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련은 왜 자유시학살을 자행하였는가?

역사회복 2023. 2. 9. 14:48
 
윤상원은 슈먀츠키가 독립군을 일본과 싸우도록 보내기 위해서 통합하려 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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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비서부의 전권위원 슈먀츠키는 일본과의 관계로 인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극동공화국과는 달리 “세계혁명의 총참모부”로 자처하는 코민테른의 대표였기 때문에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까지 2천여 베르스타(약 2000km)의 장정을 위해서 중국영토를 통과하는 한인들의 행군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시베리아에서 한인 무장부대통합 준비기관으로 극동비서부에 의해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되었다.

슈먀츠키는 러시아 빨치산운동의 영웅인 칼란다리쉬빌리(Н.А.Каландаришвили)를 고려혁명군정의회 위원장으로 파견하여 “한인부대를 가능한 한 빨리 완충지대로부터 벗어나서 조선쪽으로 이동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칼란다리쉬빌리는 극동공화국 사령부에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달라고 거듭해서 요청했다. 결국 크라스노쇼코프가 굴복했다. 그는 1921년 4월에 들어서면서 지금까지 한인 무장부대를 지원하던 입장을 철회했다. 이후 한인 무장부대 통합운동은 전적으로 극동비서부의 주도 아래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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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코민테른에 독립군을 배속시켜 한국으로 보내는 것은 선전 선동의 의미나, 상황이 변한 미래의 계획일 수는 있어도,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계획이었고, 슈먀츠키도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다. 윤상원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 내전 중 체코군의 [러시아의 포로였던 체코인과 러시아 거주 체코인들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 가담하였다. 레닌이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하자, 이들은 계속 독일과 싸우기 위해 전선으로 가려 하였는데, 러시아 서부로의 귀환이 독일군 때문에 어려워지자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가기로 하였다.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도중 레닌정부에 봉기하였고 이를 계기로 러시아 내전이 격화되었다.] 보호를 명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이 러시아에 파병하여 백군을 지원했는데,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37-38. 적군의 승리로 전세가 기울고 체코군 귀환이 완료되어 일본을 제외한 파병국들은 1920년 초 철수하였다. 윤상원, 위 글, 89.

그러나 일본은 니항사변을 구실로 1920년 4월 연해주 전역에서 소비에트적군에 대한 공격을 실시하고 5월에는 메르꿀로프의 임시쁘리아무르정부를 수립시켰다. 윤상원, 위 글, 90-91.

 

소련은 1920.4.6. 표면상 부르주아민주주의공화국인 극동공화국을 수립하여, 일본의 ‘과격파(볼세비키)군대의 절멸’이라는 재출병 명분이 성립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윤상원, 위 글, 91. 극동공화국은 일본군과의 대결을 피하면서 백군과의 전투에만 전념하여 10월 치타에 주둔하고 있던 세묘노프군을 격파하고 11월에는 수도를 치타로 이전했다. 윤상원, 위 글, 241.

 

1921년 자유시학살 이전, 일본은 이미 1920년 초 시베리아에서 철병한 미국 등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로부터 시베리아를 혼자 차지하려고 든다고 강한 항의를 받고 있었으며, 윤상원, 위 글, 242. 국내적으로도 경제불활 속 장기간에 걸친 출병으로 인한 막대한 재정지출에 대한 반대가 격화되고 있었다. 윤상원, 위 글, 241. 극동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부는 임시쁘리아무르정부를 구성한 메르꿀로프 백군을 하루빨리 제압하고 내전을 끝내고 싶어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철병시키기 위해 온갖 외교적 노력을 시도하는 상황이었다. 윤상원, 위 글, 241.

 

이러한 상황에서 코민테른이 휘하 부대를 한국으로 보내 작전을 개시한다는 것은 소도 웃을 일이다. 일본은 극동공화국과 협상을 통해 빠져나갈 명분을 찾는 상황이었고 극동공화국도 적당하게 일본을 내보내고 완전한 내란의 종식을 바라는 상황에서 일본과 소련간 새로운 분쟁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발상인데, 윤상원은 어떻게든 코민테른의 독립군 학살을 옹호하기 위해 코민테른의 위대한 계획을 광고하고 있다.

소련이 급하게 독립군을 학살한 것은 일본과의 협상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 철군협상의 전제조건으로 자유시의 독립군 처리를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어업협상에서 요구하였고 소련은 이에 응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 독립군전투사(상)』 (1970): 414-415.

이 무렵에 중국 북경에서는 일본의 주중 공사 방택(芳澤)과 러시아 정부 대표 카라한 사이에 캄챠카 반도 부근 어업권(漁業權)에 대한 교섭이 진행되었는데 방택은 카라한에게 ‘러시아 영토 안에서일본에 방해되는 한국인 무장 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된다’고 비난하면서 그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당시 러시아가 혁명 후 아직 세력이 안정되지 못한 약점을 이용하여 우리독립군의 러시아 영내에서의 활동을 제지하려는 외교적 술책이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입장에 있어서는 국 내·외적으로 혁명 정부의 정치적 기반이 확고하지 못한 처지에 이웃의 강대국인 일본과의 불화(不和)를 가져온다는 것은 매우 불리한 일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측은 이 어업권과는 아무런 관계 없는 일본측의 제의를 어업 문제 교섭 중에 받아들이게 되니 여기서 모처럼의 피난 근거지로 삼았던 러시아 지역에서의 우리독립군의 앞길에는 다시 먹장구름이 가리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흑하사변(黑河事變)」에도 같은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한편, 같은 해 일본과 소련은 북경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때 일본 측은 소련영토 내에 일본에 유해한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면서 이의 취소를 주장하였다. 소련도 혁명 후 쇠약해진 국력으로 일본과 불화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해 독립군의 무장취소를 약속하였다. 결국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가 내려졌다.

윤상원이 朝鮮總督府 警務局, 大正11年(1922) 朝鮮治安狀況 582쪽을 인용하여 기술한 다음 내용이 이를 입증한다. 윤상원, 위 글,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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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8월 26일 개최될 대련회담을 앞두고 7월 일본과 극동공화국 사이에 ‘日露議定書’가 채택된 후에 “過激派軍隊는 日露議定書의 規定에 依해 我軍(일본군-필자)의 駐屯區域 內에 侵入할 수 없게 되었고, 不逞鮮人 部隊도 我軍이 駐屯하지 않는 僻陬(벽추) 地點에 潛在하여 僅僅이 그 命脈을 維持”(주: 朝鮮總督府 警務局, 大正11年朝鮮治安狀況 582쪽)하게 되었다. 결국 고려혁명군은 극동공화국의 영내에 주둔할 수도 없었고, 그곳을 기지로 하는 유격전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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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는 독립군이 7월의 러일간 약정에 의해 벽추[僻 궁벽할 벽, 피할 피; 陬 구석 추] 지점으로 이동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1921년 7월 5일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로부터 “高麗革命軍隊를 滿洲로 出動할 計劃을 停止하고 速히 軍隊를 領率하고 일쿠쓰크로 入來하라”는 전보를 받았다는 윤상원, 위 글, 225.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르쿠츠크는 극동지구를 관할 범위로 한 극동공화국이 아닌, 시베리아국의 관할에 포함되어 있었다. 오세호. "소비에트 러시아의 동아시아 정책과 초기 한인사회주의 세력의 갈등(1919~19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71호. (2020): 130.

일본은 극동공화국에게 철군협상 개시의 전제조건으로 자유시의 독립군 처리를 6월까지 하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소련은 조속한 일본의 철병을 끌어내기 위해 독립군을 극동공화국 밖으로 옮겨야 했는데 독립군이 작전권을 요구하며 저항하므로 일본이 요구한 기일에 맞추기 위해 무력진압을 실행했을 것이다.

당시 독립군은 소련군의 장갑차와 대포를 이용한 진압에도 도망만 가고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214-218.

소련군과 싸우지 않기 위해 강으로 뛰어 들어 익사자가 많이 발생했다. 진압군은 사상자가 없었다. 윤상원, 위 글, 217쪽 주 637에 의하면, 진압군 측의 피해에 대해, 진압군 측은 2명 사망이라 하고 독립군 측은 사상자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독립투사들은 일본군의 독립군 근거지 민간인 학살이라는 전쟁범죄를 겪고, 최후의 근거지는 소련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군을 신뢰하고 의지한 독립군이었으므로 일본과의 교섭이 없었다면 성급하게 무력으로 억압할 필요가 전혀 없던 상황이었다. 소련에게 시간이 충분했더라도 무력으로 해결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소련은 미안했는지 11월 결정서로 고려군사혁명법원에 의해 처벌 받은 독립군들의 형을 많이 감경하여 주었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55-256.

윤상원은 내분이라는 날조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상해파의 손을 들어 준 것으로 평가한다. 윤상원, 위 글, 256. 소련의 조치는 독립군 부대를 원상회복 시켜 준 것도 아니고, 독립군 부대에 작전권을 준 것도 아니고, 강제노역장에 보낸 독립군들을 풀어준 것도 아니므로 아무 것도 아니고 상해파의 손을 들어 준 것도 없다. 그냥 자기들이 생각해도 너무한 것 같으니 미안하다 한 것일 뿐이다.

독립군을 간도로 보내기 위해 무력진압하여 코민테른이 지휘하는 군대에 편입했다는 주장은 개도 안 속을 날조에 불과하다. 독립군을 진압하지 않으면 몰래 간도로 나갈까 두려워 진압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실제 독립군은 작전권을 부인하는 코민테른을 피해서 6월 12일 북간도로 행군을 시작하였으나 소련 기병대에 의해 저지되어 다시 돌아왔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210-211.

이후 독립군은 어쩔 수 없이 코민테른의 요구를 받아들였는데, 칼란다리쉬빌리는 독립군을 세분하여 편제하였다. 윤상원, 위 글, 209. 이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독립군의 조직적 이탈을 방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자 독립군은 다시 코민테른의 요구를 거부하게 되었고 28일의 대학살로 귀결되었다. 독립군을 스스로 간도로 가게 내버려두어도 일본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독립군을 소련 정규군으로 만들어 간도로 보내기 위해 코민테른이나 제5군의 부대로 편입하려 했다는 주장은 세계사를 다시 써야 할 획기적 발견이다. 소련이 당시 일본과 전쟁을 하기 위해 안달했다는 어마어마한 사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기술하는 날조집단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간도가 아니라 이르쿠츠크로 보내기 위해 편입시켰고, 실제 이르쿠츠크로 보낸 다음, 1921년 8월말 군정의회는 취소시키고 윤상원, 위 글, 223. 1개 여단으로 재편성한 후 적군 제5군에 배속시켰다. 윤상원, 위 글, 225.

윤상원의 거짓말.

윤상원은 칼란다리쉬빌리가 자유시에 부임한 이후 무장부대의 통합 주도권은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자유대대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9.

이 주장은 독립군의 소련군으로의 편입이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말인데, 세력은 당연히 소련군이 우위에 있는 것이고, 명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명분이 소련군에게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소련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기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자적 작전권을 확보하려는 독립군에게 명분이 없고, 작전권 없이 소련군에 편제되는 것이 명분상 우위라는 그의 주장은 미군에 한국군의 작전권을 넘긴 이승만의 결정과 지금도 미국에 작전권이 있어야 한다는 토착왜구들의 생각보다 더 나아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독립투사들을 독립투쟁에서 이탈시켜 소련에 바쳐도 된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윤상원은 김준엽과 김창순이 편찬한 『韓國共産主義運動史 資料篇』을 근거로 홍범도는 6월 2일, 안무와 최진동은 6월 9일 각각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청천도 군정의회에 의해 고려혁명군 교관으로 선임되었으며,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로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김준엽 김창순 편, 韓國共産主義運動史 資料篇 2권, 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26-27, 30-32; 윤상원, 위 글, 249쪽에서 재인용.

홍범도의 선택으로 추가 기울었다고도 주장한다. 윤상원, 위 글, 249.

 

그런데 윤상원은 『이인섭 친필 노트』를 근거로 섬에 있다가 항복한 병력 중에 안무의 국민회군이 있었으며, 부대원 김희영이 국민회군은 사망자가 없다고 말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으므로 김희영, 「國民會 安武 軍隊」, 『이인섭 친필 노트』 9권, 161-164;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214.에서 재인용. 안무의 국민회군은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윤상원은 상반되는 사실을 말하면서도 자신의 견해를 말하지 않고 있다.

『韓國共産主義運動史 資料篇』이 안무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말한다면 최진동 부대의 이동도 불확실하다. 최진동도 추후 행적을 보면 자의로 자유시로 이동하였을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또 그는 나머지 부대가 이동을 계획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청천이 교관으로 선임된 것은 일방적 행위이므로 이것이 명분을 판단하는데 있어 큰 의미는 없다.

홍범도의 선택으로 추가 기울었다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세력면에서는 독립군과 소련군이 상대가 되지 않고, 명분면에서도 홍범도를 제외한 모든 독립군은 독자적 작전권을 옹호하고 있었으므로 홍범도 부대가 이탈했어도 큰 의미는 없다. 윤상원은 불명확한 근거로 혹은 전혀 근거도 제시 않고, 간도로부터 이동해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이 통합의 주체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인정하고 전한군사위원회의 권한을 부인했다고 날조하며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9.

홍범도를 중심으로 한 간도의 독립군부대들이 고려혁명군의 손을 들어주

어서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으로 통합의 주도권이 넘어갔다고 날조한다. 윤상원, 위 글, 252.

 

심지어 윤상원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안무, 이청천이 자유시학살 이후 발표한 성명서의 내용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그 내용이란 것은 이들이 단일한 조직과 규율로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것을 중요시했고, “不偏不義한 魯西亞 同志”를 사령관으로 하는 “高麗革命軍政議會를 組織하야 軍事上에 關한 萬般을 指揮 統一케 하”기 위해 군정의회의 명령대로 “軍政議會 接近 村落에 移居”했다는 것이다. 윤상원, 위 글, 250.

윤상원이 이 성명서의 각주로 기술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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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고려공산당중앙간부(제3국제공산당고려부), 각 의병대 영수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안무 이청천, (성명서) 귀중한 형제들이여 , РГАСПИ, Ф.495, оп.154, д.125, л.16. 이 성명서 는 자유시사변 이후 각 무장부대가 高麗革命軍으로 통합되고 난 후인 1921년 10월 1일에 발표된 것으로 그 내용은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입장을 옹호하고 사할린부대를 성토하는 것이었다. 이 성명서는 당사자들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간도로부터 온 독립군부대들의 입장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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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이 성명서는 소련공산당의 독립군 지도자들을 이용한 여론조작용이라 생각할 것이다. 내용부터 사실과 다르다. 안무 부대는 항복한 부대이므로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았음은 이미 보았다. 허재욱 부대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부대라고 윤상원 자신이 말하고 있어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0. 216. 이들이 자유시로 이거하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윤상원은 부대원들이 군정의회의 손에 가장 많이 죽었음에도 허재욱은 군정의회의 입장을 옹호한다고 주장한다. 윤상원은 성명서에서 유추하지 않는다. 그냥 성명서 문언 그대로가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인 사람의 유추는 홍범도를 제외하고는 공산당의 압력으로 지도자들이 도장을 찍었겠구나인데 윤상원은 상식을 뛰어넘은 비범함으로 성명서의 내용을 판단한다.

윤상원이 소련공산당원일 수 있다는 의심이 생긴다. 그는 어떻게든 학살의 책임을 내분으로 돌리기 위해 간도 독립군을 소련군 편으로 조작하려 한다. 자유대대와 합동민족연대는 정규 소련군이다. 그래서 내분이 성립 안 되니까 간도 독립군을 갖다 붙여 내분설의 씨앗이라도 만들려 한다. 소련을 향한 윤상원의 눈물겨운 충성심을 소련은 빨리 알아주어야 한다. 윤상원이 이런 선전문서까지도 증거로 주장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주장에 근거가 눈꼽만큼도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형권은 1920년 소련과 교섭하여 모스크바 정부의 임정승인, 한국독립군 지원과 사관학교 설치 지원, 독립운동자금의 원조 등의 약속을 얻어냈다.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2집, (2005): 82-83.

 

이 약속에 의하면 소련측의 행위는 명분히 전혀 없다. 독립군을 지원해주기로 했지 독립군을 자기의 군대로 만든다고는 하지 않았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일본과 교섭하기 위해 독립군을 이용하고 학살한 것이다. 명분을 따진다면 소련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할 말이 없는 소련이 안타까워 윤상원은 아무 말이나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군정의회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소련의 공권력으로 만든 조직으로 코민테른이나 제5군이 작전권을 보유한다. 전한군사위원회는 전한의병대회를 통해 독립군 스스로 만든 조직으로 독자적 작전권을 보유한다. 독립군 입장에서 어디에 명분이 있는가? 명분이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윤상원은 용감하고 무식하게 명분이라는 말을 꺼낸다.

결국 윤상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립군이 내분으로 망했다는 것이다. 일본이 날조하고자 하는 바로 그 말을 윤상원이 대신한다. 신기하게도 날조집단은 날조좌파와 날조우파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는 신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이다. 날조집단 모두가 일제와 중공의 고대사 왜곡을 맹신하고 떠받들며 우리 자신의 입장이 아닌 일제와 중공의 날조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보기 때문이다.

자유시학살은 피압박민족의 해방자라는 소련의 위치 설정에 심각하게 배치되는 사건이어서, 사건 당시부터 내분이라 선전되어 왔고, 지금도 날조집단이 소련의 날조주장을 퍼뜨리고 있다. 서울신문 1019.8.14.은 러시아의 공무원일 수도 있는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의 기고를 실어주고 있는데 그 내용은 오늘날 학계에서 “독립군을 공산당이 죽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날조집단은 일제의 날조도, 중공의 동북공정도 대신 해주고, 소련의 역사왜곡도 대신 해준다.

학살 현장의 비에도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란 문구를 한글로 써 놓았다고 한다. 날조집단이 학문권력을 장악하여 소련으로부터의 사과를 받는 것은 고사하고 날조내용을 비에까지 새겨넣도록 하고 있다. 학살 당한 독립투사들의 우국충절까지 내분으로 폄훼되고 있는 것이다.

홍범도가 소련측에 협력하여 독립군을 이탈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독립군 진압에 투입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련군은 자기네들 군대로도 충분하다고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며, 홍범도가 소련군측에 와준 것만으로 고마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도에서 독립투쟁 시 다른 독립군 수장들은 능력이나 전공 나이에 비해 홍범도를 그만큼 잘 대접하지 않았는데, 소련에서는 브르주아 출신 수장들보다 프롤레타리아 출신의 홍범도를 가장 우대하였을 것이다. 아마 소련의 융숭한 대접과 간도에서의 경험이 비교가 되어 홍범도는 사회주의 소련을 진심으로 좋아하였을지 모른다. 그렇게 추측해야 그의 다음 행보들이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