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324

제장성: 중국 동부 조선의 명백한 증거

기자는 조선으로 갔는데, 그의 무덤이 하남성 상구에 있으므로, 그가 간 조선은 번조선이다. 상이 주에 망하였을 때, 번조선은 하남성 산동성을 포함하여 중국 동부 즉 과거 삼한조선의 번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 周가 商을 멸한 후, 여상(강태공)을 齊 영구(營丘)에 봉하였는데, 成王 시 번조선인들이 관숙과 채숙의 반란에 가담하자 주공이 영고씨(淮)와 박고씨(奄)를 진압하면서, 제나라 주변의 번조선은 제나라가 정벌하도록 하여 『사기』 「제태공세가」 及周成王少時,管蔡作亂,淮夷畔周,乃使召康公命太公曰:「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五侯九伯,實得征之。」 齊由此得征伐,為大國。都營丘。 ​ 제나라가 번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번조선 남부가 서언왕의 조선이다. 이 글에선 ..

역사 2023.02.24

기자조선의 허위성

삼한조선(단군조선 전기)은 서기전 2333년에 건국하여 서기전 1500년경부터 다시 시작되는 한랭화로 서기전 1285년에 망한다. 『단군세기』는 이를 반란을 일으킨 고등의 혈통이 단군이 된다고 기술하며, 『태백일사』는 삼한이 삼조선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태백일사』 「마한세가 하」 五月, 改制三韓爲三朝鲜。 ​ 『제왕운기』는 전조선이 망하고 164년 후에 기자조선이 성립하는데, 위만에 망한 준왕의 조선이 기자조선이며, 기자조선 후, 위만조선-삼한 소국들-삼국의 순으로 이어진다고 기술한다. 『규원사화』는 서기전 1120년경 단군조선이 망한다고 한다. ​ 『제왕운기』가 말하는 공백 164년과 『규원사화』가 타 사서보다 늘린 전조선의 존속기간은 기자조선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간설정이다. 삼한조선이 망한 서기전..

역사 2023.02.23

임나가 가야인가?

임나=가야 주장의 배경 ​ 일제와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를 비롯한 여러 소국들이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라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름이 같으니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물론 이들 국가는 열도에 있는 소국의 이름이다) 문제는 임나이다. 한국에는 가야가 있었고, 「일본서기」에는 임나가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라고 날조한다. ​ 그들은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를 말하므로 「일본서기」의 내용이 한반도 남부에 관한 이야기라 주장한다. 이러한 날조에 기반하여 강단유사사학은 가공의 야마토왜가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 [야마토왜라는 왕조 자체가 날조이고, 일본이 사실은 백제를 의미하고, 일본..

역사 2023.02.20

근초고왕은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

동서양성 ​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을 동시에 통치해야 했던 백제는 한반도에 별도를 두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였다. 김부식은 동서양성을 기술하는 『구당서』를 단순히 인용하기만 한다. 『三國史』 「雜志 地理 百濟」 舊唐書云, “百濟扶餘之别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髙麗. 其王所居有東西两城.” ​ 『구당서』는 그 왕은 거주하는 곳이 동서 두 성이 있다고 명시한다. 『신당서』도 동서 두 성이 있다고 한다. 『新唐書』 「東夷/百濟列傳」 百濟,扶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贏,濱海之陽,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 ​ 웅진과 사비를 동서양성으로 보는 견해도 정재윤, 「웅진성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백제문화 59』, 백제문화연구소, 2018. 5쪽.​ 있으나 바로 붙어 있는 ..

역사 2023.02.19

칠지도 명문 해석

칠지도의 명문에 의해서도 왜왕은 백제의 관료임이 드러난다. 칠지도 앞면 연호와 달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나 박남수의 추정에 따라 봉원(奉元)으로 하고 박남수, 「백제 전지왕 ‘奉元四年’銘 칠지도와 그 사상적 배경」, 『東硏(동연) 10』, 2021. 5-9쪽. ​ X-Ray 판독에 의한 십일월(十一月)로 하고, 박남수, 위 글, 30쪽. 408년 11월 16일은 동짓날이다. 1981년 일본 NHK가 X-Ray로 촬영하여, 대체로 ‘五月’로추정하였던 것을, ‘十一月’로 밝혔다. ​ 앞면 22번째 글자는 出, 生, 世, 帶, 可, 以로 추정되는데 문맥상 出로 보았고, 뒷면 17번째 글자는 意, 音, 德, 旨로 추정되는데, 문맥상 意로 보았다. ​ (앞) 奉元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 出辟百兵 宜..

역사 2023.02.18

연나라의 위치

연소왕 이전 연나라의 위치 ​ 한국사를 날조하기 위해 가장 심하게 날조된 것은 연나라 위치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야 조선의 영역을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서 대륙조선을 지우고 평양의 유물이 중국식이라고 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이라 날조한다. 대륙은 辰조선의 영역이고, 평양은 말조선의 영역이어서 대륙과 평양 모두 조선이므로 강단유사사학이 말하는 중국식 유물이 평양에서도 나올 것이다. ​ 연나라 위치가 왜곡되어 조선에 관한 모든 연구는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제유사사학은 과거에 천진이 계라고 주장하였으나 당시에 천진의 상당부분이 바닷속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 지금은 북경이 계라 주장한다. 연나라의 위치만 바로잡아도 모든 역사 날조는 근거를 잃게 된다. ​ 연나라 위치는 『사기』만 보아도 쉽..

역사 2023.02.17

안악3호분 동수묘

고구려가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 지역과 韓지역 북부)를 480년대 초까지 유지하였다는 것은 안악3호분 묵서명에 의해서 증명된다. 김일권의 판독문과 그 해석을 김일권, 「고구려 5세기 금석문에 나타난 干支曆日 자료와 曆法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36』, 2012. 65쪽. 참고하고 일부를 수정하면 묵서명은 다음과 같다. ​ 판독문: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 해석: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

역사 2023.02.16

백제의 요서 진평

중국 사서가 기술하는 백제의 요서 진평은 다음과 같다. ​ (ㄱ) 『송서(宋書)』 「동이열전」 『송서』 「동이열전」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 百濟國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을, 백제는 遼西를 점령하여 소유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晋平郡 晋平縣이라 한다. ​ (ㄴ) 『남제서(南齊書)』: 긁어서 지움. ​ (ㄷ) 『양서(梁書)』 「동이열전」 『양서』 「동이열전」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 百濟..

역사 2023.02.15

비류백제=예(왜)부여

예부여의 건국과 동부여와의 구별 ​ 『삼국사』에는 두 개의 부여가 등장한다. 하나는 추모가 도망쳐오고 유화부인이 있던 동부여이다. 동부여는 유화가 사망하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는 감사를 표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東明聖王 十四年,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徳. ​ 고구려 초기 등장하는 부여는 동부여이다. 그 왕 대소가 금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소가 죽고 일부는 갈사국을 세우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투항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22년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 國滅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扵曷思. 吾亦不肖, 無以㒷復.” 乃與萬餘人来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동부여가 속민이었다는 기술과 일치한다. 갈..

역사 2023.02.14

백제의 시조와 건국 시 도읍지

백제의 초기 도읍지는 중마한의 북쪽이므로 당연히 韓 지역이다. 『三國史』에 의하면 ​ [온조시조설]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추모가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역사 2023.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