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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 위치의 명명백백한 증거: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기주협우갈석도 冀州夾右碣石圖 ​ ​ ​ 지도의 바다에 쓰여 있는 문구가 다음과 같다. ​ ------------------- 冀之北貢 自沽易涿遼水入海 而後西向以上大河 永達冀都 此時九河未熟於海 而碣石正在河口 於其遡河西上 則碣石在右 故曰夾右碣石 ​ 기주의 북쪽에서 공물을 바치려면, 고수 역수 탁수 요수로부터 바다로 간 후, 서쪽으로 대하를 올라가서 멀리 기주의 도읍지에 도달한다. 이 때 구하(황하)가 바다와 잘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데 갈석이 똑바로 하구에 있어, 갈석을 의지하여 황하를 거슬러 서쪽으로 올라가면 갈석이 오른쪽에 있으므로 갈석을 오른쪽으로 낀다고 말한다. ------------------------ ​ 다른 많은 사료도 황하 어귀에 갈석산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기주협우갈석도는 시각적으로 명..

역사 2023.02.10

한사군의 날조성

사마천은 예맥조선을 물리치고 만든 4군에 대해선 그가 살아있을 때의 일임에도 군명을 열거하지 않았다. 『사기』 「조선열전」 以故遂定朝鮮為四郡 ​ 설치하자마자 폐지된 서류상의 군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漢은 요동외요를 포기하고 요동고새로 후퇴하였으므로 진개가 만든 5군중 요동고새 바로 북쪽의 어양과 우북평만 유지하였다. ​ 예맥조선을 침략한 후에는 진개가 만든 국경까지 진출했다. 따라서 새로 영토가 늘어난 부분은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이다. 진개의 요서군을 요서군과 현도군으로 나누었으므로 진개 때보다 영토가 증가한 것은 없다. 임둔군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다 일부 실효지배하던 곳은 낙랑군에 편입시켰다. 진번과 현도도 서류상 존재하다 실효지배하는 북경 북쪽에 현도군을 두었다. 낙랑군은 원래 漢의 영역이었다...

역사 2023.02.09

낙랑군 위치와 낙랑군 위치 왜곡의 과정, 후한서 군국지는 위서

​ 낙랑군과 왕검성의 위치는 다르다. https://taxecolaw.tistory.com/72 ​ 낙랑군 왜곡의 과정 ​ 강단·일제·중제유사사학은 예맥조선의 왕검성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전제부터 근거없는 날조임이 드러난다. 더 이상 그들의 날조를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날조의 골이 깊어 날조의 과정을 더 살펴본다. ​ 진수(233년-297년)는 낙랑과 대방, 환도성의 위치를 알았다. 조위의 공손씨 정벌과,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이 그의 생존 시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방군에서 왜의 북쪽 대안이라고 한 구야한국(김해)까지 7천여리라 표시하고 있고, 그 경로도 다음과 같이 정확히 표시하고 있다. ​ -------------------- 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

역사 2023.02.09

소련은 왜 자유시학살을 자행하였는가?

윤상원은 슈먀츠키가 독립군을 일본과 싸우도록 보내기 위해서 통합하려 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제178호 (2017): 247-248. ---------------------- 극동비서부의 전권위원 슈먀츠키는 일본과의 관계로 인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극동공화국과는 달리 “세계혁명의 총참모부”로 자처하는 코민테른의 대표였기 때문에 무장부대를 통합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것에 대해 적극적일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까지 2천여 베르스타(약 2000km)의 장정을 위해서 중국영토를 통과하는 한인들의 행군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시베리아에서 한인 무장부대통합 준비기관으로 극동비서부에 의해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

역사 2023.02.09

자유시 학살의 성격

[소련과 날조좌파가 소련의 독립군 학살을 독립군 내분으로 날조] ​ 윤상원은 자유시사변은 무장부대 통합운동의 과정에서 군통수권을 둘러싼 내부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비극이라고 주장한다. 윤상원. "만들어진 ‘신화’." 한국사학보. 51 (2013): 316. ​ 그러나 한 쪽은 독립군이 아닌 소련군이므로 내부 대립이라 할 수 없다. 자유시학살은 독자적 작전권을 유지하려는 독립군을 소련군이 탄압하고 학살하여 소련군에 편입시킨 사건이다. ​ 박일리야 등 독립군 측은 극동공화국 대통령인 크라스노쇼코프의 적극적 지원으로 1921년 1월 20일 “인민혁명군 안에 있는 모든 한인부대를 즉시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로 재조직”하라는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헤의 명령을 이끌어냈다. 윤상원.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

역사 2023.02.09

레닌자금의 귀속자는 누구인가? 김구의 김립 처단은 테러인가 처벌인가?

레닌자금의 귀속자 (반병률의 날조) ​ 반병률은 “당초 소련정부가 차관을 약속했을 때, 자금은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쓰여지는 것이고 그 자금활용의 책임은 한인사회당이 참여하고 있던 임시정부였다”라고 기술하여 레닌 자금의 수혜자는 임시정부라 명시하고 있다. 반병률. "김립과 항일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32집, (2005): 93. ​ 자금을 받아 낸 한형권은 1920.1.22. 국무회의의 선정에 따라 임시정부의 특사 자격으로 모스크바로 갔고, 반병률, 위 글, 82. 소련과의 교섭과정에서 그의 자격이 한인사회당의 대표로 변경된 적도 없다. 따라서 그가 당초라는 단서를 달아 추후에 뭔가 다른 변경사항이 있을 것처럼 말하지만 수혜자에 관한 변경사항은 없었고 반병률 자신도 변경사항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 2023.02.09

동성왕, 백제의 최전성기

동성왕 479-501 재위 ​ ​ 1. 즉위 시의 상황 ㅇ 고구려는 475년 9월 개로왕을 살해하였다. ㅇ 해구가 477년 동성왕의 아버지 곤지(개로왕의 동생)와 문주왕 살해 ㅇ 해구가 문주왕의 아들인 삼근왕(13세)을 즉위시키고 전횡 ㅇ 479년 11월 즉위 (혼란기에 정치력과 무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라 추정) ​ 2. 고구려에 복수하고 고구려 영토 획득 ㅇ 개로왕은 서도 한성에서 전사, 문주왕은 한반도 웅진으로 천도 ㅇ 480년이나 481년부터 482년이나 483년까지 고구려와 전쟁 - 광개토대왕에게 뺏긴 한백제 북부 회복하고 고구려의 유주(서진의 유주 평주) 탈취 - 당시 고구려 낙랑태수였던 동수 481년 전사 - 당시 장수왕이 90 정도의 고령이어서 고구려 대응이 허술했을 가능성. 이를 이용한 동성..

역사 2023.02.09

덕흥리고분 묵서명과 태수래조도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북연을 세우면서 진번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 요동고새 남쪽 영토도 새로 획득하였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의 12군은 명확하며, 나머지 하나는 대방으로 추정된다. [광개토대왕 시 발해만 부근 국경] * ‘韓 백제 북부’는 고구려가 396년 점령한 영토로 韓태수를 임명하여 다스린다. 연군은 후연의 용성으로 추정되고 대군은 태행산맥 서쪽이다. 따라서 이 13군은 하북성에서는 북쪽은 영정하, 남쪽은 당하까지를 영역으로 하고 산서성에서는 대까지를 영역으로 한다. 통역관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가 이 지..

역사 2023.02.08

홍범도

『독립신문』 1920.12.25. 제88호 제4면은 봉오동전투의 사령관은 최진동이고, 부관은 안무이며, 홍범도는 연대장이라 하고, 최진동의 지휘에 따라 전투가 수행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유사사학은 홍범도가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다고 날조한다. ​ 홍범도는 존경할 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최고사령관의 작전명령을 무시했다. 자유시로 간 이후에는 소련에 영합하여 독립군의 해체에 동의했고 그 후 그의 조국인 소련을 위해 살았다. 레닌이 준 권총으로 독립전쟁에 나서라고 충고한 독립투사를 두 명이나 사살하고도 뉘우치거나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국좌익은 홍범도를 영웅시한다. ​ 매국좌익도 우리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민족주의가 계급투쟁에 방해가 될까봐 매국우익의 역사왜곡에 동조한다..

역사 2023.02.08

김수로

1. 김수로의 이동과 건국 新을 건국한 흉노 세력은 新이 망하자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여 김알지는 대구에 계림국을 건국하였다가 서기 65년 탈해의 신라와 결합하고 김수로는 서기 42년 가야를 건국하였다. 「문무대왕릉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투후 김일제를 신라 김씨의 중시조로 명시하고 있다. 『삼국사』 「김유신열전」은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가 같은 성이라 하며, 『삼국유사』는 문무왕이 김수로왕도 자신의 15대 시조라며 종묘에 합하여 제사 지내게 하였다 한다. 김일제가 투후에 봉해져 산동성이 김씨의 근거지였는데, 왕망을 중심으로 김씨들이 新을 건국하였다가 新이 무너지자 김수로와 김알지는 함께 한반도로 도피하였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서는 한반도로의 도피를 “漢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역사 2023.02.08

이세민(598-649)

김성규 "수말(隋末)·당(唐) 건국기의 정정(政情)과 이세민(李世民) 당 태종 이세민 연구." 건지인문학, 29.0 (2020): 5-26. 김성규 “唐의 군웅 제압에서 ‘玄武門의 變’ 발발까지에 대한 소묘: 당 태종 이세민 연구(2)”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제77집 2021.02 123 – 148(26 pages) ㅇ 실록 열람 및 개찬 - 이세민의 황위 계승은 형을 죽이고 또 부친 이연을 핍박해서 얻은 것이며 인륜에 반하는 사건이었다(626년 현무문의 변). 이를 최대의 오점으로 자각한 태종이 끝내 실록을 열람하고 역사를 개찬(639년에 실록 열람 시도 640년에 열람하고 조작). 그 결과 『고조실록』과 『태종실록』 등의 주요 기록에서 태종의 공로가 부각된 반면, 자신의 정적이 ..

역사 2023.02.07

장보고

ㅇ 국적: 당나라 사수 연수현 출신, 백제 유민 ㅇ 이정기 세력 (4대, 765-819) 공격 시, 친당 세력인 왕지흥의 소장으로 복무. 장보고는 이정기 토벌의 공로로 819년 등주 적산포 신라소의 초대 대사로 임명됨. - 당나라는 번진(藩鎭)의 반란을 진압한 후, 819년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국 동해안 백제의 유민들에게 과세할 목적으로 신라방·신라소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를 대사(大使)라 하였다. 당나라 기본법전인 대당육전(大唐六典)」에도 “무릇 모든 군진의 대사와 부사 이상은 모두 겸인(시종)을 거느린다(凡諸軍鎭大使副使皆有廉人)”고 되어 있으며 이들의 임기는 4년(四年一替)이었다. 즉 신라방·신라소는 당나라의 지방행정기구이고, 그 책임자인 대사는 당나라의 관리였다. - 강단유사사학은..

역사 2023.02.07

광개토대왕릉비문 병신년조 기사 초입부의 올바른 해석 (소위 신묘년조 비문 해석) (전치문설은 개솔)

1. 일제가 본 광개토대왕릉 병신년조 문장의 초입부는 다음과 같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入貢于)百殘 (聯侵)新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어서 줄곧 조공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 이래 백제에 조공하며 연합하여 신라를 침략하였으므로 臣民(=신라)을 위하여, 영락 6년 丙申년부터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百殘國을 토벌하였다.] - 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156-163쪽에 의해 入貢于가 渡海破로 변조되었다고 보았다. (날조된 글자의 글씨체가 다르고 글자의 위치도 다르다) - 계연수가 1898년 탁본한 내용을 토대로 이유립이 복원한 이유립본에 근거하여 聯侵으로 보았다. (윤창열, 「광개토태왕비문과 환단고기의 整合性..

역사 2023.02.06

광개토대왕릉비문 기해년 기사의 날조

광개토대왕릉비문은 기해년 문장도 날조되어 있는데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九年己亥 百殘違誓 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于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喜後) (稱)其忠□ □遣使還告以□計 [太王(喜後)의 喜는 김병기의 추측이고 後는 필자의 추측이다. 궤파성지의 경우 태왕이 기뻐한 것과 모순되므로 글자를 지웠을 것이다.] ‘潰于城池’가 ‘潰破城池’로 날조되어 있고,[김병기,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학고재, 2005. 166쪽.] 喜後가 지워져 있다. 날조를 바로잡아 해석하면 「영락 9년 기해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내통하였다. 왕이 평양으로 순시하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있다가 성지(城池)에서 도주하여, 신이(노객은 항복한 나..

역사 2023.02.05

「일본서기」의 일본은 열도백제이다. 야마토정권은 없었다.

「일본서기」에 倭나 大倭(大和)는 일본의 속국으로 기술되어 있고, 대왜가 야마토로 발음될 수도 없다. 예군 묘지명에서 일본은 백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일본서기」의 일본은 백제이지 일본의 속국으로 기술된 大倭(大和)가 될 수 없다. 「일본서기」는 백제가 열도를 지방행정구역으로 지배하다가, 백제가 망하자, 백제의 별칭인 ‘일본’으로 독립하면서 열도인을 다스릴 목적으로 가공의 역사를 기술한 책으로 용비어천가와 같은 문학서이다. 열도에 왜계의 야마토 정권이 성립한 적이 없다. 『삼국지』와 『후한서』에 나오는 야마일(邪馬壹) 또는 야마대(邪馬臺)국은 가야계의 나라로 왜가 아니다. 일제유사사학은 일본이 한국이었음을 부정하기 위해 야마토왜라는 가공의 왕조를 창작하였다. 일제유사사학이 만든 일본고대사는 ..

역사 2023.02.04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 고구려의 초기 수도

동천왕은 관구검에게 패하였는데,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에 의하면 관구검은 동천왕이 옥저로 도망가자 왕기를 시켜 추격하게 하였고, 추격군은 옥저를 지나 1,000여 리를 추격하여 관구검기공비를 세웠다. 그 관구검기공비가 집안 판석령에서 발견되었다.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조조의 위나라가 고구려를 통쾌하게 이긴 것을 기록한 것이므로, 크게 왜곡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부분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집안 서쪽 1,000여 리에 옥저가 있었고 그 서쪽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소위 강단사학계는 옥저는 한반도 동해안에만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양서』 「동이전」, 『북사』 「고구려전」이..

역사 2023.02.03

우리나라 역사학은 친일매국의 본부

일제 부역자들 승계 ​ 해방 후, 미국과 이승만은 각각 남한 내 확실한 반공정권 수립과 집권을 위해 일제 부역자와 협력하였다. 일제의 한국사 날조에 부역한 일제유사사학의 승계자들이 해방 후에도 학문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일제에 대한 부역을 학문연구로 위장하였다. 날조를 실증이라는 말로 포장하여 날조된 사실이 객관적 학문연구의 성과인 것처럼 왜곡하여 그들의 부역 사실을 은폐하였다. 날조된 사실이 학문연구의 대상이 되는 순간 부역자로서의 정체성이 공개되므로 그들은 어떠한 반론도 허용하지 않았다. ​ 객관적 연구는 투명인간의 투명논문인 것처럼 왕따시켰다. 최재석, 신용하, 김석형, 김성호 등의 연구에 무시로 일관하였다. 학문이 아니라 교리가 된 것이다. 날조된 교리를 유지하기 위해 날조를 객관적인 학..

역사 2023.02.03

요동반도는 백제 영토였고, 신당전쟁으로 신라가 차지하였다.

『괄지지』에 “백제국 서남 발해 중에 큰섬 15개가 있는데 모두 읍락이 있고 사람이 거주한다. 백제에 속한다.”라고 요동반도백제가 기술되어 있다. 발해 중에 서남쪽에 큰 섬이 있는 곳은 요동반도밖에 없다. 『구당서』 『신당서』 『통전』 『삼국사기』에 백제 땅을 신라와 대진(소위 발해)이 나누어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요동반도가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소위 강단사학계는 요동지역으로 옮겨진 웅진도독부를 대진이 차지하여 『구당서』 『신당서』 『통전』 『삼국사기』가 헛소리를 하였다고 주장한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괜히 백제와 무관한 곳에 웅진도독부를 옮겼다는 말이 더 헛소리일 것이다. 『괄지지』는 638년부터 642년까지 편찬된 책으로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위 ..

역사 2023.02.02

고려의 서경 (고구려 평양)이 현재의 평양이라는 것은 개솔

『수서(隋書)』는 고구려에 평양성 國內城 漢城의 세 도회지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의 평양에서 漢城이라 기록된 고구려의 각자성석(刻字城石)이 출토되었다. 고구려의 평양은 고려시대 때 서경이라 하였다. 김부식은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서경으로 가면서 안북대도호부에 이르러 다른 부대와 합류하는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안북대도호부가 지금의 안주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따라 고려의 서경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면 모든 토벌군이 서경으로부터 북쪽으로 직선거리 70km까지 간 것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반란군이 바로 개경으로 남하하여 임금을 모시면 순식간에 반란군과 토벌군의 위치가 바뀌게 된다. 즉 지금의 평양을 고구려의 평양으로 볼 수는 없고 구구려의 평양은 최소한 안주 북쪽에 있었고, 현재의 평양은 각..

역사 2023.02.01

정부 가야고분군을 일제 임나설로 세계유산등재 신청, 당장 취소해야

- 현재의 신청 내용은 조선총독부가 창작한 임나일본부설의 세계적 공인을 초래할 수도 있다 - 가야고분군 세계유산등재추진단은 가야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로 가야사가 세계사적 인증을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추진단이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고분군 7곳은, 추진단의 표현에 의하면, 금관가야(김해 대성동 고분군), 아라가야(함안 말이산 고분군), 비화가야(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 소가야(고성 송학동 고분군), 다라국(합천 옥전 고분군), 대가야(고령 지산동 고분군), 기문국(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다. 그런데 추진단은 가야고분이 아닌 것을 가야고분군으로 등재하려고 하며, 가야의 지명을 자의적으로 정하고 있다. 첫째, 창녕은 가야가 아니다. 창녕은 낙동강 동쪽이어서 가야가 될 수 없고 신라에 속한다. 장..

역사 2023.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