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구려는 요동 오환이 건국

역사회복 2023. 2. 12. 20:39
 
오환과 선비는 북부여의 서쪽 후국이었으나, 흉노가 점령하여 복속시킨 지역이다. 이들은 메기장과 동장을 재배하고,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其土地宜穄及東牆。東牆似蓬草,實如穄子,至十月而熟

수렵과 목축을 하였다.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俗善騎射,弋獵禽獸為事。隨水草放牧

유철은 흉노를 쫓고 이들 오환인들을 요동외요 내부로 이주시키고 호오환교위를 설치하여 통제하였다. 『후한서』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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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오환선비열전」 烏桓自為冒頓所破,眾遂孤弱,常臣伏匈奴,歲輸牛馬羊皮,過時不具,輒沒其妻子。及武帝遣驃騎將軍霍去病擊破匈奴左地,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五郡塞外,為漢偵察匈奴動靜。其大人歲一朝見,於是始置護烏桓校尉,秩二千石,擁節監領之,使不得與匈奴交通

오환은 (흉노의) 묵돌에게 격파되면서부터 고립되어 약해졌기 때문에 늘 흉노에 복속하였다. 해마다 흉노에 소·말·양의 가죽을 바쳤는데, 날짜를 넘기거나 바치지 못하면 항상 처자식을 빼앗겼다. 무제가 표기장군 곽거병을 보내 흉노의 동쪽을 격파하고, 이들 오환인들을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오군의 새외지역에 이주시켜 漢을 위해 흉노를 정찰하도록 하였다. 이들의 대인은 해마다 한 번 황제를 알현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호오환교위를 설치하였는데, 녹봉은 이천석이었고, 부절을 지니고 오환의 무리를 감독하고 흉노와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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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외의 새는 요동고새이다. 요동외요의 바깥에 놓아두면 漢의 통제가 곤란해지고 오히려 외적을 가까이 두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오군이 새외 지역이라는 것은 요동고새 북쪽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 지역은 당시 유철이 예맥조선을 점령한 뒤 漢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 漢은 왕검성 등 예맥조선 사람들을 요동고새 내로 이주시키고 이들 오환인들로 대체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건국할 때 걱정한 말갈은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時朱蒙年二十二歳,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丗二十一年, 甲申歳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盗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二年, 春正月, 王謂羣臣曰, “靺鞨連我北境, 其人勇而多詐, 冝繕兵積穀, 爲拒守之計.”

이들 오환인들이다. 여기에서도 신조선 말조선 소국들을 말갈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순(선제 서기전 73년∼서기전 48년) 시기에도 오환이 漢에 귀부하여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由是烏桓復寇幽州,明友輒破之。宣帝時,乃稍保塞降附。 변경지역에 정착하였다.

왕망은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이들을 대군(代郡)에 주둔하게 하고 전쟁준비가 완료되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는데, 그 시간이 오래 걸리자, 이들은 도망가서 반란을 일으켰다. 『후한서』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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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오환선비열전」 及王莽篡位,欲擊匈奴,興十二部軍,使東域將嚴尤領烏桓、丁令兵屯代郡,皆質其妻子於郡縣。烏桓不便水土,懼久屯不休,數求謁去。莽不肯遣,遂自亡畔,還為抄盜,而諸郡盡殺其質,由是結怨於莽。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후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여 12부의 군대를 일으켜 동역장 엄우에게 오환과 정령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대군에 주둔하도록 하고 그 처자식은 모두 군현에 인질로 남겨두었다. 오환 사람들은 대군의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오랫동안 주둔하고 쉬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되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망이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달아나거나 반란을 일으켰고, 군현에 돌아와서는 약탈하고 도적질하였다. 그래서 여러 군에서는 인질들을 다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들은 왕망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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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환인에게 일어난 이 사건은 고구려에게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삼국사』와 『삼국지』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ㄱ) 『삼국사』 「고구려본기」

『삼국지』 「고구려본기」 유리왕,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伐胡. 吾人不欲行, 強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冦.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冝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獩貊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靳之, 傳首京師 (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騧, 斬之)” . 莽恱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冦漢邉地愈甚.

31년(12) 漢 왕망이 우리 병력을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려 하였다. 우리가 가려고 하지 않자 협박하여 보냈다. 모두 도망하여 나가 법을 어긴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임을 당하니, 주군(州郡)이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엄우가 진언하기를, “맥인이 법을 어겼으나, 주군으로 하여금 우선 저들을 위안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결국 배반할까 염려됩니다. 그러면 부여의 족속 중에 반드시 부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예맥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근심거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령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 그 목을 베어 머리를 경사(京師)로 보냈다. (양한서(兩漢書)와 남북사(南北史)에는 모두 “구려후(句麗侯) 추(騶)를 꾀어내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며 우리 왕을 하구려후라 고쳐 이름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漢의 변방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ㄴ)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不欲行,彊迫遣之,皆亡出塞為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之,為所殺。州郡縣歸咎于句麗侯騊,嚴尤奏言:「貊人犯法,罪不起于騊,且宜安慰。今猥被之大罪,恐其遂反。」莽不聽,詔尤擊之。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莽大悅,布告天下,更名高句麗為下句麗

왕망 초 고구려의 병사를 징발하여 호를 정벌하게 하였다.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나가 도적이 되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살해되었다. 州·郡·縣이 그 책임을 句麗侯 騊에게 돌렸다. 엄우는 “맥인이 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그에게 큰 罪를 씌우면 그가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라고 아뢰었다. 王莽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엄우는 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長安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天下에 포고하여 高句麗란 國號를 바꾸어 下句麗라 부르게 하였다.

위 『삼국지』와 『삼국사』의 기사를 비교하면 『삼국지』의 기사가 문맥이 자연스럽다. 『삼국사』의 기사는 추를 연비로 바꾸기 위해 문장을 변경한 느낌을 준다. 흉노를 고구려 단독으로 공격하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므로, 고구려가 호를 정벌하게 하였다는 말은 오환처럼 고구려 병사를 대군에 주둔시켰다는 말이다. 가려고 하지 않자 협박하여 보냈다는 말도 오환처럼 주둔지에서 보내달라 하였는데 보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오환과 별도로 기술한 것은 오군에 이주시킨 오환 중 고구려만 나중에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진번조선 등 辰朝鮮 지역의 조선인을 동호라 기술하였고, 『삼국지』 『후한서』 모두 오환과 선비가 동호라고 기술하고 있다.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烏桓者,本東胡 也,--- 鮮卑者,亦東胡之支也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烏丸、鮮卑即古所謂東胡 也

흉노가 동호를 멸하고 복속시켰다고 하는데, 『사기』 「흉노열전」 及冒頓以兵至,擊,大破滅 東胡 王,而虜其民人及畜產。

이는 흉노가 북부여 서쪽을 점령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漢이 이주시킨 오환은 흉노에 복속된 북부여 서쪽의 조선인이다. 현도군이 고구려현에 설치되었으므로 고구려는 그 위치로 보아 진번조선의 지방세력인데, 전술하였듯이 진번조선이 망하자 일부 세력이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북부여가 고두막에 의해 가섭원으로 쫓겨나고, 쫓겨나서도 금와에 의해 찬탈당하는데, 추모는 동부여 즉 북부여의 왕족이었으므로 금와가 집권한 동부여의 세력이 닿지 않는 漢으로 도망쳤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오환이나 추모나 모두 북부여인이었고, 추모는 북부여의 왕족이었으므로, 홀본 즉 요동군에서 요동군 내 오환인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을 것이고 漢도 오환인의 관리를 위해 추모를 요동군 내 오환인의 지도자로 인정하였을 것이다.

즉 고구려는 漢에 귀부한 오환인의 자치체에서 기원한다. 漢이 예맥조선을 멸하고 고구려에 현도군 고구려현을 설치하고 상은태 서개마현은 실효지배하지 못했으므로 현도군의 유일한 현이 고구려현이다.

북(鼓)과 管樂器와 樂工을 하사하여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 武帝滅朝鮮,以高句驪為縣,使屬玄菟,賜鼓吹伎人

고구려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추모는 요동군 성산에 도읍하고, 현도군의 동쪽 경계에 있는 책구루(幘溝漊)에서 의책을 받아갔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于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為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

후술하듯이 여율왕 때인 서기 14년 현도군 고구려현을 점령하므로, 요동오환을 기반으로 건국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漢은 다른 군의 오환인과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흉노, 동부여, 행인국 등의 漢 주변세력을 통제하는데 이용하였다. 엄우가 고구려를 공격하면 부여의 족속 중에 부응하는 자가 생길 수도 있다 걱정하는데, 이는 고구려가 오환인이고, 오환인이 북부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연타발과 소서노는 요동군내 조선인 상인이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延佗渤, 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 而理財致富, 至累巨萬。陰助朱蒙, 其創基立都之功, 居多。後, 率衆, 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 及高朱蒙聖帝, 伐北沃沮, 納穀五千石。移都訥見, 而先自願納, 招撫流亡, 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 而年八十。時, 平樂十三年, 丙申, 春三月也。

데릴사위였던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후에 우태로 표현됨)가 죽자 상업의 편의를 위해 요동군 오환인의 지도자였던 추모와 결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비류시조설은 우태가 해부루의 서손이라 하나, 북부여 해부루의 서손이 漢 땅에 정착할 이유가 없으며, 서손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소서노, 비류, 온조는 주몽의 건국과정을 지켜보고 배웠기 때문에, 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다.

유리왕이 후처로 하희와 치희를 두었는데, 치희는 漢人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3년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以繼室. 一曰禾姬, 鶻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涼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爭闘.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 亡歸. 王聞之, 䇿馬追之, 雉姬怒不還. 王甞息樹下, 見黄鳥飛集, 乃感而歌曰, “翩翩黄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이는 당시 고구려가 漢人과 섞여서 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초기에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았고 고구려령의 관리를 받았다는 것,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于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為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

왕망이 고구려의 병사에 대해 지휘권이 있었다는 것, 엄우가 고구려 왕을 부를 수 있었다는 사실 모두 고구려가 漢에 귀부한 오환인이었음을 입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현도군에서 조복과 의책을 고구려 지방세력에게도 주었다고 날조 해석하여 고구려의 중앙권력이 약했다고 문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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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지』 관련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3.23. 현재)

漢時賜鼓吹技人 : 여기에서 鼓吹技人을 받은 대상은 고구려왕이다. 漢帝國이 주변 諸集團의 首長에게 鼓吹와 旗 등을 賜與하는 것은 封爵하여 印綬를 주는 것과 함께 漢의 세력권에 歸服한데 대한 댓가로 그 首長에게 한제국의 권위를 부여하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널리 행해졌다. A.D. 136년에 夫餘王이 직접 來朝하였을 때도 그에게 黃門鼓吹 등을 주어 귀국케 하였다. 또한 한국의 古代 諸種族들 간에는 崔理의 樂浪國의 自鳴鼓說話나 東明王과 松讓王이 鼓角을 가지고 각기 自國의 위엄을 다투었다는 東明王說話 등에서 보듯이 북(鼓)은 단순한 樂器가 아니라 呪術的인 위력을 지닌 祭器로서 국가와 王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만큼 鼓吹는 곧 王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漢은 고구려왕에게 鼓吹技人을 주어 고구려의 대표로서의 위치를 인정하였지만, 일면으로는 고구려 내의 여러 집단들과 각각 交易關係를 맺어 朝服과 依幘을 주면서 이들 집단들과 개별적인 교섭을 하여 회유하였다. 그에 따라 그들 집단에서 보내진 이들이 玄菟郡에 나아가 교섭을 하니, 玄菟郡의 관리인 高句麗令이 그에 관계된 사항을 관장하였다. 『三國志』 韓傳에서 전하듯 漢郡縣에 나가 朝服과 印綬를 받은 韓人이 千餘人이나 되었다는 것도 당시 中國郡縣의 그러한 정책의 소산이다. 그 결과 비록 서기전 75년 이후 고구려가 漢郡縣의 직접적인 지배하에서는 벗어났으나 고구려 내의 諸集團들은 제각기 漢과 연결되는 면을 지녀 일종의 遠心分離現象을 낳았다. 이로 말미암아 王室을 中心으로 한 중앙집권력의 성장에 제약을 가하게 되어 고구려국은 漢의 영향권하에 예속된 상태를 당분간 지속케 되었던 것이다. 1C 초 王莽이 胡를 치는데 고구려병을 강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고구려에 작용하고 있던 그러한 중국의 영향력을 말해주며, A.D. 47년 蠶支落 大加 戴升의 一萬口가 後漢으로 이탈한 것도 그러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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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도군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는 『삼국지』의 기사를 고구려 왕의 지방 통제력이 약했음을 의미하는 기사로 날조한다.

엄우가 살해한 고구려왕은 유리왕이다. 『위서』는 추모-여달-여율-막래의 순으로 왕이 된다고 하며 부여를 정복한 왕을 막래라 한다. 『위서』 朱蒙死,閭達代立。閭達死,子如栗 代立。 如栗死,子莫來代立,乃征夫餘,夫餘大敗,遂統屬焉。

막래가 대무신왕이므로 여달인 유리왕 사이에 여율왕이 있다. 고구려는 유리왕이 목이 잘려 죽은 수치를 감추기 위해 유리왕이 서기 12년 죽은 사실을 감추고, 서기 12년에서 서기 18년까지의 여율왕의 치세를 유리왕의 치세에 포함시켜 기술하였다.

서기 8년 황룡국왕이 보낸 활을 해명이 부러뜨리자 왕이 화를 냈다는 기사와 황룡국왕이 해명을 죽이지 못했다는 기사,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二十七年, 春正月, 王大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強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諌者曰, “今鄰國無故請見, 其意不可則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서기 9년 해명이 여진(礪津)에서 자결했다는 기사,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鄰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即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黄龍王, 以強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二十一歳. 以太子禮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

서기 18년 왕자 여진(如津)이 익사하였다는 기사는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 不得. 後沸流人祭須, 得之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부자연스럽다. 황룡국은 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며, 서기 18년 여진의 익사는 여율왕의 사망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대무신왕의 이름은 무휼이고, 11살인 서기 14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서기 18년에 즉위한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원년 10월, 大武神王立 或云大解朱留王.. 諱無恤, 琉璃王第三子. 生而聦慧, 壯而雄傑, 有大略. 琉璃王在位三十三年甲戌, 立爲大子, 時年十一歳. 至是即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여율왕을 부인하면, 왕자 무휼은 6살인 서기 9년 부여를 꾸짖고,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28년 8월, 時王子無恤, 年尚㓜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毀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10살인 서기 13년에는 부여의 침략을 물리친다는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竒計, 親率軍伏干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것이 된다. 이러한 불합리는 부여를 꾸짖는 왕자를 여율왕자로 보고, 부여의 침략을 물리친 사람을 무휼왕자가 아닌 여율왕으로 보면 해결된다.

고구려는 홀본 즉 요동군에서 서기전 37년 건국하여 동쪽과 북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것은 漢 주변 세력을 고구려를 통해 제어하려는 漢의 의중과도 일치하였다. 서기전 36년 요동외요 동북쪽으로 추정되는 비류국을 점령하고,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来降, 以其地為多勿都, 封松讓為主. 麗語謂復舊土為多勿, 故以名焉.

서기전 32년 당산지역의 소국으로 추정되는 행인국을 점령하고,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6년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白山東南荇人國, 取其地為城邑.

서기전 28년 북옥저를 점령라고,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0년 冬十一月, 王命扶尉猒, 伐北沃沮滅之, 以其地爲城邑.

서기전 9년 홀본 북쪽의 선비를 복속시켰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11년 王舉旗, 鳴皷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그런데 구려후 추가 죽은 서기 12년 이후 고구려는 갑자기 서쪽과 남쪽으로 진격한다. 서기 14년 서쪽으로 양맥을 치고 新의 고구려현 즉 현도군을 점령하고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33년, 秋八月, 王命鳥伊·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髙句麗縣 縣屬玄免郡.

서기 14년에서 서기 18년 사이에 요동고새까지 점령한다.

양맥은 요동군 내의 북쪽지역으로 추정되고 현도군은 대요하(조백하)와 소요하(온유하) 사이 지역이다. 구려후 즉 유리왕이 살해당한 후 고구려는 요동외요를 벗어나서 독립하고 新에 적대적인 세력으로 변화한다. 新에 대한 복수가 바로 新의 영토였던 상하장 지역의 점령이다.

또한 서기 12년을 전후로 『삼국사』에 기재된 유리왕의 성격이 크게 변화한다. 서기 12년 이전의 유리왕은 수세적이고, 선비의 소집단을 복속시킨 것 이외에는 대외적인 치적이 전무하며, 漢인 첩을 그리워하고 협보가 유리왕의 정치에 실망하여 韓 지역으로 떠날 정도로 무능하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22년 十二月, 王田于質山隂, 五日不返, 大輔陜父諌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冝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攺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墜地.”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 去之南韓.

그러나 서기 13년에는 동부여를 크게 물리치고,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竒計, 親率軍伏干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서기 14년부터 서기 18년 사이에 新의 영토였던 상하장을 점령한다.

따라서 서기 12년에 유리왕이 엄우에 의해 살해 당하고 여율왕이 즉위하여 新으로부터 벗어나 新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보야야 한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살해당한 구려후 추를 유리왕이 아닌 추모왕으로 본다. 『삼국사』의 기년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근거는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 고자 묘지명은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708년이라고 하여 『고자 묘지명』 自高麗初立至國破已來七百八年卅餘代代爲公侯將相不絶忠爲

삼국사의 서기전 37년보다 더 이른 서기전 40년을 고구려 건국 시기로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에 의하면 백제는 건국 이후 마한에 충성한다. 서기 6년에도 남쪽에 웅천책을 설치했다가 마한왕이 나무라자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어버린다.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二十四年, 秋七月, 王作熊川柵, 馬韓王遣使責讓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 其待王不爲不厚. 冝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 王慙, 遂壞其柵.

그런데 서기 8년에 마한을 병합하여 버린다.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又. 儻爲他所并,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并其國邑. 唯圎山·錦峴二城, 固守不下.

이는 백제의 국력이 급격하게 강해진 때문이 아니다. 중마한이 홍수로 약해졌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황하 하류의 수류 변동은 서기 11년 또는 서기 15년에 있었다. 수류 변동이 하루 아침의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의 하도가 퇴적으로 높아지면서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게 되고, 홍수 시 수류가 아니었던 곳으로 강물이 넘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수류가 변경되었을 것이다. 중마한은 수류 변경 전 황하의 동쪽에 있었는데, 마한으로 수류 변경이 되었고, 수류 변경이 완료되기 전에 큰 홍수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서기 7년과 서기 8년 무렵 홍수로 마한이 국가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의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온조왕은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갈리어 그 형세가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할 정도가 되었다. 백제의 역사 기록자가 홍수로 거의 망한 마한을 병합하기로 하였다고 쓰지 않았을 뿐이다. 백제의 『삼국사』 초기기년의 사실성이 황하 하류의 수류 변경에 의해서도 입증되므로 강단유사사학의 『삼국사』 고구려 초기기년의 의심은 전혀 근거가 없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의 협보에 관한 기록도 『삼국사』의 기술과 시기와 내용 모두 일치한다. 『태백일사』는 협보가 남한으로 와서 마한산에 기거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듭 흉년이 들었고, 이에 협보는 변란이 있을 것 같아, 배로 구야한국을 거쳐 열도에 도착하여 다파라국을 세웠다고 한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先是, 陝父奔南韓, 居馬韓山中, 從而出居者, 數百餘家。未幾, 歲連大歉, 流離遍路。陝父乃知將革, 誘眾裹糧, 舟從浿水而下。由海浦而潛航, 直到狗邪韓國, 乃加羅海北岸也。居數月, 轉徙于阿蘇山而居之, 是為多婆羅國之始祖也。後, 併于任那, 聯政以治。三國在海, 七國在陸。

서기 3년 협보가 올 당시 『삼국사』 「고구려본기」 유리왕 22년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 去之南韓.

韓 지역은 마한이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협보 일행은 마한산에 기거하였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흉년이 계속되었다는 것은 황하 하류의 수류변경 전 韓 지역에 홍수가 있었다는 말이며, 협보가 예측한 변란은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것이다. 여기에서도 『태백일사』가 위서가 아님이 입증된다.

강단유사사학은 구려후 ‘추’를 근거로 기년을 의심하나 추모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어 고구려 초기 왕의 호칭이 추였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추라는 미약한 근거로 『삼국사』 초기기록을 의심하는 것은 그저 강단유사사학의 야마토임나에 대한 충성일 뿐이다.

백번 양보하여 강단유사사학의 의심을 인정하더라도 추가 추모왕이 될 수 없는 것은 협보가 “만일 (왕께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지지 않으신다면, 신은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이 흩어져 선왕의 위업이 땅에 떨어질까 두렵사옵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협보는 유리왕이 사냥이나 하고 국정에 신경쓰지 않아 추모왕이 쌓아 놓은 고구려의 기틀이 무너질까 걱정하여 유리왕에게 말했다. 따라서 협보가 韓 지역으로 간 후에 발생한 구려후 추의 살해대상은 추모왕이 될 수 없다.

물론 강단유사사학은 일제의 침략적 민족주의 날조역사의 핵심인 야마토임나설에 반하는 모든 사서의 기록을 부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도 그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이 근거없이 漢에 살해당한 추를 추모왕으로 모는 것은 우리 역사를 우습게 만들기 위한 즉 고구려의 시조가 漢에 목이 잘려 죽었다고 날조하기 위한 책략에 지나지 않으므로 학문적으로 논의할 가치는 전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동호는 조선과는 전혀 별개의 정치체라고 날조하면서, 조선의 것을 모두 동호(오환 선비)의 것이라 하여 삼한조선 삼조선 등 소위 고조선을 부정하는데, 그들의 주장은 진번조선과 고구려가 소위 동호라는 사실에 의해 명백한 허위로 드러난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