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3

당나라 동해안의 백제유민

백제는 환황해, 열도, 동남아를 아우르는 해양 무역세력이었지만, 백제의 무역활동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사료는 의자왕의 바둑판, 바둑판인 목화자단기국과 바둑돌인 홍감아발루기자, 바둑통인 은평탈합자는 상아 자단 등 남방의 재료가 사용되고 열대 동식물이 그려져 있어 백제의 무역활동범위가 동남아까지 이르렀음을 증명한다. 안영이는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한국바둑 2000년의 비밀』(한국기원, 2005)에서 바둑판의 화점이 17개이고 홍아와 감아가 각각 150개라는 점을(순장바둑에선 180개가 아니라 150개만 있으면 충분하다) 근거로 백제에서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한다.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 2012.04.19. 입력 기사)​ 성왕이 왜왕에게 부남(扶南)의..

역사 2023.03.02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3)

1. 사료 ​ ㅇ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過沃沮千有餘里,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 ㅇ 『양서』 「동이전」,고구려조, 絕 沃沮千餘里,到肅慎南界,刻石紀功 ㅇ 『북사』 「고구려전」 絕 沃沮千餘里,到肅慎南,刻石紀功 ㅇ 『資治通鑑』 卷75, 魏紀 7, 正始7年,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而還 ​ 모든 사서가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옥저를 지나(過) 또는 가로질러(絕) 천여리를 가서 숙신의 남계에 공을 기록하였다는 내용 ​ ㅇ 관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 2. 강단유사사학의 똥설 ​ 강단유사사학은 오늘날 함경남도 함흥 일대는 동옥저, 두만강 하류 유역은 북옥저라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고구려 낙랑국 정벌에 대..

역사 2023.03.01

고구려와 후한 [대무신왕과 유수의 일승일패, 모본왕 시부터 후한은 60년간 고구려에 조공]

고구려는 新으로부터 벗어나 서기 18년 이전에 요동고새까지 회복하고, 서기 22년 동부여를 복속시키고 서기 32년 낙랑국을 정벌하여 동북방을 평정하였다. 新이 망한 후 혼란기인 서기 28년 요동태수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피해는 없었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大守, 將兵來伐 --- 遂引退. ​ 고구려가 요동고새까지 영토로 하였으므로, 이 때의 요동군은 중역수 하류의 남쪽이다. 대무신왕은 서기 37년에 요동고새를 넘어 낙랑군을 점령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年, 王襲樂浪滅之. ​ 유수가 중국을 평정한 후 서기 44년 낙랑군을 고구려로부터 회복하고 살수 이남까지 차지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 取..

역사 2023.03.01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2)

1. 사서의 기록 ​ [1]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조 ​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 (대방군에서 왜까지는, 해안을 따라 물길로 가는데, 한국(韓國)을 지나, 때로는 남쪽으로 때로는 동쪽으로 나아가면 그 북쪽 대안[北岸]인 구야한국에 도착하는데, 7천여리이다) ​ [2] 『후한서』 「동이열전」 왜조 ​ “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 ​ (낙랑군의 변경에서, 그 나라(야마대국)까지는 만이천리이고, 그 서북 이웃인 구야한국까지는 7천여리이다) ​ ​ 2. 강단유사사학의 주장 ​ 대방군은 황해도이고, 황해도에서 김해까지 7천리이다. ​ [1] 날짜를 통해 거리를 계산했다. ​ 里: 『春秋穀梁傳』을 위시한 고대 중국의 典籍 등에 따르면, 거의 모두 ..

역사 2023.02.28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열도 상고사

열도 지역은 우리 고대사의 영역이다. 서기전 1000년 이후 한반도의 농경민들이 구주로 건너가 농경이 시작되고, 죠몬인이 야요이인으로 대체되었다. Robbeets, M., Bouckaert, R., Conte, M. et al. “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Nature 599, 2021. p.620. 야요이인은 그냥 한국인이다. 일제는 1940년 열도의 지명, 신사명, 사찰명, 성씨명, 동물명, 식물명, 가무와 음악명, 기물(器物)명 등이 모두 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조선의 국명에서 유래한 명사고-내선일체 회고자료』란 책을 발간했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만권당, 2015. 57..

역사 2023.02.28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1)

1. 『수서(隋書)』는 고구려에 평양성 國內城 漢城의 세 도회지가 있다고 한다. ​ 『隋書』 「東夷列傳, 高句麗」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西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復有國內城 漢城 並其都會之所 其國中呼爲 三京. [國都는 平壤城으로 長安城이라고도 하는데, 동서가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은 浿水에 닿아 있다. 또 國內城과 漢城이 있는데, 모두 都會地로서 그 나라에서는 「三京」이라 일컫는다] ​ 2. 현재의 평양에서 漢城이라 기록된 고구려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출토되었다. ​ 기경량의 각자성석 판독문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 ∙판독: 丙戌二月中 漢城下後卩 小兄文達節 自此西北行[徏]之 ∙해석: 병술년 2월 중에 한성에 있는 후부의 小兄 文達이 통제하여 여기서부터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오른]다. ​..

역사 2023.02.27

韓백제의 명확한 증거 (백연전쟁, 백위전쟁)

韓은 황하 동쪽 제수 북쪽 지역을 말한다 ​ [백연전쟁 백위전쟁의 전장] 1. 백제와 전연의 전쟁 ​ 『진서』 「모용황재기」 345년 기사에, 봉유가 모용황에게 고구려 백제 우문부 단부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주정책의 필요성을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 ----------------- 『진서』 「모용황재기」 皝記室參軍封裕練日 ---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 慕容皝의 記室參軍 封裕가 간하여 말하기를, … “句麗와 百濟 宇文部와 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끌려온 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義를 사모하여 온 사람들이 아니어서,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 ​ 이는 전연과 백제가 전쟁을..

역사 2023.02.27

고구려 초기 영토 확장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고구려 초기 동북으로의 영토 확장] ​ 고구려는 서기전 36년 요동외요 동북쪽으로 추정되는 비류국, 서기전 32년 당산지역의 소국으로 추정되는 행인국, 서기전 28년 북옥저, 서기전 9년 홀본 북쪽의 선비를 복속시켰고, (삼국사기) ​ 여율왕이 12년 漢으로부터 독립한 후, 14년 양맥과 漢의 고구려현을 점령하였다. 14년과 18년 사이에 고구려는 요동고새까지 진출하였다. 이는 패수와 대수 사이의 백제인들이 흉년으로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사에 의해 알 수 있다.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37년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髙句麗者一千餘戸, 浿·帶之間, 空無居人. ​ 패수와 대수는 낙랑군을 흘렀던 강들이다. 왕검성의 패수는 영정하였지만, 왕검성이 파괴되고 왕검성 주민을 낙랑군으로..

역사 2023.02.26

단군이 신화라고? 삼국지와 후한서에도 나오는데.

단군조선(=삼한조선)의 강역 ​ ​ (1) 진수와 범엽의 횡설수설 ​ 진수와 범엽은 낙랑·대방군의 韓·倭 침략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시 획득한 사료와 침략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동이의 역사에 관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長老說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 ​ 그러나 이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약탈한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실수가 삼한조선의 삼한과 준왕의 중마한(중마한 시의..

역사 2023.02.25

제장성: 중국 동부 조선의 명백한 증거

기자는 조선으로 갔는데, 그의 무덤이 하남성 상구에 있으므로, 그가 간 조선은 번조선이다. 상이 주에 망하였을 때, 번조선은 하남성 산동성을 포함하여 중국 동부 즉 과거 삼한조선의 번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 周가 商을 멸한 후, 여상(강태공)을 齊 영구(營丘)에 봉하였는데, 成王 시 번조선인들이 관숙과 채숙의 반란에 가담하자 주공이 영고씨(淮)와 박고씨(奄)를 진압하면서, 제나라 주변의 번조선은 제나라가 정벌하도록 하여 『사기』 「제태공세가」 及周成王少時,管蔡作亂,淮夷畔周,乃使召康公命太公曰:「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五侯九伯,實得征之。」 齊由此得征伐,為大國。都營丘。 ​ 제나라가 번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번조선 남부가 서언왕의 조선이다. 이 글에선 ..

역사 2023.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