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갈석산 위치의 명명백백한 증거: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 ​ ​ 지도의 바다에 쓰여 있는 문구가 다음과 같다. ​ -------------------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 而後西向以上大河 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 而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 則碣石在右 故曰夾右碣石 ​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바치려면, 고수 역수 탁수 요수로부터 바다로 간 후, 서쪽으로 대하를 올라가서 멀리 기주의 도읍지에 도달한다. 이 때 구하(황하)가 바다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어, 갈석을 의지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 ​ 다른 많은 사료도 황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기주협우갈석도는 시각적으로 명..

역사 2023.02.10

한사군의 날조성

사마천은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만든 4군에 대해선 그가 살아있을 때의 일임에도 군명을 열거하지 않았다. 『사기』 「조선열전」 以故遂定朝鮮為四郡 ​ 설치하자마자 폐지된 서류상의 군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漢은 요동외요를 포기하고 요동고새로 후퇴하였으므로 진개가 만든 5군중 요동고새 바로 북쪽의 어양과 우북평만 유지하였다. ​ 예맥조선을 침략한 후에는 진개가 만든 국경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새로 영토가 늘어난 부분은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이다. 진개의 요서군을 요서군과 현도군으로 나누었으므로 진개 때보다 영토가 증가한 것은 없다. 임둔군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다 일부 실효지배하던 곳은 낙랑군에 편입시켰다. 진번과 현도도 서류상 존재하다 실효지배하는 북경 북쪽에 현도군을 두었다. 낙랑군은 원래 漢의 영역이었다...

역사 2023.02.09

낙랑군 위치와 낙랑군 위치 왜곡의 과정,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

​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는 다르다. https://taxecolaw.tistory.com/72 ​ 낙랑군 왜곡의 과정 ​ 강단·일제·중제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의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전제부터 근거없는 날조임이 드러난다. 더 이상 그들의 날조를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날조의 골이 깊어 날조의 과정을 더 살펴본다. ​ 진수(233년-297년)는 낙랑과 대방, 환도성의 위치를 알았다. 조위의 공손씨 정벌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이 그의 생존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방군에서 왜의 북쪽 대안이라고 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 표시하고 있고, 그 경로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시하고 있다. ​ --------------------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

역사 2023.02.09

소련은 왜 자유시학살을 자행하였는가?

윤상원은 슈먀츠키가 독립군을 일본과 싸우도록 보내기 위해서 통합하려 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7-248. ---------------------- 극동비서부의 전권위원 슈먀츠키는 일본과의 관계로 인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극동공화국과는 달리 “세계혁명의 총참모부”로 자처하는 코민테른의 대표였기 때문에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까지 2천여 베르스타(약 2000km)의 장정을 위해서 중국영토를 통과하는 한인들의 행군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시베리아에서 한인 무장부대통합 준비기관으로 극동비서부에 의해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

역사 2023.02.09

자유시 학살의 성격

[소련과 날조좌파가 소련의 독립군 학살을 독립군 내분으로 날조] ​ 윤상원은 자유시사변은 무장부대 통합운동의 과정에서 군통수권을 둘러싼 내부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윤상원. "만들어진 ‘신화’." 한국사학보. 51 (2013): 316. ​ 그러나 한 쪽은 독립군이 아닌 소련군이므로 내부 대립이라 할 수 없다. 자유시학살은 독자적 작전권을 유지하려는 독립군을 소련군이 탄압하고 학살하여 소련군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 박일리야 등 독립군 측은 극동공화국 대통령인 크라스노쇼코프의 적극적 지원으로 1921년 1월 20일 “인민혁명군 안에 있는 모든 한인부대를 즉시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로 재조직”하라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헤의 명령을 이끌어냈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

역사 2023.02.09

레닌자금의 귀속자는 누구인가? 김구의 김립 처단은 테러인가 처벌인가?

레닌자금의 귀속자 (반병률의 날조) ​ 반병률은 “당초 소련정부가 차관을 약속했을 때, 자금은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고 그 자금활용의 책임은 한인사회당이 참여하고 있던 임시정부였다”라고 기술하여 레닌 자금의 수혜자는 임시정부라 명시하고 있다.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2집, (2005): 93. ​ 자금을 받아 낸 한형권은 1920.1.22. 국무회의의 선정에 따라 임시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갔고, 반병률, 위 글, 82. 소련과의 교섭과정에서 그의 자격이 한인사회당의 대표로 변경된 적도 없다. 따라서 그가 당초라는 단서를 달아 추후에 뭔가 다른 변경사항이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수혜자에 관한 변경사항은 없었고 반병률 자신도 변경사항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 2023.02.09

동성왕, 백제의 최전성기

동성왕 479-501 재위 ​ ​ 1. 즉위 시의 상황 ㅇ 고구려는 475년 9월 개로왕을 살해하였다. ㅇ 해구가 477년 동성왕의 아버지 곤지(개로왕의 동생)와 문주왕 살해 ㅇ 해구가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13세)을 즉위시키고 전횡 ㅇ 479년 11월 즉위 (혼란기에 정치력과 무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라 추정) ​ 2. 고구려에 복수하고 고구려 영토 획득 ㅇ 개로왕은 서도 한성에서 전사, 문주왕은 한반도 웅진으로 천도 ㅇ 480년이나 481년부터 482년이나 483년까지 고구려와 전쟁 - 광개토대왕에게 뺏긴 한백제 북부 회복하고 고구려의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 탈취 - 당시 고구려 낙랑태수였던 동수 481년 전사 - 당시 장수왕이 90 정도의 고령이어서 고구려 대응이 허술했을 가능성. 이를 이용한 동성..

역사 2023.02.09

덕흥리고분 묵서명과 태수래조도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북연을 세우면서 진번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 요동고새 남쪽 영토도 새로 획득하였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의 12군은 명확하며, 나머지 하나는 대방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 시 발해만 부근 국경] * ‘韓 백제 북부’는 고구려가 396년 점령한 영토로 韓태수를 임명하여 다스린다. 연군은 후연의 용성으로 추정되고 대군은 태행산맥 서쪽이다. 따라서 이 13군은 하북성에서는 북쪽은 영정하, 남쪽은 당하까지를 영역으로 하고 산서성에서는 대까지를 영역으로 한다. 통역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이 지..

역사 2023.02.08

홍범도

『독립신문』 1920.12.25. 제88호 제4면은 봉오동전투의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부관은 안무이며, 홍범도는 연대장이라 하고, 최진동의 지휘에 따라 전투가 수행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홍범도가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다고 날조한다. ​ 홍범도는 존경할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최고사령관의 작전명령을 무시했다. 자유시로 간 이후에는 소련에 영합하여 독립군의 해체에 동의했고 그 후 그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 살았다. 레닌이 준 권총으로 독립전쟁에 나서라고 충고한 독립투사를 두 명이나 사살하고도 뉘우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국좌익은 홍범도를 영웅시한다. ​ 매국좌익도 우리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민족주의가 계급투쟁에 방해가 될까봐 매국우익의 역사왜곡에 동조한다..

역사 2023.02.08

김수로

1. 김수로의 이동과 건국 新을 건국한 흉노 세력은 新이 망하자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김알지는 대구에 계림국을 건국하였다가 서기 65년 탈해의 신라와 결합하고 김수로는 서기 42년 가야를 건국하였다.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삼국사』 「김유신열전」은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가 같은 성이라 하며, 『삼국유사』는 문무왕이 김수로왕도 자신의 15대 시조라며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한다.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新을 건국하였다가 新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는 함께 한반도로 도피하였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는 한반도로의 도피를 “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역사 2023.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