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12. 창녕비)

역사회복 2023. 3. 20. 21:08
  1. 창녕비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해제」 표점문과 해석문은 다음과 같다. (2022.11.25. 현재)

辛巳年二月一日立. 寡人幼年承基, 政委輔弼. 侅智行悉 事末▨▨立▨▨▨赦▨▨▨▨▨四方▨改囚▨後地土▨陜也. 古▨▨▨不▨▨▨▨▨▨▨▨▨▨▨▨▨▨▨人普▨山▨心▨, 取利除林, ▨▨▨▨▨▨▨▨▨▨▨▨▨▨▨▨▨此▨州▨▨而已. 土地彊域山林▨▨▨▨▨▨▨▨▨也. 大等与軍主幢主道使与外村主, 審照. 故▨▨▨▨▨▨▨▨▨▨, 海州白田畓▨▨, 与山塩河川, ▨敎以▨▨▨▨▨▨▨▨▨▨▨▨▨▨▨▨▨▨人 照之. 雖不▨▨▨▨▨▨▨▨▨▨心▨▨河▨▨▨▨▨于之. 其餘少小事, 知古▨氵▨▨▨▨▨者▨▨以, 上大等与古奈末典, 法選▨人与上▨▨▨▨▨▨▨▨▨▨▨▨此以▨▨看其身受討.

于時, ▨▨大▨▨▨▨▨▨智葛文王, ▨▨▨▨者, 漢只▨▨屈珎智大一伐干, ▨喙▨▨智一伐干, ▨▨折夫智一尺干, ▨▨▨▨智一尺干, 喙▨▨夫智迊干, 沙喙另力智迊干, 喙小里夫智▨▨干, 沙喙都設智沙尺干, 沙喙伐夫智一吉干, 沙喙忽利智一▨▨, ▨珎利▨次公沙尺干, 喙尒亡智沙尺, 喙耶述智沙尺干, 喙▨▨▨▨沙尺干, 喙比叶▨▨智沙尺干, 本𣷭末▨智及尺干, 喙▨▨智▨▨▨, 沙喙刀下智及尺干, 沙喙▨▨智及尺干, 喙鳳安智▨▨▨.

▨▨等, 喙居七夫智一尺干, ▨一夫智一尺干, 沙喙甘力智▨▨干. ▨大等, 喙末淂智▨尺干, 沙喙七聡智及尺干.

四方軍主, 比子伐軍主沙喙登▨▨智沙尺干, 漢城軍主喙竹夫智沙尺干, 碑利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 甘文軍主沙喙心麥夫智及尺干. 上州行使大等, 沙喙宿欣智及尺干, 喙㳄叱智奈末. 下州行使大等, 沙喙春夫智大奈末, 喙就舜智大舍. 于抽悉▨▨西阿郡使大等, 喙北尸智大奈末, 沙喙須仃夫智奈▨. ▨爲人, 喙德文兄奈末. 比子伐停助人, 喙覓薩智大奈末. 書人沙喙導智大舍. 村主奕聡智述干, 麻叱智述干.

신사년[561년] 2월 1일에 세웠다. 과인은 어려서 제위에 올라 나랏일을 도와주는 신하에게 맡겼다. … 일의 끝에 … 사방으로 … 토지가 협소하였으나, … 이득을 취하고 수풀을 제거하여 … 토지와 강역과 산림은 … 대등(大等), 군주(軍主)와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외촌주(外村主)가 살핀다. … 고로 … 우리나라[海州]의 백전(白田) 답(畓) ▨▨와 산림, 소금, 하천은 … 비록 … 그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 상대등(上大等)과 고내말전(古奈末典), 법선▨인과 상(上) … 이로써 … 몸이 벌(罰)을 받는다.

이때 당시의 ▨▨대▨는 ▨▨▨▨▨지 갈문왕(葛文王)이다. ▨▨▨▨자는 한지▨▨의 굴진지(屈珎智) 대일벌간(大一伐干), ▨훼의 ▨▨지 일벌간(一伐干), ▨▨의 절부지(折夫智) 일척간(一尺干), ▨▨ ▨▨지 일척간, 훼의 ▨▨부지 잡간(迊干), 사훼의 무력지(另力智) 잡간, 훼의 소리부지(小里夫智) ▨▨간, 사훼의 도설지(都設智) 사척간(沙尺干), 사훼의 벌부지(伐夫智) 일길간(一吉干), 사훼의 홀리지(忽利智) 일▨▨, ▨진리▨차공(▨珎利▨次公) 사척간, 훼의 이망지(尒亡智) 사척(沙尺), 훼의 야술지(耶述智) 사척간, 훼의 ▨▨▨▨ 사척간, 훼의 비협▨▨지(比叶▨▨智) 사척간, 본피(本𣷭)의 말▨지 급척간(及尺干), 훼의 ▨▨지 ▨▨▨, 사훼의 도하지(刀下智) 급척간, 사훼의 ▨▨지 급척간, 훼의 봉안지(鳳安智) ▨▨▨이다.

▨▨등(▨▨等)은 훼의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 ▨▨부지(▨▨夫智) 일척간, 사훼의 감력지(甘力智) ▨▨간이다. ▨대등(▨大等)은 훼의 말득지(末淂智) ▨척간, 사훼의 칠총지(七聡智) 급척간이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서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는 사훼의 등▨▨지(登▨▨) 사척간이고, 한성군주(漢城軍主)는 훼의 죽부지(竹夫智) 사척간이고,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는 훼의 복등지(福登智) 사척간이고,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훼의 심맥부지(心麥夫智) 급척간이다. 상주행사대등(上州行使大等)은 사훼의 숙흔지(宿欣智) 급척간(及尺干), 훼의 차질지(㳄叱智) 내말(奈末)이고, 하주 행사대등(下州行使大等)은 사훼의 춘부지(春夫智) 대내말(大奈末), 훼의 취순지(就舜智) 대사(大舍)이다. 우추실▨▨서아군 사대등(于抽悉▨▨西阿郡使大等)은 훼의 북시지(北尸智) 대내말(大奈末), 사훼의 수정부지(須仃夫智) 내▨(奈▨)이다. ▨위인(▨爲人)은 훼의 덕문형(德文兄) 내말(奈末)이다. 비자벌정(比子伐停) 조인(助人)은 훼의 멱살지(覓薩智) 대내말(大奈末)이다. 서인(書人)은 사훼의 도지(導智) 대사(大舍)이다. 촌주(村主)는 혁총지(奕聡智) 술간(述干), 마질지(麻叱智) 술간이다.

2. 강단유사사학의 똥설

강단유사사학은 가야에 대해선 철저히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소설을 쓰다가, 갑자기 가야의 멸망에 대해선, ‘가야의 반란’이라는 문언은 무시하지만,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여 562년이라고 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신편한국사 7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3. 가야의 멸망 3) 가야연맹의 신라 복속 (2022.11.25. 현재)

「일본서기」에는 562년 이후에도 신라와 전쟁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는 임나가 7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등장하는데, 그들도 7세기까지 임나를 한반도에 존치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꼈는지, 태세전환하여 562년 임나(가야)가 멸망했다고 주장한다. 뜬금없이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참고하는 것에 부담을 느꼈는지 갑자기 561년에 세워진 창녕비를 들고나온다.

그들은 창녕비에 순수관경이라는 문구는 없어도 창녕비를 척경비(拓境碑)나 순수관경(巡狩管境)비로 볼 수 있어, 창녕이 당시 가야와 국경이었다고 주장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해제」 (2022.11.25. 현재)

그들은 진흥왕이 창녕까지 巡守해 와서 軍勢 시위를 하고 일련의 사면조치도 취하였고, 이는 가야연맹 제국에 대하여 위협과 유화의 시위를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편한국사 위 부분

 

3. 창녕비문을 있는 그대로 해석

창녕비문 어디에도 순수관경이라는 문언이나 척경이라는 문언이 없다. 창녕비 어디에도 군세 시위를 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의 진흥왕 순수비는 모두 ① 제목[題記] ② 순수배경과 경과[紀事] ③ 왕을 수행한 사람[隨駕人名列記]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북한사 황초령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해제」, (2022.11.25. 현재)

창녕비는 이들과 내용이 전혀 다르다. 농토 산림 소금 하천 등 경제 관련 업무분장이 나오고 참여자가 기록되었다. 창령비는 경제 관련 업무분장에 관한 진흥왕의 교시이다.

진흥왕 시 영토의 급격한 확대로 경제 관련 업무분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550년 도살성과 금현성을 확보하였고,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11년, 三月, 高句麗陷百濟金峴城. 王乘兩國兵疲, 命伊湌異斯夫出兵撃之, 取二城增築, 留甲士一千戍之.

551년 고구려 10군을 획득하였고,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12년, 王命居柒夫等侵高句麗, 乘勝取十郡.

553년 백제의 동북부를 탈취하였고,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14년,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興, 以阿湌武力爲軍主.

555년 가야의 합천, 557년 가야의 고령을 점령하였다. 이후 553년 백제로부터의 점령지에 신주를, 555년 합천에 완산주를, 556년 비열홀주를,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十七年, 秋七月, 置比列忽州, 以沙湌成宗爲軍王

557년에 국원소경 감문주 북한산주를 『삼국사』 「신라본기」 진흥왕 十八年, 以國原爲小京.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설치하는 등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개편 과정에서 경제 관련 업무분장에 불명확한 부분이 생겨서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창녕에 비를 세웠다. 가야가 이미 망했는데 가야에 군세 시위를 할 이유도 없으며, 당시 신라는 백제는 물론 고구려에게도 대등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가야가 망하지 않았다 가정하더라도 마을국가로 쪼그라든 가야에 군세 시위를 하였다는 것은 우습지도 않은 소설에 불과하다.

4.

가야는 557년 신라에 정복 당하여 561년에는 가야가 있지도 않은데, 소위 강단사학계는 비문의 내용과 아무 관계도 없는 국경을 날조하면서 임나가 가야라고 한다.

일제유사사학에 충성하기 위해, 어떻게든 561년에도 임나가 있었고 강력했다고 말하면서 창녕비를 문언과 달리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그들의 놀라운 충성심과 날조력은 유사사학의 영원한 본보기가 될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지록위마(사슴을 말이라 함) 해놓고 사슴이라 하는 사람은 교수 시켜주지 않고 말이라 하는 사람만 교수를 시켜준다. 이들은 창녕비같은 명백한 것이 있으면 더욱 좋아한다. 사슴을 말이라고 하면 일제에게 그들의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 똥을 주는대로 처먹는 충성을 보임으로써 그들은 교수가 되고 출세도 할 수 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