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사 신라전
或稱魏將毋丘儉討高麗破之, 奔沃沮, 其後復歸故國, 有留者, 遂爲新羅, 亦曰斯盧. 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兼有沃沮不耐·韓·濊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初附庸于百濟, 百濟征高麗 不堪戎役, 後相率歸之, 遂致强盛. 因襲百濟, 附庸於迦羅國焉.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해석
1. 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2.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沃沮·不耐·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3. 당초에는 백제에 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迦羅國을 附庸國으로 삼았다.
1.
동천왕이 관구검(무구검)에 쫓겨 동옥저의 남쪽까지 도망왔다. 동옥저의 남쪽은 신라와 국경이다. 유유의 충성으로 추격군을 쫓아내는데, 당시 신라의 국경까지 도망왔던 일부 고구려 병사가 신라로 도망갔을 수 있다. 즉 遂爲新羅는 마침내 신라인이 되었다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때 이탈한 고구려 병사들이 신라를 침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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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년(24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공격하였다. 우로(于老)가 병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켰다. 그날 밤 매우 추웠는데, 우로가 병사들을 위로하고 몸소 장작을 태워 그들을 따뜻하게 해주니, 병사들이 감격하였다.[삼국사 신라본기 조분왕 十六年, 冬十月, 髙句麗侵北邉. 于老將兵出撃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羣心感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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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도 이들 이탈한 고구려병을 이기지 못했고, 고구려군도 고구려에서 도망쳤으므로 다시 고구려로 도망갈 수는 없었다. 고구려 탈영병들이 신라를 굴복시켜 신라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라는 주로 말갈의 침략을 받았다. 125년에서 203년까지 여섯 번 신라를 침략했다. 말갈은 고구려의 지방자치단체이다. 신라를 침략한 말갈은 신라 북부에 있었던 소국이다. 이를 고구려라 하지 않은 것은 고구려 국가 단위의 침략이 아니라 고구려의 지자체가 식량 부족 등의 이유로 신라를 침략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신라 침입은 245년이 처음이다. 고구려 본대는 하북성에 있었고, 중국과 싸워야 했으므로 신라는 안 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245년 고구려가 침략했다는 것은 이들이 조위에 패한 고구려의 패잔병임을 의미한다. 패잔병들이어도 싸우는 무대가 달랐기 때문에 이들이 신라를 굴복시키고 괜찮은 조건으로 신라에 정착했을 것이다.
2.
이 내용은 신라가 韓에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중국인은 낙랑 동부도위를 의미한다. 옥저는 남옥저이다. 불내는 낙랑 동부도위 소속의 현 이름이다. 韓 지역에는 예(왜)와 韓이 원래 정착해 있었다. 백제가 마한을 점령하면서 변진(신라)도 당연히 백제의 속국이 되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당시의 신라왕은 백제라 할 수 있다. 59년 탈해왕 때 경주로 도망쳐 신라는 독립국이 되었다.
3
이 내용은 399년 영산강왜가 신라에 집단적으로 항복한 사건을 말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오역을 하고 있다. 백제가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동원을 심하게 하자, 전라도왜가 견디지 못하고 신라에 항복하였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있지도 않은 고구려 사람들을 추가하여 고구려 주민들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오역을 하고 있다. 전라도왜의 신라 항복은 대규모여서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에게 이를 보고하였고(광개토대왕릉비문), 백제에서도 "백성들이 전역(戰役)에 시달려 많은 사람들이 신라로 도망치니 호구(戶口)가 줄어들었다"[삼국사 백제본기 아신왕 8년 民苦於役, 多奔新羅, 戶口衰滅]고 할 정도였다.
이들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열도의 안라국(고구려 분국)과 신라가 전쟁을 하였는데, 광개토대왕의 명령으로 이들은 전부 안라국에 보내졌다. 이들이 강단 일제 유사사학이 야마토정권이라고 사기치는 나라의 대왜(대화)이다. 대왜는 고구려의 피지배민으로 나라개척에 사역되었다. 나중에 다시 백제가 나라를 차지하자 이들은 다시 백제의 주민이 되었다.
이들의 신라 이주로 신라가 백제에 대등하게 대항하고 가야에 우월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결
강단유사사학은 사료를 개판으로 해석한다. 그들의 목적은 임나선생님의 한반도 도래이므로 북사의 기록을 객관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신라 건국 늦출 수 있겠네 라고 광분하면서 말도 아닌 해석을 한다. 그래야 삼국사기를 신뢰할 수 없는 사서로 만들 수 있다.
그들은 갑자기 고구려 주민의 신라투항이라는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창조한다. 이는 영산강왜를 숨기기 위한 술책이다. 영산강왜를 숨겨야 가공의 야마토정권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영산강왜는 광개토대왕릉비문, 삼국사기 백제본기, 북사에 의해 숨길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그들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을 변조하여 앞뒤가 안맞는 해석을 하면서 임나선생님을 위한 애절한 충절을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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