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알지의 계림국은 대구. 경상도 신라는 韓에서 온 석씨 박씨세력과, 김일제 후손인 김알지 세력의 결합

역사회복 2023. 2. 12. 13:16
 
신라는 김알지의 계림국과 통합한다. 그 시기에 대해 『삼국사』는 서기 65년, 『삼국유사』는 서기 60년이라고 한다.

(ㄱ)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9년 03월 (65년 03월(음))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九年,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竒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聦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탈해왕 9년(65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니, 왕이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다가 열어보았다.

작은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모습이 뛰어나고 훌륭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좋은 후계를 보낸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에 성을 김(金)씨라고 하였다.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이라고 바꾸었는데, 이로 인해 계림이 국호가 되었다.

(ㄴ) 『삼국유사』 「기이」 김알지 탈해왕대(金閼智 脫解王代)

『삼국유사』 「기이」 金閼智 脫解王代, 永平三年庚申 (一云中元六年誤矣, 中元盡二年而已) 八月四日瓠公夜行月城西里見大光明於始林中, (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樻掛於樹枝光自樻岀, 亦有白雞鳴於樹下. 以状聞於王. 駕幸其林開樻, 有童男卧而即起. 如赫居世之故事故因其言以閼智名之. 閼智即郷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烏獸相隨喜躍蹌蹌. 土擇吉日冊位太子, 後讓故婆娑不即王位.

영평(永平) 3년(60년) 경신(庚申) [한편으로 중원(中元) 6년(61년)이라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총 2년으로 끝났다] 8월 4일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가는데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의 가운데 크고 밝은 빛이 있으며,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쳐 내려온 것을 보았다.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있는데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빛은 상자로부터 나오며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그대로 이것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친히 숲에 나가서 그 상자를 열어 보니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누워있던 [아이가] 바로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의 고사와 같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였다. 알지는 우리 말[鄕言]로 아이[小兒]를 일컫는 말이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궁으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며 기뻐하면서 춤추고 뛰어 놀았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책봉했으나 후에 [알지는 그 자리를] 파사(婆娑)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문무대왕릉비문」과 「문무대왕릉비문」 秺侯祭天之胤傳七葉以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대당고김씨부인묘명」 遠祖諱日磾自龍廷歸命西漢仕武帝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삼국사』 「김유신열전」은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가 같은 성이라 하며, 『삼국사』 「김유신열전」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삼국유사』는 문무왕이 김수로왕도 자신의 15대 시조라며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한다. 『삼국유사』 「기이」 洎新羅第三十王法敏龍朔元年辛酉三月日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九代孫仇衝王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率友公之子庻云匝干之女文明皇后寔生我者. 兹故元君於㓜冲人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曽敗, 所葬廟者今尚存, 合于宗祧續乃祀事.”

즉 김수로왕과 김알지(신라 김씨)는 성이 같다.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新을 건국하였다가 『한서』 「김일제 열전」 當母 南即莽母功顯君同產弟也.

新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는 함께 한반도로 도피하였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는 한반도로의 도피를 “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어려운 때를 피해 멀리까지 갔다. 그리하여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 及漢不見德亂離瘼矣握粟去國避時屆遠故吾宗違異於遼東

 

김수로가 서기 42년에 가야를 건국한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 後漢世祖光㱏帝建㱏十八年壬寅三月禊洛之日, 『삼국사』 「김유신열전」 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것을 고려하면, 김수로와 김알지는 빠르면 20년대 중반 늦어도 30년대 초반에는 한반도로 건너왔다고 보아야 한다. 新이 서기 23년 이후 혼란스러워지고 유수가 서기 36년에 중국을 평정하므로 30년대 이후 중국에 남아 있으면 위험하며, 한반도에 와서 토착세력과 협상이나 전쟁을 통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삼국사』와 『삼국유사』는 호공이 김알지와 탈해왕 사이를 오간다고 하는데 이는 두 집단간의 관계 정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합 협상은 『삼국유사』가 말하는 60년에 시작되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금궤 즉 김알지 집단은 계림(鷄林)의 나무에 걸려 있었고 나무 아래 닭이 울고 있었는데, 이는 김알지 집단이 달구벌 https://m.blog.naver.com/dwjeon5656/221605472534 (2022.2.12. 현재) “1907년 제작된 대구시가전도를 살펴보면 조선 3대 시장이었던 서문시장에 닭 전곡(廛谷)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규모도 전체 조선시장규모의 3분의 1이었다.”

즉 닭벌판인 대구에 이미 와 있었고 국호가 계림이었음을 의미한다. 『삼국유사』도 탈해가 계림의 국경으로 달아났다고 기술한다. 두 집단간 통합협상은 지지부진하다가, 서기 64년 백제가 신라를 두 차례나 공격하자 신라가 다음 왕위와 국호까지 양보하면서 서둘러 서기 65년에 통합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 집단이 통합하여 백제로부터 독립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음 왕을 김씨가 차지하지 못하므로 이 때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 김씨는 힘을 키워 나중에 신라 왕권을 장악한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