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군 공방 후 『삼국사』의 신라 기록엔 300년까지 낙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三國史』 「新羅本紀」 基臨 尼師今 3년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两國歸服. [〔3년(300)〕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양국이 항복하여 복속해 왔다.] 예부여 일부가 韓을 떠나 신라와 열도로 이주하였는데, 이 기사는 신라로 귀순한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동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경상도 이동을 기술하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ㄱ)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57년 11월 (음))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夲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 不祥也. 冝弃之.” 其女不忍, 以帛裹卵并寳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徃.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繋海岸, 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 身長九尺, 風神秀朗, 智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冝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冝名脫解.”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일설에는 토해(吐解)라고도 한다. 이때 나이가 62세였다. 왕비는 아효(阿孝) 부인이다. 탈해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에서 태어났다. 그 나라는 왜국(倭國)의 동북 1,000리에 있다. 처음에 그 나라 왕이 여국(女國) 왕의 딸을 맞아 아내로 삼았는데, 임신한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았다. 왕이 말하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것은 상서롭지 않다. 마땅히 버려야겠다.”라고 하니, 그 여자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고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더불어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가는 대로 가게 하였다. 처음에 금관국(金官國)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취하지 않았다. 다시 진한(辰韓)의 아진포구(阿珍浦口)에 이르니, 바로 시조 혁거세(赫居世) 재위 39년(서기전 19년)의 일이었다. 이때 바닷가의 할멈이 줄로 끌어서 바닷가에 매어두고 궤짝을 열어서 보니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 있었다. 할멈이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니 신장이 9척이나 되었고, 풍채가 빼어나며 지식이 남달랐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 아이는 성씨를 알지 못하는데, 처음 궤짝이 왔을 때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울며 따라 다녔으므로, 까치 ‘작(鵲)’의 글자를 줄여서 ‘석(昔)’으로 씨(氏)를 삼고, 또 궤짝을 열고 나왔으므로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ㄴ) 『삼국유사』 「기이」 탈해왕
『三國遺事』 「紀異」 第四 脫解王 脫解齒叱今 一作吐解尼師今. 南解王時 古夲云壬寅年至者謬矣. 近則後於弩礼即位之初無爭讓之事, 前則在於赫居之世, 故知壬寅非也.駕洛國海中有舩來泊. 其國首露王與臣民鼓譟而迎将欲留之, 而舡乃飛走至於雞林東下西知村阿珎浦 仐有上西知下西知村名
탈해치질금 (한편 토해니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남해왕(南解王) 때 (고본에 임인년(壬寅年)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오류이다. 가깝게는 노례왕의 즉위 이후이므로 양위를 놓고 다투던 일이 없게 되며, 그 이전에는 혁거세의 재위기이므로 임인년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가락국의 바다에 어떤 배가 와서 닿았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신하 및 백성들과 더불어 북을 치고 환호하며 맞이해 장차 가락국에 머무르게 하려 했으나 배가 급히 나는 듯이 달려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 아진포 (지금도 상서지와 하서지촌명이 있다)에 이르렀다.
(ㄷ) 『삼국유사』 「기이」 가락국기
『三國遺事』 「紀異」 忽有琓夏國含逹王之夫人妊娠, 旀月生卵, 卵化爲人名曰脫解. 從海而來. 身長三尺頭圎一尺. 恱焉詣闕語於王云, “我欲奪王之位故來耳.” 王荅曰 “天命我俾即于位將令安中國而綏下民, 不敢違天之命以與之位, 又不敢以吾國吾民付囑於汝.” 解云 “若爾可爭其術.” 王曰 “可也.” 俄頃之間解化為鷹, 王化為鷲又解化為雀王化為鸇. 于此際也寸隂未移. 解还夲身王亦復然. 解乃伏膺曰, “僕也適於角術之場鷹之鷲, 雀之於鸇獲免焉, 此盖聖人惡殺之仁而然乎. 僕之與王爭位良難.” 便拜辝而出, 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王竊恐滯留謀亂, 急發舟師五百艘而追之, 解奔入雞林地界, 舟師盡還. 事記所載多異與新羅.
이때 갑자기 완하국(琓夏國) 함달왕(含達王)의 부인(夫人)이 임신을 하여 달이 차서 알을 낳았고, 그 알이 화하여 사람이 되어 이름을 탈해(脫解)라고 하였다. 이 탈해가 바다를 따라 가락국에 왔다. 키가 3척이고 머리 둘레가 1척이었다. 기꺼이 대궐로 나가서 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왕의 자리를 빼앗고자 왔다”라고 하니 왕이 대답하였다. “하늘이 나에게 명해서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기고 왕위를 남에게 줄 수도 없고, 또한 우리나라와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탈해가 말하기를 “그러면 술법(術法)으로 겨루어 보겠는가”라고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잠깐 사이에 탈해가 변해서 매가 되니 왕은 변해서 독수리가 되었고, 또 탈해가 변해서 참새가 되니 왕은 변해서 새매가 되었다. 이때에 조금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탈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왕도 역시 전 모양이 되었다. 탈해가 이에 엎드려 항복하고 말하기를 “내가 술법을 겨루는 곳에서 매가 독수리에게, 참새가 새매에게 잡히기를 면하였는데, 이는 대개 성인(聖人)이 죽이기를 미워하는 어진 마음을 가져서 그러한 것입니다. 내가 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인교 변두리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뱃길로 나아가서 떠났다. 왕은 마음속으로 머물러 있으면서 난을 꾀할까 염려하여 급히 수군(水軍) 500척을 보내서 쫓게 하니 탈해가 계림(鷄林)의 국경으로 달아나므로 수군은 모두 돌아왔다. 여기에 실린 기사(記事)는 신라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ㄹ) 『북사』 「신라열전」
『북사』 「신라열전」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 ---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
신라는 고구려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는 낙랑땅을 차지하였다(낙랑땅에 있었다). --- 그 나라 사람은 중국·고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沃沮·不耐·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면서 마침내 독립하였다(그 나라를 통치하였다).
『삼국사』는 탈해가 금관국 해변에 닿았는데 금관국 사람들이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신라측 기록과 가야측 기록을 모두 전해 주는데, 신라측 기록은 수로왕이 환영하며 머무르게 하려 하였으나 배가 급히 달려 계림의 동쪽에 이르렀다고 하며, 가야측 기록은 탈해와 수로왕이 대결하여 탈해가 패배하였고, 수로왕은 이겼어도 안심이 안 되어 죽이려 하였으나 탈해가 도망갔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가야측 기록이 가장 사실과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수로왕이 자신의 권력을 내놓으면서 신라 세력을 받아 줄 리 없으므로, 당연히 어떤 형태로든 양자간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탈해가 가야를 떠나기로 결정된 후 ‘중국에서 온 배가 정박하는 뱃길’로 나아간 후 떠났다는 것은 신라 세력이 대륙(韓)에서 가야로 왔음을 말해준다.
백제는 중마한을 서기 8년에 정복하고, 『수서』의 기록대로 신라를 속국으로 만들었다. 『삼국사』에 온조왕이 서기 7년에 진한과 마한을 병탄할 결심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三國史』 「百濟本紀」 溫祚王 二十五年, 春二月, 王宫井水暴溢, 漢城人家馬, 生牛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并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并呑辰·馬之心.
신라는 독립하기 위해 한반도 남부에 정착지를 찾다, 가야에 발을 붙이려 하였으나 가야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한반도 동해안 경주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 서부는 이미 백제의 영역으로 확립되어 상륙할 수 없었다. 신라가 처음부터 경주에 있었다면 수로왕이 탈해를 환영하며 머무르게 할 이유도 없고, 탈해가 중국에서 온 배가 정박하는 뱃길로 갈 이유도 없다.
신라의 경주 이전 시기는 서기 59년 겨울이다. 농업집단이므로 가을에 수확하고 봄에 파종해야 하므로 겨울에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기 59년 5월 탈해왕이 왜와 우호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이 때는 韓에서 떠날 생각이 없었거나, 이주 시 어업세력인 왜의 방해를 막고 협력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서기 60년 8월에는 김알지 집단과 협상을 한반도에서 하며, 서기 61년에 마한의 장수 맹소가 복암성을 들어 신라에 항복하는데, 이 마한은 한반도 경상도의 마한이다. 말조선이 최씨 낙랑국에 의해 망한 뒤 신·말조선 소국들이 마한 모한 등으로 자칭하였음다. 강단유사사학은 경상도에 辰韓이 있었다고 날조하나 辰韓은 경상도에 없었다는 것도 맹소의 항복에서 알 수 있다.
서기 63년에는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낸다. 『三國史』 「百濟本紀」 多婁王 (63년 10월(음)) 三十六年, 冬十月, 王拓地, 至娘子谷城. 仍遣使新羅請㑹, 不從. [36년(63) 겨울 10월에 왕이 영토를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렀다. 곧 사신을 신라에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신라왕이〕 듣지 않았다]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7년 10월 (63년 10월 (음)) 七年, 冬十月, 百濟王拓地, 至娘子谷城, 遣使請㑹, 王不行. [7년(63)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영토를 넓혀 낭자곡성(娘子谷城)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가지 않았다]
백제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전하자 백제에 복속할 것을 종용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다. 당시 한반도 남부는 백제의 영토이거나 백제의 영향 하에 있었다. 가야나 다른 소국이 물론 있었겠지만 이들은 백제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고 복속된 상태였으므로 전쟁은 없었다. 백제는 신라도 백제에 복속하길 요구했으나 신라는 만남조차 거부했다. 신라가 거부하자 백제는 바로 서기 64년부터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八年, 秋八月, 百濟遣兵, 攻蛙山城. 冬十月, 又攻狗壤城. 王遣騎二千, 擊走之.
서기 66년,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十年, 百濟攻取蛙山城, 留二百人居守, 尋取之.
서기 70년,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十四年, 百濟来侵.
서기 73년(왜를 시켜서 신라를 공격),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十七年, 倭人侵木出㠀, 王遣角干羽烏禦之, 不克, 羽烏死之.
서기 74년,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十八年, 秋八月, 百濟寇邊, 遣兵拒之.
서기 75년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19년 冬十月, 百濟攻西鄙蛙山城, 拔之.
신라를 공격했으나 크게 이기지 못하였고, 신라가 서기 76년 당시 전쟁의 쟁탈지였던 와산성을 되찾은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二十年, 秋九月, 遣兵伐百濟, 復取蛙山城. 自百濟來居者二百餘人, 盡殺之.
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서기 77년에는 가야가 침입하였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二十一年, 秋八月, 阿湌吉門與加耶兵戰於黄山津口, 獲一千餘級. 以吉門為波珍湌, 賞㓛也.
이 전쟁도 백제의 사주에 의한 것일 수 있다. 신라는 탈해왕 때 김알지와 연합하여 백제의 세력권에서 벗어난 독립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백제의 중심지는 韓이었고 한반도는 백제 땅의 일부에 불과했으므로 한반도 전쟁의 결과만을 가지고 당시 신라의 국력을 백제와 비슷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강단유사사학은 초기 신라의 실체를 숨기고 낙랑군을 평양이라고 하기 위해, 항상 그렇듯이 고의로 오역을 한다. 『북사』와 『수서』는 동일한 내용으로 “地在高麗東南 居漢時樂浪地”(북사), “新羅國,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之地”(수서)이라 쓰고 있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이를 각각 “그 땅은 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중국정사조선전 관련 부분 번역 (2022.5.15.현재)
“新羅國은 高[句]麗의 동남쪽에 있는데, 漢代의 樂浪 땅으로서 斯羅라고도 한다.”라고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중국정사조선전 관련 부분 번역 (2022.5.15.현재)
번역한다. 이는 명백한 날조이다. 居가 ‘이다’란 뜻은 없다. 居는 ‘살다, 거주하다(居住--), 있다, 차지하다, (처지에)놓여 있다, (벼슬을)하지 않다, 자리 잡다’ 등의 뜻이 있다. 따라서 “신라는 고려 동남에 있다. 漢나라 때는 낙랑 지역을 차지하였다(낙랑에 있었다)”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어려운 문장이 아니므로 강단유사사학처럼 이해할 사람은 없다. 강단유사사학의 해석은 ‘고구려 동남=漢나라 때의 낙랑 지역’이라는 것으로, 신라의 이동은 없었고 漢나라 때는 경상도까지 낙랑군이었다는 의미이다. 혹시나 뒤에 “其王本百濟人,自海逃入新羅,遂王其國”(수서 북사 공통)이란 구절이 없으면 몰라도, 뒤에 신라의 이동을 설명하는 문장이 나오므로 居를 ‘이다’로 번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단유사사학이 이렇게 고의로 오역하는 것은 그들의 소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漢나라 때 신라가 평양에 있었다면 평양이 辰韓이 되어 임나를 영접하는 남삼한설이 붕괴되고, 그들 소설에 의하면 신라는 경주, 낙랑군은 평양인데, 신라가 평양이 되면 낙랑군은 평양에 있을 수 없게 되어 낙랑군 평양설도 붕괴된다. 위기의 순간 그들은 항상 억지를 쓰는데 여기선 고의로 오역을 하였다.
본고가 이 부분을 지적하였으므로 그들은 다음부터는 『북사』와 『수서』가 오류라고 주장할 것이다.
낙랑이 평양이라면 바다로 도망가서 경상도로 간다고 할 수 없다. 신라가 바다로 도망갔다는 것은 육로로 경상도로 가려면 고구려를 통하여야만 했던 곳에 초기 신라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는 낙랑군이 고구려 남쪽이고 중국에 있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 충성하기 위해 사서를 오역하여 경상도까지 낙랑군으로 만드는 그들의 가공할 문해력과 용기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낙랑군 평양설을 지키기 위해선 경상도까지 낙랑군에 내주어도 좋다는 그들의 과감한 결단력은 진정한 유사사학의 귀감이라 할 것이다. 중국은 이들에게 개똥이라도 주면서 이들의 지극한 충성심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漢나라 때 신라가 낙랑 땅에 있었다는 것은 본고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韓과 낙랑군과 낙랑군 동부도위, 신라의 위치를 본고와 같이 설명하지 않는 한 이 문장은 설명될 수 없다. 『북사』와 『수서』의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신라가) 沃沮·不耐·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라는 문구도 본고의 위치비정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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