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열도 상고사

역사회복 2023. 2. 28. 11:20
 
열도 지역은 우리 고대사의 영역이다. 서기전 1000년 이후 한반도의 농경민들이 구주로 건너가 농경이 시작되고, 죠몬인이 야요이인으로 대체되었다. Robbeets, M., Bouckaert, R., Conte, M. et al. “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Nature 599, 2021. p.620.

 

야요이인은 그냥 한국인이다. 일제는 1940년 열도의 지명, 신사명, 사찰명, 성씨명, 동물명, 식물명, 가무와 음악명, 기물(器物)명 등이 모두 한국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조선의 국명에서 유래한 명사고-내선일체 회고자료』란 책을 발간했다. 최재석, 『역경의 행운』, 만권당, 2015. 57쪽.

일제가 식민지배가 확고하므로 진실을 밝혀도 되는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판단하여 발행한 것으로 추측된다. 열도에는 672년 신라가 친신라정권을 나라에 세우기까지, 독립적 고대국가는 없었다. 한반도에서 이주한 이주민들의 100여개 소국시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 舊百餘國, 漢時有朝見者, 今使譯所通三十國.

야마대(야마일)라는 가야계 국가가 중심국인 시대,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 世有王, 皆統屬女王國 --- 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

『후한서』 「동이열전」 왜, 國皆稱王, 世世傳統. 其大倭王居邪馬臺國.

백제 담로의 소국 관리시대, 5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분할 지배시대, 6세기 이후 백제 관료인 왜왕이 지배하는 백제의 직할지와 백제에 예속된 소국의 시대를 거쳐, 백제가 망하자, 신라의 부용국으로서 열도에서 최초의 고대국가가 성립되었다.

8세기 말까지도 열도인은 한국문자와 한국어를 일본의 신라로의 사신단은 통역이 없었고, 당으로의 사신단은 백제유민을 통역으로 고용하였다.(김성호,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1』, 맑은소리, 1996. 31쪽.)

사용하고 한국옷을 입고 한국음식을 먹었다. 최재석, 『백제의 대화왜와 일본화 과정』, 일지사, 1991. 440-441쪽.

따라서 8세기 초에 작성된 「일본서기」 「고사기」는 한국말로 쓰여져 있어야 하나 후세(평안시대와 그 이후)의 문자와 말로 조작되어 있다. 최재석, 위 책, 441쪽.

「일본서기」가 8세기에 쓰여진 사서라는 강단유사사학의 말은 전부 거짓이다.

『훈몽자회』에 의하면 16세기 倭의 음은 와이다. 大倭=大和는 ‘다이와’ 정도로 읽을 수 있다. 야마토라고 읽을 수는 없다. 열도의 중심국으로 『삼국지』에 야마일국(邪馬壹國), 『후한서』에 야마대국(邪馬臺國)이 나오니, 열도가 3세기부터 왜(예)집단이 야마토라는 왕조를 중심으로 가야 백제 신라의 영향 없이 독립적인 나라로 출발하였다고 날조하기 위해, 일제유사사학은 大倭=大和를 야마토라 발음하면서 大倭=大和가 3세기에도 있었던 것처럼 날조하고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열거되는 나라들은 왜계 나라도 있었을 수 있지만 대부분 왜집단과는 무관한 나라였다. 야마대(야마일)는 김해김씨선원보략(金海金氏璿源譜略)의 신녀와 함께 떠난 거등왕의 아들 선의 기사로 볼 때 여왕이 있는 가야계 이주민의 나라이다.

야마대(야마일)국은 여왕이 173년 신라에 사신을 보냈으며 『三國史』 「新羅本紀」 阿達羅 尼師今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비미호는 여왕 개인의 이름이 아닌 여왕을 호칭하는 명칭으로 추측된다.

3세기 중반에는 조위에도 사신을 보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 景初二年六月, 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 --- 其四年, 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

야마대국이 2세기와 3세기에 구주의 중심국이었던 사실을 이용하고자 일제유사사학은 가공 왜왕조의 명칭을 야마토라 하였다. 일제가 만든 『조선의 국명에서 유래한 명사고-내선일체 회고자료』에 의하면, 나라와 오사카에는 백제 지명이 많고, 가야계 지명은 열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최재석, 『역경의 행운』, 만권당, 2015. 60쪽.

이는 가야계가 백제보다 이른 시기에 대규모로 열도에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일제유사사학은 열도가야를 지칭한 지역명으로 사용된 왜를 왜집단의 왜로 곡해하여 가공의 왜계 야마토 왕조를 날조하고 있다.

『삼국지』와 『후한서』 왜전도 왜집단의 왜와 열도를 의미하는 왜를 혼동하여 열도의 나라를 왜라고 기술하면서 문신을 한다는 왜집단의 특성을 함께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로 왜집단과 열도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왜라는 말로 함께 기술하고 있다. 열도에 관해 별도로 기술한 사료는 없으므로, 다음에서 『삼국사』에 나타난 왜를 왜집단의 왜와 열도의 나라를 의미하는 왜로 구분하면서, 열도에 관해 기술한다.

 

1. 韓의 왜 (집단명)

서기전 50년과 『三國史』 「新羅本紀」 혁거세왕 八年, 倭人行兵, 欲犯邊, 聞始祖有神德, 乃還.

서기 14년에 『三國史』 「新羅本紀」 남해왕 十一年, 倭人遣兵舩百餘艘, 掠海邊民戶

왜가 신라를 침략하는데 당시 신라가 韓에 있으므로 이 왜는 韓의 왜집단을 의미한다.

서기전 20년 호공이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왜인도 신라왕을 존경한다고 말하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혁거세왕 38년, 自辰韓遺民, 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호공도 바다를 건너온 왜인이며 『三國史』 「新羅本紀」 혁거세왕 38년, 瓠公者, 未詳其族姓, 夲倭人, 初以瓠繋腰, 度海而來, 故稱瓠公

왜인도 신라왕을 존경한다고 하므로 서기전 20년 이전에 韓의 왜집단 중 일부가 신라에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탈해왕은 왜국 동북 천리에 있는 다파나국 사람이라 하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왕 원년, 脫解夲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여기의 왜도 韓의 왜집단을 의미하며, 탈해가 왜인이므로 다파나국은 요동반도에 있었던 왜집단의 나라이다.

서기 59년 신라는 왜와 우호관계를 맺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왕 3년, 夏五月, 與倭國結好交聘.

당시는 경주로의 이동 전이므로 역시 韓의 왜이다.

2. 영산강 왜 (집단명)

서기 73년 왜인이 목출도를 침략하였다.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왕 十七年, 倭人侵木出㠀,

백제는 경상도로 이전한 신라에게 복속을 요구하여 신라가 거부하자 서기 64년부터 서기 76년까지 백제와 신라는 전쟁중이었으므로, 서기 73년 신라를 공격한 왜는 백제가 신라와의 전쟁에 동원한 전라도(영산강) 왜집단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가왜 신왜 전쟁에서 기술한, 193년 기근으로 신라에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왜, 208년 신라의 국경을 침범한 왜도 전라도왜이다. 전라도 왜는 포상팔국으로 209년 212년 가야와 신라를 공격하였고, 399년 신라에 대규모로 항복하였고, 403년부터 405년 사이에 나라의 고구려계 국가로 보내졌다.

3. 열도의 가야계 왜 (지역명)

121년 왜가 신라의 동쪽 변경을 침략하고 『三國史』 「新羅本紀」 지마왕 10년 夏四月, 倭人侵東邊.

122년 왜의 대규모 침략 소문으로 사람들이 도망가며, 『三國史』 「新羅本紀」 지마왕 十一年, 夏四月, 大風東來, 折木飛瓦. 至夕而止. 都人訛言, “倭兵大來.” 爭遁山谷. 王命伊湌翌宗等, 諭止之.

123년에는 왜와 강화한다. 『三國史』 「新羅本紀」 지마왕 十二年, 春三月, 與倭國講和.

그런데 신라는 94년과 『三國史』 「新羅本紀」 파사왕 十五年, 春二月, 加耶賊圍馬頭城. 遣阿湌吉元, 將騎一千擊走之.

96년 『三國史』 「新羅本紀」 파사왕 17년 九月, 加耶人襲南鄙. 遣加城主長丗拒之, 爲賊所殺. 王怒, 率勇士五千, 出戰敗之, 虜獲甚多.

가야의 침략을 물리치고, 97년 가야와 화친한다. 『三國史』 「新羅本紀」 파사왕 十八年, 春正月, 舉兵欲伐加耶, 其國主遣使請罪, 乃止.

102년에는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분쟁과 관련하여 가야와 신라의 견해 차이가 있었으며, 『三國史』 「新羅本紀」 파사왕 二十三年, 秋八月, 音汁伐國與悉直谷國爭疆, 詣王請決. 王難之謂, “金官國首露王, 年老多智識.” 召問之. 首露立議, 以所爭之地, 屬音汁伐國. 於是, 王命六部, 㑹饗首露王. 五部皆以伊湌爲主, 唯漢祇部以位卑者主之. 首露怒, 命奴躭下里, 殺漢祇部主保齊而歸. 奴逃依音汁伐主陁鄒干家. 王使人索其奴, 陁鄒不送. 王怒, 以兵伐音汁伐國, 其主與衆自降. 悉直·押督二國王來降.

106년 신라가 가야를 정벌하고, 『三國史』 「新羅本紀」 파사왕 27년 秋八月, 命馬頭城主, 伐加耶.

115년 2월 가야가 신라를 침략하고, 『三國史』 「新羅本紀」 지마왕 四年, 春二月, 加耶寇南邊.

115년 7월 신라가 가야를 공격하다 복병을 만나 후퇴하며 『三國史』 「新羅本紀」 지마왕 四年, 秋七月, 親征加耶. 帥歩騎度黄山河, 加耶人伏兵林薄以待之. 王不覺直前, 伏發圍數重. 王揮軍奮擊, 決圍而退.

116년 가야를 공격하였으나 비가 와서 돌아왔다. 『三國史』 「新羅本紀」 지마왕 五年, 秋八月, 遣將侵加耶, 王帥精兵一萬以繼之. 加耶嬰城固守. 㑹久雨乃還.

따라서 121년, 122년, 123년의 왜는 대마도와 구주의 가야 분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와의 다툼에서 가야가 밀리자 가야는 121년 열도가야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고, 이 공격이 왜의 공격 소문만으로 신라인들이 골짜기로 도망갈 정도로 효과가 있어 신라와 가야는 123년에 평화조약을 맺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열도의 가야도 158년과 『三國史』 「新羅本紀」 아달라왕 五年, 春三月, 開竹嶺. 倭人来聘.

173년 『三國史』 「新羅本紀」 아달라왕 二十年, 夏五月, 倭女王卑彌乎遣使來聘.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232년에서 294년까지 왜가 다시 침략하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조분왕 三年(232년), 夏四月, 倭人猝至圍金城. 王親出戰, 賊潰走. 遣輕騎追擊之, 殺獲一千餘級.

『三國史』 「新羅本紀」 조분왕 4年(233년) 五月, 倭兵宼東邉. 秋七月, 伊湌干老與倭人戰沙道, 乗風縱火焚舟, 賊赴水死盡.

『三國史』 「新羅本紀」 첨해왕 三年(249년), 夏四月, 倭人殺舒弗邯于老.

『三國史』 「新羅本紀」 유례왕 四年(287년), 夏四月, 倭人襲一禮部, 縱火燒之, 虜人一千而去.

『三國史』 「新羅本紀」 유례왕 六年(289년), 夏五月, 聞倭兵至, 理舟楫, 繕甲兵.

『三國史』 「新羅本紀」 유례왕 九年(292년), 夏六月, 倭兵攻䧟沙道城, 命一吉湌大谷, 領兵救完之.

『三國史』 「新羅本紀」 유례왕 十一年(294년), 夏, 倭兵來攻長峯城, 不克.

이는 신라와 가야가 다시 전쟁을 하기 때문이다. 254년 신라가 고녕가야를 병합한 사실이 확인되고, 3세기 초 포상팔국의 침입으로 가야가 약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신라의 가야에 대한 지속적 공격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신라의 공격에 대응하여 가야는 열도가야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한 것이 232년에서 294년까지의 왜의 신라 공격이다. 따라서 3세기에 신라를 공격하는 왜도 대마도와 구주의 가야계 국가이다.

열도가야는 4세기 초 신라와 평화적 관계를 원한다. 300년 신라와 왜는 사신을 교환하였고, 『三國史』 「新羅本紀」 기림왕 三年, 春正月, 與倭國交聘.

312년 왜국 왕자는 아찬 급리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三國史』 「新羅本紀」 흘해왕 三年, 春三月, 倭國王遣使為子求婚, 以阿湌急利女送之.

344년 왜는 혼인을 청하였으나 신라가 거절하였고, 『三國史』 「新羅本紀」 흘해왕 三十五年, 春二月, 倭國遣使請婚, 辝以女旣出嫁.

345년에는 신라가 왜와 단교하였다. 『三國史』 「新羅本紀」 흘해왕 36년 二月, 倭王移書絶交.

열도가야가 신라와 화친하려 한 이유는 신라의 지속적인 가야 공격으로 가야의 왕권이 약해진 상황에서 고령의 토착세력이 가야의 왕권을 탈취하자, 김해의 김수로계로 구성되었던 열도가야는 새 가야권력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왜의 화친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6두품도 진급이 가능한 아찬의 딸을 보내거나 혼인을 거절하였고, 급기야는 단교까지 한다.

이는 열도가야가 4세기 초 백제의 열도 진출에 의해 무력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를 믿을 수 없어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신라는 295년에는 백제와 함께 왜를 공격하려고 생각하기도 하였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유례왕 十二年, 春, 王謂臣下曰, “倭人屢犯我城邑, 百姓不得安居. 吾欲與百濟謀, 一時浮海, 入撃其國, 如何.” 舒弗邯弘權對曰, “吾人不習水戰, 冒險逺征, 恐有不測之危. 况百濟多詐, 常有呑噬我國之心, 亦恐難與同謀.” 王曰, “善.”

이는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그동안 신라를 괴롭혔던 열도의 가야계 국가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4세기에 백제가 열도에 성공적으로 진출하여 담로를 설치하고 주변 소국을 관리하는 것을 지켜본 신라는 열도의 가야계 국가가 더 이상 신라에 위협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왜의 화친 요구에 냉정하게 대응하였다. 따라서 4세기 전반기에 신라와 외교관계를 원하는 왜도 대마도와 구주의 가야계 국가이다.

백제의 열도 진출 시 백제에 저항한 세력은 열도에서 백제에 패배하여 쫓겨나자, 346년과 『三國史』 「新羅本紀」 흘해왕 三十七年, 倭兵猝至風㠀, 抄掠邊戸, 又進圍金城急攻.

364년 『三國史』 「新羅本紀」 나물왕 九年, 夏四月, 倭兵大至,

신라를 침입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때의 왜는 백제의 열도 점령에 저항한 가야계 국가이다.

4. 영산강왜 (집단명)와 열도의 백제계 왜 (지역명)

393년 신라를 침입한 왜는 『三國史』 「新羅本紀」 나물왕 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왜가 바로 금성을 공격했으므로 영산강 왜가 아닌 백제 지배 하의 열도 소국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 ‘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라 묘사된 왜이다. 백제가 371년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고구려는 백제를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백제에 결정적으로 승리하지 못하자 고국양왕은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391년 신라와 화친을 맺고 볼모를 받았다. 『三國史』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九年, 春, 遣使新羅修好, 新羅王遣姪實聖為質.

『三國史』 「新羅本紀」 나물왕 三十七年, 春正月, 髙句麗遣使. 王以髙句麗強盛, 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삼국사』에는 392년으로 되어 있으나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이 391년이므로 391년으로 보아야 한다. 신라만 볼모를 보냈으므로 고구려가 신라를 위협이나 무력으로 굴복시켰을 것이다. 어떻든 신라가 고구려 편에 속하게 되자, 백제는 열도의 소국들을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신라의 백제 공격을 저지하였다. 이러한 공격이 광개토대왕릉비에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백제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393년의 공격은 신라가 이겼거나 규모가 컸으므로 신라측 사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393년 신라를 공격한 왜는 열도의 백제계 소국들이다.

광개토대왕 즉위 후 백제는 계속 패배하고, 396년에서 397년 백제의 수도인 韓백제에서 대패하자, 광개토대왕릉비 병신년조 기사

열도에서의 징발을 강화하기 위해 397년 태자 전지를 왜왕으로 파견하여 『삼국사』 「백제본기」 아신왕 六年, 夏五月, 王與倭國結好, 以太子腆支爲質.

열도를 직접 통치한다. 당시는 구주가 열도의 중심지였으므로 전지는 구주에 파견되었다.

399년 영산강왜는 백제의 전쟁동원에 지쳐서 신라로 도망갔다. 광개토대왕릉비 기해년조 기사

광개토대왕은 이제 백제가 동원할 세력은 전지가 왜왕으로 있는 열도백제와 열도백제의 부용국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고 열도 정벌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예상대로 400년 열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를 구원함은 물론 열도로 건너가서 열도백제를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 기사 중 앞부분에 나오는 임나가라 종발성은 대마도이다. 대마도는 열도 세력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거점이 되므로 열도백제의 성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은 대마도의 임나가라 종발성을 점령하고 구주 북부를 점령하였을 것이다. 구주 남부는 백제의 본진이므로 비교적 소수의 고구려군은 구주 남부 대신 당시 열도의 변두리였던 본주와 사국 방면으로 진군하였을 것이고, 나라까지 점령하여 열도의 남북국 시대를 성립시켰다.

5. 열도의 고구려계 왜 (지역명)

광개토대왕릉비에 안라인수병을 점령지에 두었다고 한 것으로 추정되므로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의 명칭은 안라국으로 추측된다. 안라국이 오사카에 도읍하였다면, 열도의 예부여 세력으로 볼 수 있다. 예부여의 일부가 3세기 말 4세기 초 무렵에 오사카로 이주하여, 현재 의라신사가 오사카에 있으며, 예부여는 비류백제로 韓에서 백제의 지속적 침략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어 백제를 가장 증오했을 수 있으므로, 고구려가 열도 백제를 제어하기 위해 예부여 세력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열도 북부를 점령하였다는 것은 맥락상 확실하지만, 그 이외에 광개토대왕에 복속한 국가가 안라국인지, 안라국이 예부여의 세력인지는 추정이므로 이하에서는 오사카의 고구려계 국가라고만 표시한다. 전술하였듯이 403년과 405년 신라의 포로가 되었던 영산강왜가 나라로 보내져서 저수지와 농경지 등을 만드는데 사역되었는데, 최재석, 『일본 고대사의 진실』, 일지사, 1998. 52쪽

이는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성왕은 402년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내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실성왕 元年, 三月,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이는 자신을 볼모로 보냈던 내물왕에게 복수도 하면서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미사흔이 보내진 왜는 오사카의 고구려계 국가이다. 신라는 405년 퇴각하는 왜를 공격했고, 『三國史』 「新羅本紀」 실성왕 四年, 夏四月, 倭兵來攻明活城, 不克而歸. 王率騎兵, 要之獨山之南, 再戰破之, 殺獲三百餘級.

407년 왜가 동쪽 변경을 침범했고, 『三國史』 「新羅本紀」 실성왕 六年, 春三月, 倭人侵東邊.

408년 대마도의 왜 군영을 공격하려다 포기하였고, 『三國史』 「新羅本紀」 실성왕 七年, 春二月, 王聞倭人於對馬㠀置營, 貯以兵革資粮, 以謀襲我, 我欲先其未發, 㨂精兵擊破兵儲. 舒弗邯未斯品曰, “臣聞‘兵㓙噐, 戰危事.’ 况渉巨浸以伐人, 萬一失利, 則悔不可追. 不若依嶮設䦕, 來則禦之, 使不得侵猾, 便則出而禽之. 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 䇿之上也.” 王從之.

415년 왜인과 풍도에서 싸웠다. 『三國史』 「新羅本紀」 실성왕 14년 八月, 與倭人戰於風㠀, 克之.

이들 왜 역시 열도고구려이다. 영산강왜를 전부 나라로 보내라는 광개토대왕의 명령을 신라가 충실히 이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도 고구려의 연합국으로서 광개토대왕의 원정에 식량 등의 지원을 하였을 것인데, 별다른 소득은 없고, 오히려 400년의 전쟁과 무관하게 399년 신라에 항복한 영산강왜를 전부 나라로 보내라는 것은 신라에겐 억울한 일이었다.

신라가 403년 영산강왜를 전부 보내지 않자 405년 열도고구려가 분개하여 신라를 공격했고, 고구려의 힘을 등에 업은 열도고구려가 결국은 영산강왜를 전부 차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415년까지 수차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대마도와 구주 북부도 열도고구려 점령하에 있었으므로 열도고구려의 중심지가 오사카이더라도 신라를 공격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신라는 대마도가 침략의 거점임을 알고 대마도를 공격하려 했으나 해전의 경험이 많지 않아 포기하였다.

412년 신라는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는데, 『三國史』 「新羅本紀」 실성왕 十一年, 以奈勿王子卜好質於髙句麗.

고구려가 볼모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가 전후처리에 대해 불만을 갖고 반항하는 듯하자 신라에 경고하기 위해 볼모를 요구했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새로 확보한 후연 지역(서진의 유주와 평주)을 경영하고 위성국으로 세운 북연을 관리하는데 집중하여야 했고, 신라 정도는 아무 때라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눌지왕은 박제상의 충성으로 418년 복호를 고구려에서 『三國史』 「新羅本紀」 눌지왕 二年, 春正月, 親謁始祖廟. 王弟卜好自髙句麗與堤上奈麻還來.

미사흔을 열도고구려에서 『三國史』 「新羅本紀」 눌지왕 2년 秋, 王弟未斯欣自倭國逃還.

구출하였다.

431년부터 500년까지 『삼국사』엔 13회 왜가 침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역사상 가장 왜가 빈번하게 침략하는 시기이다. 433년은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는 해이고, 『삼국사』 「백제본기」 비유왕 7년 秋七月, 遣使入新羅, 請和.

『삼국사』 「신라본기」 눌지왕 17년 秋七月, 百濟遣使請和, 從之.

6. 백제의 열도 전부 통치 왜왕

500년 무렵은 열도에서 열도백제가 열도고구려를 다 몰아내고 열도의 남북국시대를 끝내는 시기로 추정된다. 5세기 초 광개토대왕에게 열도에서도 후퇴했던 백제는 광개토대왕 사후 열도에서는 조금씩 반격하여 5세기 말이나 6세기 초에는 열도를 백제의 관리 하에 두게 되고 513년 이후 나라에 실무 관료와 왜왕을 파견한다.

5세기에 왜5왕이 송에 조공하는 것은 고구려계 국가와의 경쟁관계 하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왜왕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면도 있지만, 왜왕 자신보다 열도 소국의 세력가들에게 벼슬을 주어서 백제 편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진은 13인, 제는 23인의 작호를 요구하는데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백제가 고구려계를 몰아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431년 이후 5세기에 신라를 침략하는 왜는 백제에 밀려남에 따라 생존을 위해 신라로 해적질을 하러 간 고구려계 열도 소국들이다.

열도의 중심지가 구주였을 때, 백제의 구주 책임자는 구마모토 웅본현(熊本縣) 아시기타(葦北 위북) 지역에 있었고, 최재석, 위 책, 27-31쪽.

6세기에 나라를 확보하자 왜왕은 나라에도 있게 되었다. 아시기타의 책임자에 대해 「일본서기」에 관위는 나와있지 않고 그의 아들의 관위가 백제의 16계급 관위 가운데 제2의 관위인 달솔이라 기재되어 있다. 최재석, 위 책, 29쪽.

나라를 확보한 후에는 나라가 열도 경영의 중심이었다고 보면 나라의 책임자가 구주의 책임자보다 더 관위가 높았을 것이다. 나라의 책임자는 왕의 계급이었고, 구주의 책임자는 왕이나 후의 계급이었을 것이다. 구주 웅본(熊本)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 금동관모, 금동이(履: 신발), □鹵大王世가 새겨진 환두대도, 동경, 대도, 옥류(玉類) 등이 발굴되었는데, 소진철, 『백제 무령왕의 세계』, 주류성, 2008. 136-141쪽.

이는 피장자가 개로왕 시의 구주 왜왕임을 의미한다. 나라 법륭사 근처의 후지노기 고분에서도 6세기 후반의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 금동이, 동경, 대도, 옥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피장자가 나라의 왜왕임을 의미한다. 후나야마 고분의 금동관과 금동이는 익산 입점리 1호분의 것과 모양과 제작기법이 쌍둥이처럼 같다. 소진철, 위 책, 151-152쪽.

후나야마 후지노기 익산의 유물들 모두 무령왕릉의 유물과 거의 같다. 소진철, 위 책, 155쪽.

일제유사사학은 후나야마 고분이 발견된 뒤에도 발굴보고서를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다가, 소진철, 위 책, 136쪽.

환두대도의 명문을 왜곡하여 야마토왕이 5세기 구주의 호족에게 하사한 칼이라 주장하고 있다. 소진철, 위 책, 140쪽.

고분의 유물만 보아도 열도가 백제의 한 지방이었음이 확인되므로, 일본 정부는 전술한 바와 같이 왜왕묘의 후보묘까지 과학적 조사와 발굴을 금지하고, 몰래 고분을 발굴하면서 발굴결과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야마대(야마일)국은 가야계의 국가였고, 백제 담로가 3세기 말 늦어도 4세기 중엽부터는 열도를 지배하게 되면서 열도의 소국은 백제의 관리 하에 있게 되었고, 5세기 백제 고구려의 남북국시대 후, 6세기 백제가 열도 전역을 지배하므로 야마토왜라는 왕조가 있을 여지가 전혀 없다. 야마토왜는 후세에 창작된 가공의 왕조이고, 열도는 우리 고대사의 영역이었다.

일제유사사학은 열도의 고대사를 고분시대 아스카시대 나라시대로 구분하는데, 이는 열도의 고대사가 우리 역사였음을 부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야마토임나 소설에 의하면 야마토시대와 일본시대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함에도, 야마토시대라 하였다가 야마토정권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발각될까 두렵고, 일본시대라 하였다가 일본이 백제임이 알려질까 두렵고, 가공의 야마토와 실재했던 일본이 연결될 수 없음이 밝혀질까 두려워, 그들은 그들의 뿌리를 부정하고 있다. 그들이 날조한 고대사는 우리와 그들이 공유하는 역사이므로, 날조자들 자신도 날조의 피해자에 포함된다.

일제는 뿌리를 부정하고 있다. 일본은 고대사가 없다. 열도가 삼국의 역사강역임을 숨기기 위해서 그들은 일본인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역사를 쓰고 있다. 야마토 가야는 있었어도 야마토 왜는 있었던 적이 없다. 그들이 야마토정권이라 날조하는 나라의 왜(영산강왜)는 신라의 포로였다가 고구려계 열도국가인 안라국의 피지배민에 불과하다. 왜집단은 열도에서도 고대국가를 만든 적이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이 한국의 일부임을 부정하기 위해 날조한 소설을 한국에까지 퍼뜨리고 있다. 그들은 전혀 실증과 무관하다. 일본서기에 왜가 일본의 속국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들은 일제의 돈 몇푼에 사기를 치면서 교수질을 하고 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