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라의 건국은 韓에서 있었던 사건

역사회복 2023. 2. 12. 07:08
 
『삼국사』는 서나벌의 건국세력이 조선의 유민인 辰韓 6부라고 명시한다.

『三國史』 「新羅本紀」 赫居世 居西干 元年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髙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徃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歳,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시조의 성은 박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년 4월 병진일(일설에는 정월 15일)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하니 13세였다. 국호를 서나벌이라 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의 유민이 골짜기에 나누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는데, 알천 양산촌, 돌산 고허촌, 취산 진지촌(혹은 간지촌이라 한다), 무산 대수촌, 금산 가리촌, 명활산 고야촌이다. 이들이 진한 6부가 되었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보니 나정 옆 숲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가서 보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 길렀는데 십여 세가 되자 쑥쑥 커서 일찍 성인이 되었다.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 여겨 떠받들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세웠다.]

마한에 사신으로 간 호공은 조선의 유민을 辰韓의 유민이라고 『삼국사』 「신라본기」 혁거세왕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구체화한다.

요동고새 북쪽은 과거 辰朝鮮이었으므로 예맥조선의 유민은 자신들을 辰韓이라 하였다. 열국시대 때 진조선 지역에는 북부여와 예맥조선이 병립하였다. 서로 辰國이라 주장했을 것이므로, 왕검성 사람들은 예맥조선이 辰韓(辰國)이라 생각하여 자신들을 辰韓의 유민이라 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항상 그러하듯이, 근거도 없이 그들의 소설에 불부합하는 ‘辰韓의 遺民’이란 사서의 기록을 부정한다. 그들은 임나선생님을 받들기 위해 김부식이 오해하여 유민이라고 잘못썼다고 우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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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호공이 마한으로 사신으로 가는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2.16.현재)

진한(辰韓)의 유민: 여기서의 진한의 유민은 혁거세 출현 이전에 경주 분지에 산재해 있던 6촌의 주민들을 가리킨다. ‘유민(遺民)’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신라의 건국과 함께 진한은 사라졌다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는데, 실제 사실과는 어긋나는, 후대 사관의 오해에 따른 와전(訛傳)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강종훈, 2011, 「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삼국사기 사료비판론』, 여유당,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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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국(斯盧國)이 진한 소국들을 복속시켜 신라가 되었다고 문학을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2022.5.16.현재)

신편한국사 7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2. 성립과 발전 > 3) 발전 > (2) 진한 소국의 복속

그러나 辰韓 즉 예맥조선은 망했으므로 그들은 번한 지역인 韓에 망명하여 자신들을 진한의 유민으로 인식하였다. 辰韓 12국은 서기전 24세기에 요서 하북성 산서성에 있었던 국가들로 신라와 직접적 관계가 없다. 辰韓을 구성하는 사로라는 소국이 辰韓을 통합하여 신라라는 고대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은 사료상의 근거가 전혀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또 그들은 ‘조선의 유민’의 조선을 고조선으로 날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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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신라본기」 박혁거세 즉위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5.29.현재)

조선(朝鮮):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古朝鮮). 여기서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로서 위만조선을 가리킨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 인용된 『위략(魏略)』의 기사에 의하면, 위만조선 말기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동쪽으로 ‘진국(辰國)’으로 갔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한(漢)에 의해 위만조선이 멸망하던 때를 전후하여 많은 수의 유이민이 한반도 중·남부로 내려왔음을 알 수 있다. 경주 지역을 포함한 영남 지방 각지에서 B.C. 1세기 무렵으로 편년되는 고조선 계통의 유적·유물이 다수 확인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過程硏究』, 一潮閣, 73~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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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조선과 삼조선을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킨다. 『삼국사』와 『삼국유사』가 편찬된 고려시대에서 보면 조선과 고조선은 전혀 다른 말이다.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명확히 다른 나라로 기술하고 있는데, 고조선에 대해선 『위서(魏書)』가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였다. 나라를 개창하여 조선(朝鮮)이라 했으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이다”라고 기술했다고 하며, 『삼국유사』 「기이」 古朝鮮 王倹朝鮮, 魏書云, “乃徃二千載有壇君王倹立都阿斯逹. 経云無葉山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開國號朝鮮, 與髙同時.”

위만조선에 대해선 『사기』를 인용하여 진번조선과 예맥조선에 관한 사항을 기술하고 있다. 이승휴도 『제왕운기』에서 우리 역사의 흐름을 단군의 전조선(前朝鮮), 기자의 후조선(後朝鮮), 위만(衛滿)의 찬탈 순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제왕운기』 설명 (2022.5.29. 현재)

제시하고 있어, 고조선과 예맥조선을 달리 보고 있다. 고조선은 대부여 이전의 조선을 말하고, 신라를 건국한 세력은 예맥조선(소위 위만조선)의 유민이다. 『삼국사』도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고 하여 예맥조선 이전의 조선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천왕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강단유사사학은 고조선과 『삼국사』의 조선은 전혀 다른 나라임에도 예맥조선을 고조선으로 만들어 일제의 교시에 충성한다.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韓으로 이주하였던,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사람들은 망한 진번조선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상하장에서 연나라의 지배 하에 살아가다 秦나라의 苦役을 피하여 韓으로 도주했을 것이다. 秦나라의 苦役을 피한 사람들이 왔을 때는 韓 지역은 번한이거나 예(예군 남려의 선대)가 집권한 시기일 것이어서 중마한이 동쪽 땅을 줄 수 없으므로, 마한으로부터 동쪽 땅을 받았다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것은, 예맥조선이 漢에 망한 후 왕검성 사람들이 낙랑군으로 강제 이주될 때 망명한 사람들이 辰韓 6부와 신라 건국의 주축이었음을 의미한다. 북제 수 당은 신라왕들을 낙랑군공으로 봉한다. 『三國史』 「新羅本紀」 眞興王 二十六年, 春二月, 北齊武成皇帝詔, 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

『三國史』 「新羅本紀」 眞平王 十六年, 隋帝詔, 拜王爲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三國史』 「新羅本紀」 眞平王 三月, 唐高祖降使, 冊王爲柱國·樂浪郡公·新羅王 등 다수의 기사가 있다.

중국의 나라들이나 신라 모두 신라가 예맥조선에서 기원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려 태조도 장녀를 경순왕과 혼인시키고 낙랑공주라 하였다. 『삼국유사』 「紀異」 낙랑국(樂浪國) 新羅人亦以稱樂浪故今本朝亦因之而稱樂浪郡夫人, 又太祖降女於金傅亦曰樂浪公主. [신라인 또한 스스로 낙랑이라 칭했으므로 지금 고려에서도 이로 말미암아 낙랑군부인이라고 불렀다. 또 태조가 김부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또한 낙랑공주라 했다]

 

마한에 쫓긴 韓의 원 거주자인 변한이 서기전 39년 辰韓(신라)과 통합하여 『삼국사』 「신라본기」 혁거세왕, 十九年, 春正月, 卞韓以國來降.

변진이 되었다.

번한 12국도 서기전 24세기의 일이며 이 때의 변한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다. 또 예(왜)가 합류한다. 서기전 20년 마한에 사신으로 간 호공은 왜인으로 바다를 건너온 사람인데, 『삼국사』 「신라본기」 혁거세왕, 38년, 瓠公者, 未詳其族姓, 夲倭人, 初以瓠繋腰, 度海而來, 故稱瓠公.

마한왕에게 “우리나라는 두 성인이 나라를 열고 일으킨 이래 인사가 잘 갖추어지고 천시가 조화로워 창고가 충실하고 인민은 공경하며 겸양하니, 진한(辰韓)의 유민으로부터 변한과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경외의 마음을 갖지 않음이 없습니다.”라고 한다. 『삼국사』 「신라본기」 혁거세왕, 38년,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 天時和, 倉𢈔充實, 人民敬讓,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강단유사사학은 신라가 경주의 마을국가라 하는데, 신라가 경주에서 건국했다면 평양의 낙랑이나 바다 건너의 왜가 혁거세왕을 알 수조차 없고, 멀리 강단유사사학의 소설 속에 있는 한반도 서남부 어딘가의 마한으로 사신을 파견할 필요도 없다. 서기 8년 남해왕은 탈해를 사위로 삼고 『삼국사』 「신라본기」 남해왕, 五年, 春正月, 王聞脫解之賢, 以長女妻之.

대보로 등용하여 군국(軍國)의 정사를 맡기며, 『삼국사』 「신라본기」 남해왕, 七年, 秋七月, 以脫解爲大輔, 委以軍國政事.

서기 57년에는 탈해가 왕이 되는데, 『삼국사』 「신라본기」 탈해왕, 脫解尼師今立

탈해는 왜국 동북 천리에 있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사람으로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의 왜이다. 탈해왕은 서기 58년 왜인으로 추정되는 호공을 대보로 삼았으며 『삼국사』 「신라본기」 탈해왕, 二年, 春正月, 拜瓠公爲大輔.

서기 59년 왜와 우호관계를 맺는다. 『삼국사』 「신라본기」 탈해왕, 3년 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석탈해의 昔은 뜻이 예(옛)이다. 즉 석탈해는 예의 탈해란 의미다. 『삼국사』 신라 초기에 나오는 호공과 탈해는 한 사람이 아니다. 예계 세력 중 재상급을 호공이라 하고 왕급을 탈해로 지칭하고 있다. 『양직공도』는 신라가 때로는 韓에 속하고, 때로는 倭에 속하였다고 하는데, 『양직공도』 本東夷辰韓之小國也 魏時曰新羅 宋時曰斯羅 其實一也 或屬韓或屬倭 國王不能自通使聘

이는 신라가 弁辰(韓)과 왜가 연합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59년 겨울에 韓에서 경상도로 이동하는데, 서기전 28년, 『三國史』 「新羅本紀」 赫居世 居西干 30년 樂浪人將兵來侵. 見邊人夜户不扃, 露積被野, 相謂曰, “此方民不相盗, 可謂有道之國. 吾儕濳師而襲之, 無異於盗, 得不愧乎.” 乃引還.

서기 4년, 『三國史』 「新羅本紀」 南解 次次雄 元年, 秋七月, 樂浪兵至, 國金城數重, 王謂左右曰, “二聖弃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今鄰國來侵, 是孤之不德也, 爲之若何.” 左右對曰, “賊幸我有喪, 妾以兵來, 天必不祐. 不足畏也.” 賊俄而退歸.

서기 14년, 『三國史』 「新羅本紀」 南解 次次雄 十一年, 倭人遣兵舩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樂浪謂内虚, 求攻金城甚急. 夜有流星墜於賊營, 衆懼而退, 屯於閼川之上, 造石堆二十而去. 六部兵一千人追之, 自吐含山東至閼川, 見石堆知賊衆, 乃止

서기 36년 『三國史』 「新羅本紀」 儒理 尼師今 十三年, 秋八月, 樂浪犯北邊, 攻䧟朶山城

낙랑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동 전 신라가 접하는 낙랑은 낙랑 동부도위이다. 동부도위는 서기 30년에 폐지되므로 서기 36년의 것은 그 잔당의 침략이라 볼 수 있다. 서기 36년 침입 기사는 낙랑군이 북쪽에서 침입했다고 하므로 신라의 북쪽은 동부도위이며, 서기 14년에 왜인이 바닷가 민가를 노략질했다 『三國史』 「新羅本紀」 儒理 尼師今 十一年, 倭人遣兵舩百餘艘, 掠海邊民戶. 發六部勁兵以禦之

하므로 신라의 동쪽은 바다이다.

낙랑군 본군이 서기 37년 고구려에 점령되고 낙랑 사람 5천명이 의탁해 온다. 『삼국사』 「신라본기」 유리왕 十四年,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其國人五千來投, 分居六部.

그 후에 화려와 불내가 서기 40년에 신라를 공격하자 맥국으로 표시된 고구려가 낙랑군의 잔당으로 보아 물리쳤다. 『三國史』 「新羅本紀」 儒理 尼師今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河西, 敗之. 王喜, 與貊國結好.

『한서』 「지리지」 낙랑군조에 의하면 화려(華麗)와 불이(不而)는 낙랑군 동부도위 소속이었던 현이다. 『한서』 「지리지」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縣二十五:朝鮮,䛁邯,浿水,水西至增地入海。莽曰樂鮮亭。含資,帶水西至帶方入海。黏蟬,遂成,增地,莽曰增土。帶方,駟望,海冥,莽曰海桓。列口,長岑,屯有,昭明,南部都尉治。鏤方,提奚,渾彌,吞列,分黎山,列水所出,西至黏蟬入海,行八百二十里。東暆,不而,東(郡)〔部〕都尉治。蠶台,華麗,邪頭昧,前莫,夫租

 

이 당시의 신라는 바닷가의 소국이었다. 신라는 마한왕이 사신을 모욕해도, 낙랑군 동부도위가 침략해도 보복하지 못한다. 동부도위 잔당이 공격해도 두려워하다 고구려가 구해주니 매우 고마워한다. 『隋書』에 “신라왕은 본래 백제인이다. 바다로 도망쳐 신라에 들어가면서부터 마침내 신라인이 그 나라를 통치하였다.”라 기록되어 있다. 『隋書』 「東夷列傳」 新羅, 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

백제인이 왕이라는 말은 韓이 마한의 세력권에서 백제의 세력권으로 바뀐 후의 상황을 기술한 말이다.

『태백일사』는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진한의 나을촌으로 가 그 아들이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斯盧始王, 仙桃山聖母之子也。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不夫而孕。為人所疑, 自嫩水逃至東沃沮, 又泛舟而南下, 抵至辰韓奈乙村。時, 有蘇伐都利者聞之, 往收養於家。而及年十三, 歧嶷夙成, 有聖德。於是, 辰韓六部共尊, 為居世干。立都徐羅伐, 稱國辰韓, 亦曰斯盧。

고두막국이 서기전 58년 동부여 금와에 의해 멸망당하므로 그 일족이 韓으로 도망와서 辰韓 6부의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辰韓 6부는 여섯 마을에 불과하여, 강하지 않은 세력으로도 이들의 왕이 될 수 있었으며, 辰韓 6부는 중마한으로부터 망명자들이라 무시 당하고 있었으므로, 일시적으로라도 辰國의 지배자였던 고두막의 혈족을 구심점으로 삼아 나라를 만들어 중마한과 맞서보려는 욕구가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