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서기 왜 대왜 관련 부분의 왜와 일본천황의 관계
ㅇ 신무의 동쪽 정벌: 적들에 의해 길이 막히자, 제사를 지냄
날짜(신무 즉위전기) B.C.663년 9월 5일
9월 갑자삭 무진(5일)에 천황이 토전의 고창산(高倉山;타카쿠라야마)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라 안을 바라보았다. --- 적의 거점은 다 중요한 땅이었다. 그래서 길이 차단되어 지나가려해도 방법이 없었다. 천황은 이런 상황이 싫어 그날 저녁 신(神)의 뜻을 알려 달라고 빌고 잤다. 그러자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서---
천황이 삼가 꿈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로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때 또 제활이 “왜국(倭國)의 기성읍(磯城邑)에는 기성(磯城)의 팔십효수(八十梟師)가 있고 또 고미장읍(高尾張邑;타카워하리노무라)[어떤 책(或本)에서는 갈성읍(葛城邑;카츠라기노무라)이라고 적었다.]에는 적동(赤銅;아카가네) 팔십효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지금 천황을 거역하여 싸우려 하고 있습니다. 신(臣)은 마음속으로 천황이 걱정됩니다. ----
[왜가 일본에 대항하고 있음]
ㅇ 정벌에 대한 논공행상
날짜(신무 2년) B.C.659년 2월 2일
2년 봄 2월 갑진삭 을사(2일)에 천황이 논공행상을 하였다. 도신명에게 택지를 주어 축판읍(築坂邑)에 살게 하고 특별히 총애하였다. 또 대래목(大來目;오호쿠메)을 무방산 서쪽의 냇가 주변 땅에 거주하게 하였다. 지금 내목읍(來目邑;쿠메노무라)이라 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는다. 진언(珍彥;우즈히코)[珍彥는 우즈히코(于砮毗故)라고 읽는다.]은 왜국조(倭國造;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코)로 삼았다. 또 제활에게 맹전읍(猛田邑;타케다노무라)을 주어 맹전현주(猛田縣主;타케다노아가타누시)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토전주수부(蒬田主水部;우다노모히토리라)의 선조다. 이름이 흑속(黑速)이었던 제기성을 기성현주(磯城縣主)로 삼았다.
[일본이 왜국을 정벌하여 관리 파견]
ㅇ 수정천황을 장사지냄
날짜(안녕 원년) B.C.548년 10월
원년 겨울 10월 병술삭 병신(11일)에 신정명천이천황을 왜(倭;야마토)의 도화조전구상릉(桃花鳥田丘上陵;츠키다노워카노워헤노미사자키)에 장사지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하였다. 이 해의 간지는 계축이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대물주신을 비롯한 많은 신들에게 제사지내니, 역병이 멈추고 나라가 안정됨
날짜(숭신 7년) B.C.91년 11월 13일
11월 정묘삭 기묘(13일)에 이향색웅에게 명하여 물부의 많은 그릇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물건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전전근자를 대물주대신을 제사지내는 제주로 삼고, 또 장미시를 왜의 대국혼신을 제사지내는 제주로 삼았다. ----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왜의 협성지(狹城池)와 적견지(迹見池)를 만듦
날짜(수인 35년) 6년 10월
겨울 10월에 왜(倭)의 협성지(狹城池) 및 적견지(迹見池)를 만들었다
[일본이 왜라는 지방을 경영]
ㅇ 경행천황을 장사지냄/황후를 황태후로 삼음
날짜(성무 2년) 132년 11월 10일
2년 겨울 11월 계유삭 임오(10일)에 대족언천황을 왜국의 산변도상릉(山邊道上陵)에 장사 지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삼았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성무천황을 장사지냄
날짜(중애 즉위전기) 191년 9월 6일
이듬해 가을 9월 임진삭 정유(6일)에 왜국(倭國;야마토노쿠니) 협성순열릉(狹城盾列陵;사키노타타나미노미사자키)에 장사지냈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축자국으로 행차할 때 웅악(熊鰐)이 인도하여 배가 나아가지 않자, 신에게 제사지냄
날짜(중애 8년) 199년 1월 4일
8년 봄 정월 기묘삭 임오(4일)에 축자(筑紫)로 갔다. ----. 반드시 이 신들의 뜻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은 즉시 기도하고, 선장인 왜국 토전(菟田;우다) 사람 이하언(伊賀彦;이가히코)을 축(祝;하후리)으로 삼아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랬더니 배가 나아갔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위지》 위(魏)에 사신을 보냄
날짜(신공 39년) 239년 6월
39년 이 해의 간지는 기미(己未)이다[위지(魏志)에서는 명제(明帝) 경초(景初) 3년 6월에 왜 여왕이 대부(大夫) 난두미(難斗米) 등을 보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게 가서 조헌할 것을 청하자, 대방군 태수 등하(鄧夏)가 관리를 보내 데리고 가게하여 경도(京都)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하였다고 한다-- 왜는 일본과 무관한 어떤 나라임 의미]
ㅇ 《위지》 위(魏)에서 사신을 보내옴
날짜(신공 40년) 240년
40년[위지에는 정시 원년에 건충교위제휴(建忠校尉梯携)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고 왜국에 가게 하였다고 한다.].
[왜는 일본과 무관한 어떤 나라]
ㅇ 《위지》 위(魏)에 8명의 사신을 보냄
날짜(신공 43년) 243년
43년[위지에는 정시 4년에 왜왕이 다시 사신 대부 이성자(伊聲者)와 액야약(掖耶約) 등 8인을 보내어 헌상하였다고 한다.].
[왜는 일본과 무관한 어떤 나라]
ㅇ 사마숙녜(斯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냄
날짜(신공 46년) 246년 3월 1일
46년 봄 3월 을해삭(1일)에 사마숙녜(斯摩宿禰;시마노스쿠네)를 탁순국(卓淳國)에 파견하였다[사마숙녜는 어떤 성(姓)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때 탁순왕(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마숙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년(甲子年) 7월 중에 백제인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東方)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귀국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백제는 왜가 아닌 일본에 조공]
ㅇ 왜의 둔전과 둔창의 관장 문제
이때 액전대중언황자(額田大中彦皇子;누카타노오호나카츠히코노미코)가 왜(倭;야마토)의 둔전(屯田) 및 둔창(屯倉)을 관장하고자 둔전사(屯田司)인 출운신(出雲臣;이즈모노오미)의 선조 어우숙녜(淤宇宿禰;오우노스쿠네)에게 “이 둔전은 본래 산수(山守;야마모리)의 땅이다. -----. 그리하여 왜의 둔전에 관해 물었다. 오자롱이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전향옥성궁(纏向玉城宮;마키무쿠노타마키노미야)에서 천하를 다스린 천황의 시대에 태자 대족언존(大足彦尊;오호타라시히코노미코)에게 맡겨 왜의 둔전을 정했다고 합니다. 이때 조를 내려 ‘무릇 왜의 둔전은 언제나 천황의 것이다. ------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중(仲) 황자가 궁을 불태우자 태자가 도망감
이에 중황자는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태자를 죽이려 마음먹고, 몰래 군사를 일으켜 태자궁을 둘러쌌다. --- 그래서 세 사람이 태자를 부축하여 말에 태우고 도망쳤다[어떤 책(一云)에서는 대전숙녜가 태자를 안고 말에 탔다고 한다.]. 중황자는 태자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여 태자궁에 불을 질렀는데,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태자는 하내국(河內國;카후치노쿠니)의 식생판(埴生坂;하니후노사카)에 이르러서야 깨어났다. 그리고 난파를 돌아보다가 불빛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리하여 바로 급히 말을 달려 대판(大坂;오호사카)에서 왜(倭;야마토)로 향하였다. -----
[중황자가 태자궁의 태자(선왕의 상중이어 실질상 천황임)를 습격하였는데, 태자는 왜로 도망감: 태자궁이 있었던 곳 즉 일본의 수도는 왜가 아님]
ㅇ 아담련빈자(阿曇連濱子)를 묵형에 처함
날짜(이중 원년) 400년 4월 17일
여름 4월 신사삭 정유(17일)에 아담련빈자를 불러 “너는 중황자와 더불어 반역을 꾀하고 천황을 죽이려 하였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큰 은혜를 베풀어 사형 대신에 묵형에 처한다.”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날 묵형을 행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아담목(阿曇目;아즈미메)이라 하였다. 또 빈자가 거느리는 야도(野島;노시마)의 해인 등의 죄를 면해주고 왜의 장대둔창(蔣代屯倉)에서 사역하였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황태후가 천황의 마음을 알고 육인부(宍人部)를 정할 것을 청함
날짜(웅략 2년) 458년 10월 6일(是日)
이 날에 천황[車駕]이 길야궁(吉野宮)에서 돌아왔는데, 나라 안에 사는 백성이 모두 무서워서 떨었다. 이로 인해 황태후가 황후와 더불어 그 사실을 듣고 매우 두려워, 왜(倭)의 채녀인 일원(日媛;히노히메)에게 술을 들고 맞이하도록 보내었다. --
[왜는 일본의 지방이나 속국]
ㅇ 신라가 구원을 요청함
날짜(웅략 8년) 464년 2월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신라가 구원 요청하는 대상은 왜가 아닌 일본]
ㅇ 백제의 기지부(己知部)가 귀화함
날짜(흠명 원년) 540년 2월
2월에 백제인 기지부(己知部)가 귀화하였다. 왜국(倭國;야마토노쿠니) 첨상군(添上郡;소후노카미노코오리)의 산촌(山村;야마무라)에 안치하였다. 지금의 산촌기지부(山村己知部)의 조상이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왜국(倭國) 기성군(磯城郡) 기성도(磯城嶋)로 도읍을 옮김
날짜(흠명 원년) 540년 7월 14일
가을 7월 병자삭 기축(14일)에 왜국의 기성군(磯城郡;시키노코오리) 기성도(磯城嶋;시키시마)로 도읍을 옮기고 이름을 기성도금자궁(磯城嶋金刺宮;시키시마노카나사시노미야)이라 하였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왜국(倭國) 금래군(今來郡)에서 좋은 말에 대해 보고함
날짜(흠명 7년) 546년 7월
가을 7월에 왜국(倭國;야마토노쿠니) 금래군(今來郡;이마키노코오리)에서 “5년 봄에 천원민직궁(川原民直宮;가와라노타미노아타히미야) [궁은 이름이다.] 누대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좋은 말을 발견하였습니다[기이국 어부들의 지(贄)를 나르는 암말의 새끼이다.]. 그 말은 그림자를 보고 소리 높여 울며, 가볍게 어미 말의 등을 넘었습니다. 가서 (그 말을) 사들여 여러 해 동안 길렀습니다. 성장하자 기러기처럼 날고, 용처럼 뛰어 올라 무리 중에서도 특히 뛰어났습니다. 마음 먹은대로 부리기 쉽고, 생각하는 대로 빨리 달렸습니다. 대내구(大內丘;오호치노워카)의 18장(丈)이나 되는 골짜기를 뛰어 넘었습니다. 천원민직궁은 회외읍(檜隈邑;히노쿠마노사토)의 사람입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왜국은 일본의 지방이나 속국]
ㅇ 소아대신도목숙녜(蘇我大臣稻目宿禰) 등을 보내 왜국, 기국에 둔창을 둠
날짜(흠명 17년) 556년 10월
겨울 10월에 소아대신도목숙녜 등을 왜국(倭國)의 고시군(高市郡)에 보내어 한인대신협둔창(韓人大身狹屯倉;카라히토노오호무사노미야케) [여기에서 한인이란 백제를 이른다.], 고려인소신협둔창(高麗人小身狹屯倉;코마비토노워무사노미야케)을 두도록 하였다. ---
[왜국은 일본의 지방이나 속국]
ㅇ 저수지와 수로를 만듦
날짜(추고 15년) 607년(是歲)
이 해의 겨울, 왜국에 고시(高市;타카이치)못, 등원(藤原;후지와라)못, 견강(肩岡;카타오카)못, 관원(菅原;스가하라)못을 만들었다. 산배(山背;야마시로)국 율외(栗隈;쿠루쿠마)에 큰 수로를 만들고, 하내(河內;가후치)국에는 호예(戶苅;토카리)못, 의망(依網;요사노)못을 만들고, 또 나라마다 둔창(屯倉;미야케)을 두었다.
[왜국은 일본의 지방명]
ㅇ 국사를 임명하고 국사의 임무를 밝힘
날짜(효덕 대화원년) 645년 8월 5일
8월 병신삭 경자(5일)에 동국 등의 국사(國司)를 임명하였다. 국사들에게 “천신이 명하신 대로 지금부터 사방의 전국을 다스리고자 한다. 그대들은 임지에 가서 무릇 국가가 소유한 공민(公民)이나 대소의 (호족이) 소유한 사람들을 그대들에게 맡기는 바, 모두 호적을 만들고 논밭의 넓이를 조사하라. ---이상이 법을 충실히 지키면 반드시 포상하라. 법을 지키지 않으면 작위를 떨어뜨려야 한다. -----. 왜국(倭國;야마토)의 6현(縣)에 파견된 사신은 호적을 만들고 아울러 전지의 면적을 조사하라. [개간된 전지의 면적과 백성의 호구와 연령을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대 국사들이여. 명확히 잘 알아듣고 물러가거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비단과 삼베를 각기 차등 있게 주었다.
[왜국은 일본의 지방명]
ㅇ 국조 등 관인들의 잘못에 대한 보고
날짜(효덕 대화2년) 646년 3월 19일
‘수적신사(穗積臣咋;호즈미노오미쿠히)가 잘못을 범한 것은 백성에게 호별로 물품을 요구하고는 이를 후회하고 돌려주긴 했지만, 모두 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 그리고 국조가 보낸 무기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함부로 국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임지에서 칼을 도난당했습니다. 그리고 왜국에서도 칼을 도난당했습니다. ----- 이 잘못한 것은 왜국에서 관의 칼을 도둑맞은 것입니다. 이것은 조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
[왜국은 일본의 지방명]
ㅇ 소아신일향이 소아창산전마려대신을 모함함
날짜(효덕 대화5년) 649년 3월 24일
무진(24일)에 소아신일향(蘇我臣日向;소가노오미히무카) [日向의 자(字)는 신자(身刺;무자시)이다.]은 황태자에게 창산전대신(倉山田大臣;쿠라로야마다노오호오미)을 모함하였다. “저의 이복형 마려가 황태자가 해변에서 쉬는 때를 노려 해치려 합니다. 모반이 멀지 않았습니다.” 황태자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천황은 군사를 일으켜 대신의 저택을 포위하려 하였다. 그러자 대신은 두 아들 법사(法師;호후시)와 적저(赤猪;아까웨)[다른 이름은 진(秦;하다)이다.]를 데리고 모정도(茅渟道;치누노미치)에서 왜국(倭國;야마토노쿠니)의 경계로 도망쳤다.
[왜가 일본의 수도가 아니었음을 의미]
ㅇ 일본이 당의 수군과 싸웠으나 패배함
날짜(천지 2년) 663년 8월 27일
무신(27일)에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사람들이 대당(大唐)의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열을 굳게하여 지켰다.
[당과 싸운 나라는 왜가 아닌 일본]
ㅇ 황태자가 왜경(倭京)에 행차함
날짜(천지 6년) 667년 8월
8월에 황태자가 왜(倭)의 경(京)에 행차하였다.
[일본의 수도는 왜가 아님]
ㅇ 왜국, 찬길국, 대마국 등에 성을 쌓음
날짜(천지 6년) 667년 11월(是月)
이 달에 왜국(倭國;야마토노쿠니)의 고안성(高安城;타카야스노키), 찬길국(讚吉國;사누키노쿠니) 산전군(山田郡;야먀다노코호리)의 옥도성(屋島城;야시마노키), 대마국(對馬國;츠시마노쿠니)의 금전성(金田城;카나타노키)을 쌓았다
.[왜국은 일본의 한 지방이나 속국]
ㅇ 대우황자가 군사를 일으키고자 함
날짜(천무 원년) 672년 6월 26일
----------------황자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 수적신백족(穗積臣百足;호즈미노오미모모타리), 그 아우 오백지(五百枝;이호에), 물부수일향(物部首日向;모노노베노오비토히무카)을 왜경(倭京;야마토노미야코)으로, 좌백련남(佐伯連男;사헤키노무라지워토코)을 축자에 보내고 장사주반수(樟使主磐手;쿠스노오미이하테)를 길비국(吉備國;키비노쿠니)에 보내 모두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왜는 일본의 한 지방]
ㅇ 대반련마래전과 취부는 대해인황자에게 귀순함
날짜(천무 원년) 672년 6월 26일
이때 대반련마래전과 아우 취부(吹負;후케히)는 사정이 불리한 것을 알고 병을 핑계 삼아 왜(倭)에 있는 집으로 물러갔다. 그리고 황위를 잇는 것은 반드시 길야(吉野)에 있는 대황제(大皇弟)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래전이 먼저 천황에게 귀순하였다.
[왜는 일본의 한 지방]
ㅇ 군대를 거느리고 왜와 근강에 들어가게 함
날짜(천무 원년) 672년 7월 2일
가을 7월 경인삭 신묘(2일)에 천황이 기신아폐마려(紀臣阿閉麻呂;키노오미아헤마로), 다신품치, 삼륜군자수, 치시련토(置始連菟;오키소메노무라지우사기)를 보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세(伊勢)의 대산(大山;오호야마)을 거쳐 왜(倭;야마토)로 향하게 하였다. ----- 전중신족마려를 보내 창력도(倉歷道;쿠라후노미치)를 지키게 하였다.
[왜는 일본의 한 지방]
ㅇ 용전의 풍신과 광뢰의 대기신에게 제사지냄 / 왜국에서 상서로운 닭을 바침
날짜(천무 5년) 676년 4월 4일
여름 4월 무술삭 신축(4일)에 용전의 풍신(風神)과 광뢰의 대기신(大忌神)에게 제사지냈다. 왜국(倭國)첨하군(添下郡;소후노시모노코호리)의 악적길사(鰐積吉事;와니츠미노요고토)가 서계(瑞鷄)를 바쳤다. 그 볏이 동백꽃과 같았다. 이 날 왜국의 포파군(飽波郡;아쿠나미노코호리)에서 아뢰길 “암탉이 수탉이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왜국은 일본의 지방명]
ㅇ 4국에 부역과 조를 교대로 면제해 줌/ 왜국과 단파국에서 상서로운 짐승을 보고함
날짜(천무 13년) 684년(是年)
이 해에 “이하(伊賀), 이세(伊勢), 미농(美濃), 미장(尾張) 4국은 지금부터 조를 바치는 해에는 부역을 면하고 부역을 하는 해에는 조를 면하라.”고 명을 내렸다. 왜(倭;야마토)의 갈성하군(葛城下郡;카즈라키노시모노코호리)이 “네 발이 달린 닭이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또 단파국(丹波國;타니하노쿠니) 빙상군(氷上郡;히카미노코호리)이 “12개의 뿔이 있는 송아지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왜국은 일본의 지방명]
ㅇ 승려들이 곡을 하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조사를 읽음
날짜(천무 주조원년) 686년 9월 29일
병인(29일)에 승니가 또 곡을 하였다. --- 다음으로 직광사 수적조신충마려가 여러 국사의 일에 관해 조사를 읽었다. 다음으로 대우(大隅), 아다(阿多)의 준인(隼人) 및 왜(倭;야마토)와 하내(河內;카후치)의 마사부조(馬飼部造;우마카히베노미야츠코)가 각각 조사를 읽었다.
[왜는 일본의 지방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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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대왜국(大倭國)의 구금교(勾金橋)로 도읍을 옮김
날짜(안한 원년) 534년 1월
원년 봄 정월에 대왜국(大倭國;야마토노쿠니)의 구금교(勾金橋;마가리노카나하시)로 천도하고 이를 궁의 이름으로 하였다.
[대왜국은 일본의 지방명]
ㅇ 선화천황을 장사지냄
날짜(선화 4년) 539년 11월 17일
겨울 11월 경술삭 병인(17일)에 천황을 대왜국(大倭國;야마토노쿠니) 신협(身狹;무사)의 도화조판상(桃花鳥坂上;츠키사카노우에)의 능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황후 귤황녀(橘皇女)와 그 어린 아들[孺子]을 이 능에 합장하였다 [황후가 죽은 해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유자(孺子)는 아마도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 같다.].
[대왜국은 일본의 지방명]
ㅇ 기인을 뽑아 바칠 것을 명함
날짜(천무 4년) 675년 2월 9일
2월 을해삭 계미(9일)에 대왜, 하내(河內;카후치), 섭진(攝津;셋츠), 산배(山背;야마시로), 파마(播磨), 담로(淡路;아하지), 단파(丹波), 단마(但馬;타지마), 근강(近江), 약협(若狹;와카사), 이세(伊勢), 미농(美濃), 미장(尾張;워하리) 등의 국(國;쿠니)에 칙을 내려 “각 관할하의 백성 가운데 노래를 잘 부르는 남녀 및 주유(侏儒) 기인(伎人)을 뽑아서 바쳐라.”라고 명하였다.
[대왜는 일본의 지방명이나 속국]
ㅇ 초위 이상인 관인들이 대사(大射)를 행하고, 대왜국과 근강국에서 흰 매와 꿩을 바침
날짜(천무 4년) 675년 1월 17일
임술(17일)에 공경대부및 모든 백관들 중 초위(初位) 이상이 서문(西門) 마당에서 대사(大射) 행사를 가졌다. 또 이 날 대왜국(大倭國;야마토노쿠니)이 상서로운 닭을 바쳤으며 동국(東國)에서 흰 매를 바쳤다. 그리고 근강국(近江國)에서 흰 꿩을 바쳤다.
[대왜국은 일본의 지방명이나 속국]
ㅇ 고천원광야희(高天原廣野姬)의 가계와 황후로서의 역할
시대(지통 즉위전기)
일본서기 권 제30
-----천정중원영진인천황 원년 여름 6월에 천정중원영진인천황을 따라 동국(東國;아즈마노쿠니)으로 피난하였다. 그리고 군에 명하여 무리를 결집시켜 함께 계책을 세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자들 수만 명에게 명령하여 여러 요해 지역에 배치하였다. 가을 7월에 미농(美濃;미노)의 장군과 대왜(大倭;야마토)의 호걸들이 함께 대우황자(大友皇子;오호토모노미코)를 주살하여 그 머리를 들고 불파궁(不破宮;후하노미야)으로 찾아왔다. 2년에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황을 보좌하여 천하를 안정케 하였다. 항상 천황을 모시고 있는 동안에도 정사에 관해 언급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대신에게 폐백을 바침
날짜(지통 6년) 692년 5월 26일
경인(26일)에 사자를 보내 이세, 대왜(大倭;야마토), 주길(住吉;스미노에), 기이(紀伊;키) 네 곳의 대신(大神)에게 폐백을 바치고 신궁(新宮)에 보고하였다.
[대왜는 일본의 지방명]
ㅇ 신라의 공물을 신사에 바침
날짜(지통 6년) 692년 12월 24일
갑신(24일)에 대부들을 보내 신라의 조공물을 이세(伊勢), 주길(住吉), 기이(紀伊), 대왜(大倭), 토명족(菟名足) 등 다섯 개 신사에 바쳤다.
[대왜는 일본의 지방명]
2.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나 대왜는 일본의 지방명이나 속국
위의 자료는 동북아 역사넷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왜를 야마토라 읽는데, 이는 열도 초기 국가인 가야계 야마대국을 왜로 근거없이 바꾸기 위한 날조이다. 倭는 결코 야마토라 발음될 수 없는 글자이다.
일본서기는 일본에 관한 책이다. 일본과 왜의 관계는 일본서기를 보면 된다. 왜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기술되어 있고, 왜, 왜국, 대왜, 대왜국은 일본이 아님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일본으로 표현된 백제 관료인 왜왕 즉 천황이 왜를 비롯한 열도의 여러 지역을 다스린다는 것이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일본서기는 역사서 형식의 문학서이므로 일본 천황을 높이기 위해 때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이야기를 마치 열도소국의 이야기인 것처럼 기술하였다.
일제유사사학은 열도의 고대사를 고분시대(250-538) 아스카시대(538-710) 나라시대(710-794)로 구분하는데, 이는 열도의 고대사가 우리 역사였음을 부인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소설에 의하면 국호의 변경에 따라 야마토시대(250-710)와 일본시대(710 이후)로 구분하는 것이 타당함에도, 야마토시대라 하였다가 야마토정권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발각될까 두렵고, 야마대국이 가야계의 국가임이 드러날까 두렵고, 일본시대라 하였다가 일본이 백제임이 알려질까 두렵고, 가공의 야마토와 실재했던 일본이 연결될 수 없음이 밝혀질까 두려워, 그들은 그들의 뿌리를 부정하고 있다. 그들이 날조한 고대사는 우리와 그들이 공유하는 역사이므로, 날조자들 자신도 날조의 피해자에 포함된다.
일본서기를 신뢰성 있는 사서로 주장하는 강단유사사학자들은 일본서기를 스스로 부정한다. 일본서기에서 도저히 유도될 수 없는, 일제가 창작한 날조 일본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초등학교 독해력만 있다면 일본서기의 일본은 왜가 아님을 알 수 있음에도, 일제의 똥덩어리를 처먹기 위해 강단유사사학은 실체가 없는 야마토정권이 열도의 지배자였고, 야마토왜가 한반도로 진출했다는 개소리를 역사라 강변한다. 똥국을 된장국 먹듯 처먹으며 살이 찌는 그들은 똥돼지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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