출자관 중에서 중국에서 끌어온 관념상 시조인 소호금천씨-투정후는 그대로 기술되었으나, 신라의 태조성한 이하 신라 왕실의 출계 대신 요동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들에 의하면 졸지에 800만 김해 김씨계 성씨들과 600만 경주 김씨계 성씨들은 날조된 조상을 갖게 된다. 생존을 위해,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하거나 저축해 놓은 新錢을 가지고 험난한 여정을 거쳐 한반도 동남부로 와 가야를 건국하거나 신라와 연합하였다가 신라의 왕위를 차지한 김씨 선조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남의 조상을 자기 조상으로 만든 자기부정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들 주장에 근거는 전혀 없다. 단지 초기 가야와 초기 신라를 부정하여 임나 선생님을 영접하고 일제·중제 유사사학에 충성하여 호의호식하려는 강한 열망만이 나타날 뿐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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