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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 영토 확장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고구려 초기 동북으로의 영토 확장] ​ 고구려는 서기전 36년 요동외요 동북쪽으로 추정되는 비류국, 서기전 32년 당산지역의 소국으로 추정되는 행인국, 서기전 28년 북옥저, 서기전 9년 홀본 북쪽의 선비를 복속시켰고, (삼국사기) ​ 여율왕이 12년 漢으로부터 독립한 후, 14년 양맥과 漢의 고구려현을 점령하였다. 14년과 18년 사이에 고구려는 요동고새까지 진출하였다. 이는 패수와 대수 사이의 백제인들이 흉년으로 고구려로 도망갔다는 기사에 의해 알 수 있다. 『삼국사』 「백제본기」 온조왕 37년 夏四月, 旱, 至六月乃雨. 漢水東北部落饑荒, 亡入髙句麗者一千餘戸, 浿·帶之間, 空無居人. ​ 패수와 대수는 낙랑군을 흘렀던 강들이다. 왕검성의 패수는 영정하였지만, 왕검성이 파괴되고 왕검성 주민을 낙랑군으로..

역사 2023.02.26

단군이 신화라고? 삼국지와 후한서에도 나오는데.

단군조선(=삼한조선)의 강역 ​ ​ (1) 진수와 범엽의 횡설수설 ​ 진수와 범엽은 낙랑·대방군의 韓·倭 침략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 시 획득한 사료와 침략군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동이의 역사에 관해 쓸 수 있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踰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長老說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 ​ 그러나 이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약탈한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 가장 중요한 실수가 삼한조선의 삼한과 준왕의 중마한(중마한 시의..

역사 2023.02.25

제장성: 중국 동부 조선의 명백한 증거

기자는 조선으로 갔는데, 그의 무덤이 하남성 상구에 있으므로, 그가 간 조선은 번조선이다. 상이 주에 망하였을 때, 번조선은 하남성 산동성을 포함하여 중국 동부 즉 과거 삼한조선의 번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 周가 商을 멸한 후, 여상(강태공)을 齊 영구(營丘)에 봉하였는데, 成王 시 번조선인들이 관숙과 채숙의 반란에 가담하자 주공이 영고씨(淮)와 박고씨(奄)를 진압하면서, 제나라 주변의 번조선은 제나라가 정벌하도록 하여 『사기』 「제태공세가」 及周成王少時,管蔡作亂,淮夷畔周,乃使召康公命太公曰:「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五侯九伯,實得征之。」 齊由此得征伐,為大國。都營丘。 ​ 제나라가 번조선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되었고, 번조선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번조선 남부가 서언왕의 조선이다. 이 글에선 ..

역사 2023.02.24

기자조선의 허위성

삼한조선(단군조선 전기)은 서기전 2333년에 건국하여 서기전 1500년경부터 다시 시작되는 한랭화로 서기전 1285년에 망한다. 『단군세기』는 이를 반란을 일으킨 고등의 혈통이 단군이 된다고 기술하며, 『태백일사』는 삼한이 삼조선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태백일사』 「마한세가 하」 五月, 改制三韓爲三朝鲜。 ​ 『제왕운기』는 전조선이 망하고 164년 후에 기자조선이 성립하는데, 위만에 망한 준왕의 조선이 기자조선이며, 기자조선 후, 위만조선-삼한 소국들-삼국의 순으로 이어진다고 기술한다. 『규원사화』는 서기전 1120년경 단군조선이 망한다고 한다. ​ 『제왕운기』가 말하는 공백 164년과 『규원사화』가 타 사서보다 늘린 전조선의 존속기간은 기자조선을 합리화하기 위한 기간설정이다. 삼한조선이 망한 서기전..

역사 2023.02.23

임나가 가야인가?

임나=가야 주장의 배경 ​ 일제와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를 비롯한 여러 소국들이 한반도에 있었던 나라라고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이름이 같으니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는데(물론 이들 국가는 열도에 있는 소국의 이름이다) 문제는 임나이다. 한국에는 가야가 있었고, 「일본서기」에는 임나가 나온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라고 날조한다. ​ 그들은 「일본서기」의 임나가 가야를 말하므로 「일본서기」의 내용이 한반도 남부에 관한 이야기라 주장한다. 이러한 날조에 기반하여 강단유사사학은 가공의 야마토왜가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한다. ​ [야마토왜라는 왕조 자체가 날조이고, 일본이 사실은 백제를 의미하고, 일본..

역사 2023.02.20

근초고왕은 한성에서 한성으로 천도했다.

동서양성 ​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을 동시에 통치해야 했던 백제는 한반도에 별도를 두는 것이 당연히 필요하였다. 김부식은 동서양성을 기술하는 『구당서』를 단순히 인용하기만 한다. 『三國史』 「雜志 地理 百濟」 舊唐書云, “百濟扶餘之别種, 東北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 北髙麗. 其王所居有東西两城.” ​ 『구당서』는 그 왕은 거주하는 곳이 동서 두 성이 있다고 명시한다. 『신당서』도 동서 두 성이 있다고 한다. 『新唐書』 「東夷/百濟列傳」 百濟,扶餘別種也。直京師東六千里而贏,濱海之陽,西界越州,南倭,北高麗,皆踰海乃至,其東,新羅也。王居東、西二城 ​ 웅진과 사비를 동서양성으로 보는 견해도 정재윤, 「웅진성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백제문화 59』, 백제문화연구소, 2018. 5쪽.​ 있으나 바로 붙어 있는 ..

역사 2023.02.19

칠지도 명문 해석

칠지도의 명문에 의해서도 왜왕은 백제의 관료임이 드러난다. 칠지도 앞면 연호와 달에 대해 여러 견해가 제시되나 박남수의 추정에 따라 봉원(奉元)으로 하고 박남수, 「백제 전지왕 ‘奉元四年’銘 칠지도와 그 사상적 배경」, 『東硏(동연) 10』, 2021. 5-9쪽. ​ X-Ray 판독에 의한 십일월(十一月)로 하고, 박남수, 위 글, 30쪽. 408년 11월 16일은 동짓날이다. 1981년 일본 NHK가 X-Ray로 촬영하여, 대체로 ‘五月’로추정하였던 것을, ‘十一月’로 밝혔다. ​ 앞면 22번째 글자는 出, 生, 世, 帶, 可, 以로 추정되는데 문맥상 出로 보았고, 뒷면 17번째 글자는 意, 音, 德, 旨로 추정되는데, 문맥상 意로 보았다. ​ (앞) 奉元四年十一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 出辟百兵 宜..

역사 2023.02.18

연나라의 위치

연소왕 이전 연나라의 위치 ​ 한국사를 날조하기 위해 가장 심하게 날조된 것은 연나라 위치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야 조선의 영역을 축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나라를 날조해서 대륙조선을 지우고 평양의 유물이 중국식이라고 하면서 낙랑군이 평양이라 날조한다. 대륙은 辰조선의 영역이고, 평양은 말조선의 영역이어서 대륙과 평양 모두 조선이므로 강단유사사학이 말하는 중국식 유물이 평양에서도 나올 것이다. ​ 연나라 위치가 왜곡되어 조선에 관한 모든 연구는 엉뚱하게 진행되고 있다. 중제유사사학은 과거에 천진이 계라고 주장하였으나 당시에 천진의 상당부분이 바닷속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후, 지금은 북경이 계라 주장한다. 연나라의 위치만 바로잡아도 모든 역사 날조는 근거를 잃게 된다. ​ 연나라 위치는 『사기』만 보아도 쉽..

역사 2023.02.17

안악3호분 동수묘

고구려가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 지역과 韓지역 북부)를 480년대 초까지 유지하였다는 것은 안악3호분 묵서명에 의해서 증명된다. 김일권의 판독문과 그 해석을 김일권, 「고구려 5세기 금석문에 나타난 干支曆日 자료와 曆法 연구」, 『동북아역사논총 36』, 2012. 65쪽. 참고하고 일부를 수정하면 묵서명은 다음과 같다. ​ 판독문: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 해석: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

역사 2023.02.16

백제의 요서 진평

중국 사서가 기술하는 백제의 요서 진평은 다음과 같다. ​ (ㄱ) 『송서(宋書)』 「동이열전」 『송서』 「동이열전」 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 百濟國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遼東의 동쪽 1천여리 밖에 있었다. 그후 고려는 요동을, 백제는 遼西를 점령하여 소유하였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晋平郡 晋平縣이라 한다. ​ (ㄴ) 『남제서(南齊書)』: 긁어서 지움. ​ (ㄷ) 『양서(梁書)』 「동이열전」 『양서』 「동이열전」 百濟者,其先東夷有三韓國,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弁韓、辰韓各十二國,馬韓有五十四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百濟即其一也。後漸強大,兼諸小國。其國本與句驪在遼東之東,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 百濟..

역사 2023.02.15

비류백제=예(왜)부여

예부여의 건국과 동부여와의 구별 ​ 『삼국사』에는 두 개의 부여가 등장한다. 하나는 추모가 도망쳐오고 유화부인이 있던 동부여이다. 동부여는 유화가 사망하자 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고 추모는 감사를 표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東明聖王 十四年,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徳. ​ 고구려 초기 등장하는 부여는 동부여이다. 그 왕 대소가 금와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대소가 죽고 일부는 갈사국을 세우고 나머지는 고구려에 투항한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大武神王 22년 秋七月, 扶餘王從弟謂國人曰, “我先王身亡, 國滅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扵曷思. 吾亦不肖, 無以㒷復.” 乃與萬餘人来投, 王封爲王, 安置掾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 이는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동부여가 속민이었다는 기술과 일치한다. 갈..

역사 2023.02.14

백제의 시조와 건국 시 도읍지

백제의 초기 도읍지는 중마한의 북쪽이므로 당연히 韓 지역이다. 『三國史』에 의하면 ​ [온조시조설] ​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가 추모(鄒牟)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주몽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沸流), 둘째 아들은 온조(溫祚)라고 하였다.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서 월군(越郡)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추모가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역사 2023.02.14

강단유사사학의 실증성 (한국 고대사를 규정하는 쓰다의 '古朝鮮의 北境'이 근거가 있는가)

강단유사사학은 일제·중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을 실증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그것들과 그것들에 충성하는 강단유사사학이 마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작업을 하는 생명체들인 것처럼 대중을 속인다. 그러나 일제 중제 강단의 세 유사사학에 실증은 전혀 없다. 그들이 만든 소설을 전제하고 실증을 찾는 것처럼 사기를 치고 있을 뿐이다. ​ 『삼국지』와 『후한서』에 삼한 70여개국이 4세기까지 있었다는 문언은 없다. 「일본서기」에 임나가 가야라는 말이나 열도에 왜집단이 만든 야마토 왕조가 있었다는 기술은 없다. 그들 소설의 전제부터 전혀 실증이 없고, 그 전제에서 그들의 소설이 도출되는 과정에도 논리나 실증은 전혀 없고 억지와 사기만 있다. 그들의 모든 것이 사기지만 여기에선 쓰다가 말한 古朝鮮의 北境에 대해서 살펴본다. ​..

역사 2023.02.13

역개루 카페에서 당한 일

역개루 카페에 가입하여 처음 글을 썼고 이렇게 썼다고 강퇴 당했습니다. 유수가 그 카페 관리자인데 강단유사사학을 추종하는 사람 같습니다. ​ 강단유사사학은 학문이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역사교시를 추종하는 종교집단 같습니다. ​ 제가 고려의 서경은 현재의 평양이 아니라고 했더니 ​ 유수(카페 관리자)가 최소한의 사료검토만 해도 제 주장은 틀란 거라고 해서 ​ 제가 네 말을 이해할 수 없으니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달라 한 것이 전부입니다. ​ 강단유사사학이 현재 역사학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폭력 때문입니다. 강단유사사학에 반대하는 사람은 결코 교수가 되기 어렵고, 관련 일자리에서 배제됩니다. 그들의 주장에 논리가 전혀 없음을 지적하면, 그들은 역개루 카페에서 보듯이 전혀 반론할 수 없습니다. ​ 역..

역사 2023.02.13

고구려는 요동 오환이 건국

오환과 선비는 북부여의 서쪽 후국이었으나, 흉노가 점령하여 복속시킨 지역이다. 이들은 메기장과 동장을 재배하고,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其土地宜穄及東牆。東牆似蓬草,實如穄子,至十月而熟 수렵과 목축을 하였다.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俗善騎射,弋獵禽獸為事。隨水草放牧 ​ 유철은 흉노를 쫓고 이들 오환인들을 요동외요 내부로 이주시키고 호오환교위를 설치하여 통제하였다. 『후한서』의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후한서』 「오환선비열전」 烏桓自為冒頓所破,眾遂孤弱,常臣伏匈奴,歲輸牛馬羊皮,過時不具,輒沒其妻子。及武帝遣驃騎將軍霍去病擊破匈奴左地,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五郡塞外,為漢偵察匈奴動靜。其大人歲一朝見,於是始置護烏桓校尉,秩二千石,擁節監領之,使不得與匈奴交通 ​ 오환은 (흉..

역사 2023.02.12

김알지의 계림국은 대구. 경상도 신라는 韓에서 온 석씨 박씨세력과, 김일제 후손인 김알지 세력의 결합

신라는 김알지의 계림국과 통합한다. 그 시기에 대해 『삼국사』는 서기 65년, 『삼국유사』는 서기 60년이라고 한다. ​ (ㄱ)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9년 03월 (65년 03월(음))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 尼師今 九年, 春三月, 王夜聞金城西始林樹間有鷄鳴聲. 遲明遣瓠公視之, 有金色小櫝掛樹枝, 白雞鳴於其下. 瓠公還告, 王使人取櫝開之. 有小男兒在其中, 姿容竒偉. 上喜謂左右曰, “此豈非天遺我以令胤乎.” 乃收養之. 及長, 聦明多智略. 乃名閼智, 以其出於金櫝, 姓金氏. 改始林名雞林, 因以爲國號. ​ 탈해왕 9년(65년)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金城)의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 사이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역사 2023.02.12

신라 韓에서 경주로 이동

대무신왕과 유수의 낙랑군 공방 후 『삼국사』의 신라 기록엔 300년까지 낙랑이 나타나지 않는다. 『三國史』 「新羅本紀」 基臨 尼師今 3년 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两國歸服. [〔3년(300)〕 3월에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太白山)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양국이 항복하여 복속해 왔다.] 예부여 일부가 韓을 떠나 신라와 열도로 이주하였는데, 이 기사는 신라로 귀순한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 이는 신라가 경상도로 이동하였음을 의미한다. 신라의 경상도 이동을 기술하는 사료는 다음과 같다. ​ (ㄱ) 『三國史』 「新羅本紀」 탈해(脫解) 이사금(尼師今) (57년 11월 (음)) 『三國史』 「新羅本紀」 脫解尼師今立 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

역사 2023.02.12

신라의 건국은 韓에서 있었던 사건

『삼국사』는 서나벌의 건국세력이 조선의 유민인 辰韓 6부라고 명시한다. ​ 『三國史』 「新羅本紀」 赫居世 居西干 元年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 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即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 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髙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徃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歳,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시조의 성은 박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년 4월 병진일(일설에는 정월 15일) 즉위하여 거서간이라 하니 13세..

역사 2023.02.12

왜=예=범집단, 왜와 예의 실체

조선의 역사설화에 의하면 범집단은 배달국에 참여하지 못하고 쫓겨나는데, 이들은 바닷가로 갔다. 농업을 못하고 수렵할 수 있는 지역에서 쫓겨나면 어로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주로 어로활동에 가장 유리한 지역인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강어귀 부근의 바닷가로 이주하는데, 어로활동을 주로 하였다. ​ 배달국의 남부 해안가인 당산지역의 바닷가(조백하에서 난하까지 여러 강들의 어귀), 요동반도 바닷가(대능하에서 復州강까지 여러 강들이 요동만으로 흐른다), 황하 어귀, 양자강 어귀로 이주하고, 나중에 백제의 지배하에서 영산강 어귀로 이주한다. 영산강 어귀의 왜는 399년 신라에 항복한 후 403년 이후 열도의 나라(奈良)로 보내져 고구려계 열도소국의 주민이 된다. ​ 일제유사사학은 오사카와 나라에 3세기부터 ..

역사 2023.02.11

韓의 위치, 예(왜)군 남려

북부 번조선은 제와 제장성을 경계로 산동반도와 韓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산동반도 지역에 원절식 돈칼만 나타나므로 제에게 산동반도 지역을 빼앗긴 것으로 추측된다. ​ 황하 동쪽이고, 제수와 대야택 북쪽은 번조선이 중국으로부터 최후까지 지킨 韓 지역이다. 세력이 약해진 번조선은 요동고새 북쪽의 「한혁」편의 한후국과 결합하여 진번조선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기』 「조선열전」에 연이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기』 「조선열전」 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築鄣塞 (전 연의 시기에 진정 처음으로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킴을 경험하였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 ​ 중국 동해안의 번조선 중 이 지역이 최후까지 남았고, 왕을 한(칸)이라 하였으므로 중국인들도 이..

역사 2023.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