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갈석산 위치의 명명백백한 증거: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역사회복 2023. 2. 10. 07:36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지도의 바다에 쓰여 있는 문구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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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 而後西向以上大河 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 而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 則碣石在右 故曰夾右碣石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바치려면, 고수 역수 탁수 요수로부터 바다로 간 후, 서쪽으로 대하를 올라가서 멀리 기주의 도읍지에 도달한다. 이 때 구하(황하)가 바다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어, 갈석을 의지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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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많은 사료도 황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기주협우갈석도는 시각적으로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황하를 구하라 하는데 황하가 바닷가 가까이에서는 여러 물줄기로 갈라졌음을 의미한다. 황하와 제수로 인해 중국과 韓이 분리되어 백제가 韓을 중심으로 하여 환황해와 열도 동남아를 무대로 무역을 하였다. 

강단유사사학(소위 강단사학계, 조선총독부 계승자들)은 아무 증거 없이 대동강가의 어느 산이 갈석산이라고 한다. 그들은 문헌증거가 없으니, 고고학으로 도망가서 평양에서 발견된 유물 유적이 낙랑군의 것이라 우긴다. 그러나 전혀 타당성이 없다. (이 블로그의 '한사군의 날조성' 참조)

재야유사사학은 난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도 문헌근거가 전혀 없다. 황하 갈석산설에 대한 사료를 대면서 이것들이 난하 갈석산설의 근거라고 우긴다. 

지명이동 전에는 요수가 중역수이고, 창려현이 중역수 상류에 있었다. 갈석산에 올라가려면 보정시로 와서 갔는데 이를 요서(중역수 상류)나 창려현을 통해 갔다고 표현하였다. 지명이동으로 창려라는 지명이 난하 부근으로 옮겨졌는데 재야유사사학은 사료의 갈석산이 난하 옆의 갈석산이라 우긴다. 갈석산도 지명이동함을 모르고 억지를 쓰고 있다. 중제유사사학(동북공정)은 이를 이용하여 난하 갈석산설에 상서 등 여러 사료를 꿰맞추어 우갈석이라 하고 있으나 억지의 확대에 불과하다.

 

기주협우갈석도는 강단과 재야와 일제 중제 유사사학의 모든 억지를 한 방에 물리친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