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전쟁 백위전쟁의 전장]
1. 백제와 전연의 전쟁
『진서』 「모용황재기」 345년 기사에, 봉유가 모용황에게 고구려 백제 우문부 단부의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라고 하면서 이주정책의 필요성을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
『진서』 「모용황재기」 皝記室參軍封裕練日 --- 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 皆兵勢所徙 非如中國慕義而至 咸有思歸之心
慕容皝의 記室參軍 封裕가 간하여 말하기를, … “句麗와 百濟 宇文部와 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끌려온 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義를 사모하여 온 사람들이 아니어서,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
이는 전연과 백제가 전쟁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백제가 예부여를 이겼지만 당시 모용황의 세력이 강하여 낙랑군은 차지하지 못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이 기사의 백제를 부여의 오기라고 근거 없이 주장한다. 그들의 창작소설에 부합하지 않으면 전부 오기고 오류라 주장하여 비학문성을 드높인다.
그러나 그들의 날조 소설과는 무관하게 중국의 신뢰성 있는 사서는 백제와 전연이 전쟁한 배경이 기술되어 있다. 백제와 전연은 예부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자치통감』은 346년 1월 하충의 사망을 기술하면서 하충과 관련된 사실을 기술한다. 『자치통감』은 하충이 모용황이 337년 10월 『晉書』 「帝紀」 咸康三年 冬十月丁卯,慕容皝自立為燕王
연왕을 칭하는 것을 허용하는데 관련되었다는 것과, 모용황이 예부여를 복속시킨 과정을 기술하면서, 예부여가 취약해진 원인이 백제의 공격으로 연(모용황) 쪽으로 밀려난 것이라 한다.
---------------------------------
『자치통감』 권97 진기39 현종성황제 하 영화 2년 --- 初,夫餘居於鹿山,為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皝以玄為鎮軍將軍,妻以女。
당초, 夫餘는 鹿山에 거하였는데, 百濟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하여 서쪽으로 燕 가까이 옮겨갔으나 대비가 없었다. 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을 보내어 모용군과 모용각, 모여근 세 장수의 17,000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하게 하였다. 모용준은 가운데서 지시를 내렸고, 군사는 모두 모용격에게 맡겼는 데, 마침내 부여를 함락시켜 그 왕 玄과 부락민 50,000여인을 사로잡아 돌아왔다.모용황은 玄을 진군장군으로, 그 딸을 아내로 삼았다.
----------------------------
『자치통감』에 의하면 337년 이전 비류왕 때 백제는 예부여를 공격한 것이 되는데, 『진서』 「모용황재기」에 의하면 모용황 3년 즉 336년 묘용황이 예부여를 정복하였다. 『진서』 「모용황재기」 三年, 遣其世子儁與恪率騎萬七千東襲夫餘,克之,虜其王及部眾五萬餘口以還。
따라서 백제는 모용황이 예부여를 공격하는 336년 이전 어느 시점에 예부여에게 본거지를 이동시킬 정도의 타격을 주었다. 모용외는 서진이 복국시킨 예부여를 점령하려 하지 않았지만, 모용황은 진은 남쪽으로 갔고, 다른 세력이 예부여를 정복할 수도 있다 생각하여 바로 점령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336년 이전 어느 시점의 백제의 예부여 공격을 346년 있었다고 날조하며 백제가 아니라 백제로 표현된 세력이라고 하여 그들의 문학에 부합하지 않는 사서의 내용은 가차없이 부인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백제건국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4.4. 현재)
『자치통감(資治通鑑)』 권97 진기(晉紀)19 효종목황제(孝宗穆皇帝) 上之上에 따르면 부여는 346년 백제로 표현된 세력에 의해 서쪽으로 수도를 옮겼다.
『자치통감』과 『진서』를 종합하면 336년 이전 어느 시점에 백제는 예부여를 침공하여 예부여의 상당부분을 점령하였는데, 337년 모용황이 잔존 예부여 지역을 점령하였다. 예부여의 영토를 두고 백제와 전연이 싸웠을 것이다. 그래서 345년 전연에 백제의 포로가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후술할 3차례의 백위전쟁도 한 줄만 썼다. 김부식이 韓백제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부식이 참고한 우리 사서에는 백연전쟁이 기록되었겠지만, 중국 사서에 명시적 기술이 없어서 김부식은 백연전쟁을 기술하지 않았다. 김부식의 무식으로 대륙백제 대부분이 사라졌다.
강단유사사학은 336년 이전 어느 시점의 백제의 예부여 공격을 346년 있었다고 생각하며, 명시적으로 두 사서가 백제라고 썼음에도 백제를 부여의 오기라거나 백제로 표현된 세력이라고 하는 등 학자라 하기에는 심히 저질스런 주장을 하고 있다. 백제와 전연이 예부여를 두고 싸웠기 때문에 백제가 부여의 오기가 될 수는 있을 수가 없음에도 『자치통감』과 『진서』까지 날조사서로 만드는 그들의 용감무쌍함을 우리는 정말로 정말로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2. 백제와 위의 전쟁
백제가 고구려의 유주를 차지하자 위는 484년 백제에게 싸움을 걸었다. 韓백제는 중국 왕조가 한 번도 침입하지 않았다. 예군 남려의 사례에서 보듯이 韓백제는 중국왕조에게는 무가치한 땅이었다. 고구려는 韓백제 지역이 백제 경제의 핵심지역임을 알고 백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격했지만, 중국 왕조는 백제의 무역선으로부터 구매하는 먼 나라에서 생산된 사치품이 나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위가 백제를 공격했다는 것은, 쭉 지켜보고 가지려 했으나 고구려가 무서워 보고만 있었던 고구려의 유주 지역을 백제가 차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는 백제가 고구려를 이겨서 놀랬을 것이다. 그래서 484년은 탐색전으로 가볍게 백제를 공격했을 것인데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하여 488년에 마음 먹고 공격하였을 것이다. 백제와 위의 전쟁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ㄱ) 484년
- 『건강실록』: 영명 2년(484년) 북위가 백제를 정벌하여 백제왕 변도(弁都)를 크게 깨트렸다.
『建康實錄』 永明二年 魏虜征之 大破 百濟王弁都
- 『태평환우기』: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했다.
『太平寰宇記』 卷一百七十二 宋-樂臾撰 後魏孝文帝 遣衆征破之
- 『통전』: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어 백제를 정벌했다
『通典』 邊防一 東夷上 百濟, 後魏孝文遣衆征破之
(ㄴ) 488년
- 『삼국사』: 동성왕 10년에 위(魏)가 침공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그들을 물리쳤다.
『三國史』 「百濟本紀」 東城王 十年, 魏遣兵來伐, 爲我所敗.
- 『자치통감』: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에게 패하였다.
『資治通鑑』 卷一百三十六 齊紀二 世祖武皇帝上之下 (永明六年(488) 十二月) 魏遣兵擊百濟, 爲百濟所敗.
- 『남제서』: 삭제된 324자 대부분이 위나라의 치욕적 패배를 기록한 부분이다. 고구려에 대해 建武 3년(496년)의 일을 기록하는 부분에서 원문이 사라진다.
『南齊書』 「東南夷列傳」 高句麗 隆昌元年(493), 以高麗王 樂浪公 高雲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 平二州諸軍事·征東大將軍·高麗王·樂浪公. 建武三年, …… 原闕
고구려에 관작을 주었다는 부분부터 삭제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남제가 502년 망하므로, 삭제된 부분에서 고구려 관련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삭제된 부분에 이어서 나오는 내용은 백제의 공로자에게 관작 수여를 요청하는 것이므로 바로 앞에는 그들의 공로가 나와야 하는데, 그 공로가 중국인들에게 치욕적이어서 누군가가 삭제했다.
『남제서』를 쓴 소자현은 남제를 건국한 소도성의 손자로, 남제는 소자현 할아버지의 나라이다. 『남제서』는 위를 위로(魏虜)라 하여 오랑캐로 간주하고, 『남제서』 「동남이열전」 고구려조에서 위가 중국 왕조인 남제와 오랑캐인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한 일을 기록하고 있다. 『南齊書』 「東南夷列傳」 高句麗 永明七年(489), 平南參軍顔幼明·冗從僕射劉思斅使虜. 虜元會, 與高麗使相次. 幼明謂僞主客郞裴叔令曰: 「我等銜命上華, 來造卿國. 所爲抗敵, 在乎一魏. 自餘外夷, 理不得望我鑣塵. 況東夷小貊, 臣屬朝廷, 今日乃敢與我躡踵.」 思斅謂僞南部尙書李思沖曰: 「我聖朝處魏使, 未嘗與小國列, 卿亦應知.」 思沖曰: 「實如此. 但主副不得升殿耳. 此閒坐起甚高, 足以相報.」 思斅曰: 「李道固昔使, 正以衣冠致隔耳. 魏國必纓冕而至, 豈容見黜.」 幼明又謂虜主曰: 「二國相亞, 唯齊與魏. 邊境小狄, 敢躡臣蹤.」
백제가, 남제를 소자현이 오랑캐라고 생각하는 고구려와 동일하게 취급한 위를, 격퇴한 것은 소자현에게 유쾌한 사건이었다. 소자현에게 백제와 위의 전쟁은 춘추필법이 적용되는 사건이 아니었고 오히려 신나는 사건이었으므로 자세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중원을 차지했던 위가 백제에게 무참히 패배했다는 기록을 본 후세의 중국인들은 이를 참을 수 없었고, 역사서가 써진 이후에도 춘추필법을 적용하여 이 부분을 삭제했다. 중국인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 한적전자문헌자료고는 『남제서』 「동이열전」 백제조 전체를 수록하지 않고 있다. (http://hanchi.ihp.sinica.edu.tw. 2022.3.17. 현재)
(ㄷ) 490년
- 『남제서』: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賛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南齊書』 「東南夷列傳」 百濟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 『남제서』: 建武 2년(495년)에 牟大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난 庚午年에는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銳氣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 (후략)”
『南齊書』 「東南夷列傳」 百濟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위는 이 지역을 차지할 호기라 여기고 488년 대규모로 백제를 공격했을 것이다. 488년에 대패한 위는 미련이 남아 490년에 다시 한 번 공격했지만 또 지고 포기했다. 근초고왕 때 태자(근구수왕)가 한반도백제에서 북진하여 지금의 평양을 점령하고, 더 나아가 수곡성 서북쪽에 이르러 “오늘 이후에 누가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라 하면서 자부했다. 수곡성은 요동반도백제에 있는 성으로 지금의 단동(丹東)시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북진하여 요동반도백제보다 더 북으로 갔으니 자부할 만했다.
그런데 동성왕은 그보다 더한 것을 하였다. 백제는 전성기의 고구려와 위를 상대해서 모두 이겼다. 특히 488년 전쟁의 승리는 중국인들이 분에 겨워 역사서를 지울 정도였으므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 못지 않을 대승이었을 것이다. 만약 위가 백제를 이겼다면, 위는 고구려까지 침공했을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백위전쟁의 실체가 중국 사서에 의해 분명함에도 백위전쟁이 아닌 고백전쟁이라고 소설을 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삼국사』 위 격퇴 기사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2022.3.20. 현재)
북위[魏]가 군사를 보내 와서 … 우리에게 패하였다 : 이와 관련된 내용이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보인다. 그러나 이 경오년(庚午年) 기사는 영명(永明) 8년(490; 동성왕 12년)이 되어 본서와 2년의 차이가 난다. 따라서 본 기사의 연대는 『資治通鑑』 권136 齊紀2 世祖 永明 6년(488)조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북위가 해로로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7, 399쪽)가 있다. 반면 북위가 바다를 건너 백제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에서 백제가 중국 화북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전쟁이 가능하다는 대륙진출설을 주장하는 견해(金庠基, 1967; 方善柱, 1971)도 있다. 백제를 공격한 위의 실체에 대해서는 본서 기술대로 북위로 보는 견해(李明揆, 1983, 91~92쪽), 고구려로 보는 견해(兪元載, 1992, 92~94쪽), 북위와 고구려의 연합군으로 보는 견해(朴眞淑, 2000, 96~97쪽) 등이 있다. 이 중 『南齊書』 권58 百濟傳에 나오는 ‘흉리(匈梨)’ 또는 ‘험윤(獫狁)’이 고구려의 멸칭이라는 점을 고려(兪元載, 1995, 263∼289쪽)해서 대체로 고구려로 보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이 『삼국사기』의 488년 백제와 위의 전쟁기사를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간주하는 근거는 『南齊書』에 나오는 ‘흉리(匈梨)’ 또는 ‘험윤(獫狁)’이 고구려의 멸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흉리와 험윤은 백제가 490년 위를 물리쳤다는 내용의 남제에 보낸 외교문서에 나오는 말이며, 『남제서』는 490년 魏虜(위 오랑캐)가 백제를 공격하여 패했다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어 그들의 억지는 전혀 일말의 타당성이나 논리성도 없다. 그냥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 수준이다.
그들이 머지않아 노벨문학상 등 국제적 문학상을 받아 소설한류를 일으킬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역사학의 문학화와 문헌자료를 개무시하는 초탈문헌주의 유사역사학을 창시한 업적으로 세계역사에 그 이름을 떨칠 것이다. 『삼국사』는 물론 중국 사서인 『건강실록』 『태평환우기』 『통전』 『자치통감』 『남제서』를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볍게 부인하는 그들의 호연지기와 기개는 유사사학자들의 영원한 귀감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열도 상고사 (1) | 2023.02.28 |
---|---|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1) (0) | 2023.02.27 |
고구려 초기 영토 확장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0) | 2023.02.26 |
단군이 신화라고? 삼국지와 후한서에도 나오는데. (2) | 2023.02.25 |
제장성: 중국 동부 조선의 명백한 증거 (1) | 2023.0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