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은 관구검에 패한 후 247년 환도성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東川王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2. 강단유사사학의 똥설
강단유사사학의 평양은 현재의 평양이다. 강단유사사학의 소설 속 낙랑군은 313년까지는 지금의 평양에 존재하는데, 그들은 동천왕이 위나라에 크게 패한 후 수도를 집안에서 위나라 영토인 낙랑군 바로 코앞인 대동강 북쪽으로 옮긴다고 한다. 그들의 소설에서 낙랑군은 대동강 남쪽에 있다.
강단유사사학 종사자들도 이러한 소설에는 낯이 뜨거웠는지 동천왕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곳이라는 새로운 소설을 창작한다. 급조 평양을 등장시킨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동천왕 천도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3.10. 현재)
----------------------------
평양성(平壤城) : 이 기사의 평양성 위치에 대해서는 현 북한 평양설(채희국, 25~26쪽 ; 정찬영, 14쪽; 손영종, 153~154쪽), 현 북한 자강도 강계설(이병도, 373쪽; 徐永大, 114~137쪽). 현 지안시 동대자(東台子)유적설(魏存成, 33쪽), 현 지안시 양민지역설(張福有, 14~15쪽; 임기환, 252쪽), 환런[桓仁]지역 나합성설(조법종, 188~194쪽), 현 집안현성[국내성]설(심광주, 181쪽; 김희선, 154~155쪽; 여호규, 76쪽, 강진원, 211~213쪽; 기경량, 254~260쪽) 등이 있다.
현 북한 평양설은 북한학계의 주류 견해인데, 당시는 북한 평양지역에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수용하기 어렵다. 여러 견해 중 현 지안시 평지성인 집안현성[국내성]이 다수의 지지를 받는 견해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이른바 국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성벽 및 성 내부 발굴 조사 결과 3세기 후반 이상으로 올라가는 유적을 찾기 힘들다. 이 때문에, 동천왕 때에 과연 현존 국내성의 성벽이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다. 성벽 축조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현 국내성 일대가 도읍으로서 거주지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평양’이란 이름은 고구려왕의 장지명인 동양(東壤), 중양(中壤), 서양(西壤), 호양(好壤)이란 지명에서 유추하자면 집안 일대의 너른 평지를 가리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천왕 21년(247)의 평양성 위치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는 권순홍, 5~14쪽 참조.
-----------------------------------
그들의 다수똥설은 집안 평지(국내성)가 동천왕이 옮긴 평양이라고 말한다. 즉 동천왕은 천도를 아예 하지 않았다는, 그들의 주특기인, 소설에 불부합하는 사료 부정하기를 시전한다. 그들에 의하면 고구려인들이 할 일이 없어서 집안에서 집안으로 천도했다고 한다. 고구려인들이 허황된 것을 좋아해서 집안을 환도성이라 했다가 국내성이라 했다가 평양이라 했다는 것이다. 일제유사사학을 향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충정을 위해서는 고구려인은 바보가 되어도 좋다는 눈물겨운 일제똥에 대한 중독증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들은 산성에서 평지성으로 옮겼다고 하지만, 조위에게 죽을 뻔한 동천왕이 수도를 산성에서 방어가 더 취약한 평지성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위기의 순간(조위에 쫓겨서 조위 영토 바로 앞에 수도를 옮겨야 될 상황) 아무 말이나 하다 보니 전혀 논리적일 수 없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수서에 의하면 평양 국내성 한성이 고구려의 삼경인데,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겼으면 국내성이라 해야지 평양이라 할 수도 없다.
그들이 인용하는 국내성 발굴조사에서도 그들의 주장이 입증되지 않는다. 똥보다 더 더러운 그들의 똥설을 다시 한 번 검토하자.
--------------------------
그런데 현재 남아있는 이른바 국내성에 대한 지금까지의 성벽 및 성 내부 발굴 조사 결과 3세기 후반 이상으로 올라가는 유적을 찾기 힘들다. 이 때문에, 동천왕 때에 과연 현존 국내성의 성벽이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다. 성벽 축조는 인정하지 않더라도 현 국내성 일대가 도읍으로서 거주지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
동천왕이 247년 천도했는데, 성벽 및 성 내부가 이른 것이 3세기 후반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학자라면 더 이상 동천왕이 국내성으로 천도했다고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꿋꿋하게 성벽은 만들지 않았어도 도읍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동천왕이 조위에 죽을 뻔 했는데 성벽도 없는 곳으로 수도를 이전하였다는 것이다. 일제 똥을 맛보기 위한 그들의 애똥충절을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있으리요.
3. 고구려 수도의 변동
건국 시 수도는 홀본인데 홀본은 금해호(金海湖) 서쪽 구하 유역(지금의 平谷區)이다.
여율왕(서기 12년에서 18년) 시 위나암성으로 천도하였다. 위나암성은 천안평야 북쪽의 도산(都山)으로 추측된다.
산상왕은 209년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 환도성은 지금의 옥전현(玉田縣)으로 추정한다.
동천왕은 247년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평양성은 요양이다.
고국원왕은 342년 환도성으로 천도하였다가 343년 평양 동쪽의 황성으로 천도하였다. 황성은 광개토대왕릉이 있는 집안이다. 집안은 이때 최초로 고구려의 도읍이 된다.
장수왕은 427년 황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양원왕은 552년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다. 장안은 금주로 추정된다.
영류왕은 다시 평양(요양)으로 천도하였다. [자세한 것은 한 상고사 참조]
4.
강단유사사학은 집안의 산성자산성을 환도성이라 하나, 출토된 구획선이 없는 연화문 와당의 연대를 통해 궁전지의 조성 연대를 추정하면 빨라도 5세기로 추정된다고 하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환도성 축성 기사에 대한 주석 (2022.3.9. 현재)
그들 주장에 전혀 증거가 없음을 자인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집안 평지성이 유리왕이 도읍한 국내성이라 주장하나, 최근 중국의 발굴 결과 축성연대가 320년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하므로, 복기대, 「고구려 황성 시대에 대한 시론」, 『예술인문사회융합멀티미디어논문지 6권 1호』, 2016. 401쪽.
집안은 필자가 주장하듯이 고국원왕이 342년 천도한 황성임이 입증되었다고 할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고구려의 수도는 졸본(환인 오녀산성), 국내성(집안 평지), 환도성(집안 산성자산성), 평양(집안 평지성, 현재평양) 순으로 이동되었다 하나 그들 주장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일제 똥맛을 보기 위해 고구려 수도에 일제 똥칠을 해놓았으니 맞을 턱이 없다. 그들은 발굴 결과가 맞지 않으면 성벽이 없는 수도를 만들어서 살았다고 사기를 치면서 실증을 주장하고 있다. 얼마나 더 똥을 처먹어야 그들의 똥에 대한 갈구가 끝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5) (2) | 2023.03.03 |
---|---|
이사부는 둘이었다 (0) | 2023.03.03 |
당나라 동해안의 백제유민 (1) | 2023.03.02 |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3) (1) | 2023.03.01 |
고구려와 후한 [대무신왕과 유수의 일승일패, 모본왕 시부터 후한은 60년간 고구려에 조공] (1) | 2023.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