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국의 남부 해안가인 당산지역의 바닷가(조백하에서 난하까지 여러 강들의 어귀), 요동반도 바닷가(대능하에서 復州강까지 여러 강들이 요동만으로 흐른다), 황하 어귀, 양자강 어귀로 이주하고, 나중에 백제의 지배하에서 영산강 어귀로 이주한다. 영산강 어귀의 왜는 399년 신라에 항복한 후 403년 이후 열도의 나라(奈良)로 보내져 고구려계 열도소국의 주민이 된다.
일제유사사학은 오사카와 나라에 3세기부터 가공의 야마토왜(大和) 왕조가 있었다고 날조한다. 야마토왜 왕조는 역사에 있었던 적이 없다.
흔히 한민족이 한맥예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맥예가 한반도에서 이주한 집단이므로 종족적 차이는 없다. 지금까지 예와 왜를 다르다고 보았다. 즉 왜의 실체를 몰랐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조는 漢 말에 공손씨가 낙랑군을 차지하고 韓濊를 공격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韓과 濊를 공격하여 倭와 韓이 대방에 속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 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為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
즉 예와 왜가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1527년 간행된 『훈몽자회』도 倭자를 설명하며 뜻은 ‘예’이고 음은 와라고 설명한다. 『훈몽자회』 「인류」 倭: 예 와, 俗稱 倭子即倭奴 有日本琉球等國 [속칭 왜놈 즉 왜노는 일본 유구 등 나라에 있다]
1617년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서는 倭를 ‘예’로 해석하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효자도-중해성효」 池重海丹陽郡人倭寇驅掠 [디듕해는 단양군 사람이라 예도적이 마을흘 모라 노냑하거늘],
「효자도-반전탈부」 潘賟安陰縣人洪武戊辰倭寇縣執父淑以歸 [반뎐은 안음현 사람이니 홍무 무진의 예 현의와 도적질하야 아비 숙이를 자바서 도라가거늘]
즉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倭의 음은 왜가 아닌 와였고 뜻은 ‘예’집단 즉 지금 우리가 말하는 왜집단이다. 강단유사사학이 예의 위치를 한반도 동해안이라고 소설을 쓰며, 왜와 예는 전혀 별개인 것처럼 말하지만 예와 왜는 같은 말이다.
당산지역의 해안가에 이주한 왜는 삼조선 시기 예맥조선이라는 후국이 되는데 예집단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맥집단과 합하여 예맥조선이 되었다. 배달국이 처음부터 요서에 건국했다는 사실의 간접증거도 된다. 요동반도의 왜는 요동반도 普蘭店市에서 臨穢丞印이라 새겨진 인장이 발견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2022.2.10. 현재) 석탈해와 관련된다. 석탈해의 昔은 뜻이 예(옛)이다. 즉 석탈해는 예의 탈해란 의미다.
『삼국사』에 탈해는 다파나국 출신인데 다파나국은 왜국 동북 천리에 있다고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夲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하는데, 여기서 왜국은 황하 어귀의 왜이고,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의 왜이다. 황하 어귀의 왜는 서기전 128년에 漢에 투항한 예군 남려의 왜이다. 『한서』 「무제기」 元朔元年,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為蒼海郡
영산강 어귀의 왜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전한 후 육지에서 신라를 침공하는 왜이다. 이들은 209년 가야와 싸웠던 포상팔국이기도 하다. 『三國史』 「新羅本紀」 奈解 尼師今 十四年, 秋七月,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来請救. 王命大子于老與伊伐湌利音, 將六部兵徃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
포상(浦上)은 강어귀의 마을이란 뜻이므로 포상팔국은 영산강 어귀의 왜를 의미한다. 영산강의 왜는 399년 이후 한반도에서 상당수가 사라진다. 백제는 광개토대왕에게 반격하기 위해 온 국력을 기울였는데, 이에 지친 영산강 왜인들은 신라를 공격하라는 백제의 명령에 반항하여 집단적으로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광개토대왕릉 비문 399년조에, 내물왕이 왜인을 백성으로 삼아서 광개토대왕에게 보고했다고 기술되어 있고, 「광개토대왕릉비문」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內)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于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喜後稱) 其忠誠 □遣使還告以□計
『삼국사』에도 399년 거듭된 전투로 징집이 증가하여 백성들이 신라로 달아나 호구가 줄어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 「百濟本紀」 阿莘王 八年, 秋八月, 王欲侵髙句麗, 大徴兵馬.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滅.
「일본서기」에 120현민이 신라로부터 403년부터 405년 사이에 열도로 이주하였다고 윤색을 가미하여 기록되어 있는데, 최재석, 『백제의 대화왜와 일본화 과정』, 일지사, 1991. 59-78쪽. 최재석은 67쪽에서 399년에 신라에 항복한 왜인들이 403년과 405년에야 열도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의 방해 가능성도 있지만 이주규모가 커서 그랬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후술하듯이 광개토대왕의 명령으로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로 보내진 것으로 본다.
이는 399년 신라로 항복한 왜인들이 결국에는 열도로 보내진 사실을 말하며, 「일본서기」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중의 하나이다. 그 이후로 전라도에서 신라 내륙을 공격하는 왜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양자강 어귀의 왜는 『사기』 「오태백 세가」와 「월왕구천 세가」에서 알 수 있다. 오태백은 고공단보가 계력의 아들 창을 왕으로 하려 함을 알고 오랑캐의 땅으로 가서 문신단발하여 왕이 될 수 없음을 보이고 계력을 피하였다 『사기』 「오태백 세가」 吳太伯,太伯弟仲雍,皆周太王之子,而王季歷之兄也。季歷賢,而有聖子昌,太王欲立季歷以及昌,於是太伯、仲雍二人乃犇荊蠻,文身斷髮,示不可用,以避季歷
하며, 월왕 구천의 선조는 우(禹)의 후예로 하후제소강의 서자였는데, 회계(會稽)에 봉해져 우의 제사를 받들었고, 문신을 하고 단발을 하였으며, 수풀을 제거하고 성읍을 만들었다 『사기』 「월왕구천 세가」 越王句踐,其先禹之苗裔,而夏后帝少康之庶子也。封於會稽,以奉守禹之祀。文身斷髮,披草萊而邑焉。後二十餘世,至於允常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조는 “남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문신을 한다. 옛날부터 그 사신들이 중국으로 왔는데, 모두 스스로 대부라고 칭하였다. 하후소강의 아들이 회계(會稽)에 봉해지자,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하여 교룡(蛟龍)의 해를 피하였다. 지금 왜(倭)의 수인(水人)은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와 조개를 잘 잡는데, 문신은 원래는 큰 물고기와 바다짐승을 피하려는 것이었으나, 후에 점차 장식이 되었다”라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 自古以來, 其使詣中國, 皆自稱大夫. 夏后少康之子封於會稽, 斷髮文身以避蛟龍之害. 今倭水人好沈沒捕魚蛤, 文身亦以厭大魚水禽, 後稍以爲飾.
또한 『梁書』 「동이전」 왜국조도 “왜는 스스로 말하기를 태백(太伯)의 후예라고 한다. 풍속으로는 모두 문신을 한다”라 한다. 『梁書』 「동이전」 倭者, 自云太伯之後. 俗皆文身.
이로부터 오와 월은 왜를 기반으로 형성된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韓의 남쪽이 倭와 접경하며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고 하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여기의 왜도 양자강 어귀의 왜를 말한다.
이상의 사실은 조선의 역사설화의 사실성을 다시 한 번 입증한다. 기존의 견해는 예가 북만주, 두만강, 연해주 등지로 이동한 것으로 보는데 이곳은 환국의 영역이므로 왜가 정착할 수 없다. 범이 설화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배달국에서 생활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즉 이들은 기존의 농경과 수렵어로에서 농경과 수렵지역을 배달국에게 뺏겨 어로만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쟁이 있었고 범집단이 전쟁에서 졌을 수도 있다.
어떻든 농경과 수렵지역을 상실하여 세력이 약화된 상태로 다른 집단의 영역에 진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특히 농업혁명을 더 일찍 성공시킨 환국의 영역으로 진출하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남는 가능성은 기존의 어업 중 바닷가이고, 당시 기술상 연안어업을 해야 하는데,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은 영양분이 많아 어자원이 풍부하고, 회유성 어종의 길목이므로 범집단은 강어귀 부근에 거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예집단을 의미하는 집단 명칭으로의 왜와 열도를 의미하는 지역 명칭인 왜는 구별하여야 한다. 『삼국사』에 왜여왕 비미호가 173년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고 『三國史』 「新羅本紀」 阿達羅 尼師今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기술되어 있는데, 비미호가 남동생과 통치하였다는 『삼국지』의 기록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 事鬼道, 能惑衆, 年已長大, 無夫壻, 有男弟佐治國.
김해김씨선원보략(金海金氏璿源譜略)의 신녀와 함께 떠난 거등왕의 아들 선의 기사로 김해김씨선원보략(1914년 金龍奎편) 「수로왕과 왕후 허씨 사이에는 十子가 있었다. 長子는 太子(居登王)요 二子는 왕후의 姓을 따라 許氏가 되고 七子는 염세상계(厭世上界)하고 一子 거칠(居柒)은 군(君)에 봉해져 거칠군(居漆君)으로 칭했다. 거등왕의 아들 선(仙)은 진세(塵世)가 쇠함을 보고 신녀(神女)와 함께 승운이거(乘雲離去)하였다.」
보아 비미호는 구주에 있는 가야의 수장으로 봄이 타당하므로 예(왜) 집단과는 무관하다.
백제는 일찍부터 열도 소국의 자치는 인정하였지만 담로를 통해 무역권을 장악하고 간접지배하다가 광개토대왕의 공격 이후 열도 경영을 강화하면서 열도를 왜왕이라는 행정관료의 관할하에 두는데 이것도 지역명칭으로서의 왜이다.
당시 열도에서도 왜집단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고,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계의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경상도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거나, 혼인을 제안하거나, 인질을 받는 왜는 예(왜)집단의 정치체가 아니라 신라 초기에는 열도가야이고 광개토대왕이 열도를 정벌한 무렵에는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안라국으로 추정)이다. 열도가 왜로 불리게 된 것은 어업집단인 왜가 소규모이더라도 가장 먼저 열도로 이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예를 왜와 나누어 서술하는데 진수가 살던 당시 황하 어귀의 왜와 당산 해안가 왜 등 왜인들도 농경을 하면서 주위의 농경민과 비슷하게 되어 진수가 책에서 본 물고기 잡는 왜와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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