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하백은 누구인가?

역사회복 2023. 3. 21. 23:23

1. 대부여의 하백

서기전 425년 신조선(삼조선 시기 요서 있던 조선)은 대부여로 변화한다. 『단군세기』는 이를 백민성 욕살이었던 구물의 집권과 국호의 변경으로 기술하고 있다. 『단군세기』 44세단군, 丘勿, 為諸將所推, 乃於三月十六日, 築壇祭天, 遂即位于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

그러나 『삼국유사』가 단군의 수명을 1908세라 하므로 신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대부여의 건국설화에서 나타난다.

(ㄱ) 『삼국유사』가 인용하는 『단군기』

壇君記云 “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名曰夫婁.” 今拠此記, 則解慕漱私河伯之女而後産朱蒙. 壇君記云 “産子名曰夫婁”, 夫婁與朱蒙異母兄弟也.

≪단군기(檀君記)≫에 이르기를 “[단]군(君)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상관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지금 이 기록을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관계하여 뒤에 주몽을 낳았다고 하였다. ≪단군기≫에는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부루이다.”라고 하였으니 부루와 주몽은 이복형제(異母兄弟)일 것이다.

(ㄴ) 『응제시주』

聚非西岬河伯之女 生子曰夫婁 是爲東夫餘王

단군이 비서갑 하백의 딸을 취하여 부루를 낳았는데 이가 동부여왕이 되었다.

(ㄷ)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

『檀君古記』云: --- 檀君聘娶非西岬河伯之女生子, 曰夫婁, 是謂東扶餘王。---

단군이 비서갑(非西岬) 하백(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동부여(東扶餘) 왕(王)이라고 이른다.

환웅이 웅녀와 혼인하여 낳은 아들인 단군이 배달국을 이은 조선의 왕이 되었듯이, 단군이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인 부루가 신조선을 이은 대부여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단군세기』는 초대 단군이 하백의 딸을 왕후로 삼아 태자 부루를 낳았다고 한다. 이 기록을 사실로 보면 중국 동부의 농업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단군이 이들과 혼인을 통해 연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초대 단군의 혼인과, 대부여의 건국은 다른 사건이지만, 단군과 하백세력의 결합이라는 점이 공통되어 후세에 이를 같은 사건으로 인식하여 아들의 이름이 부루로 같아졌을 가능성도 있다. 삼한조선의 단군은 무력으로 삼한을 정복하여 타집단과 연합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면, 대부여 건국설화의 하백과 부루를 삼한조선의 초대 단군에게 잘못 연결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대부여가 아니고 동부여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단순화하여 전달하는 역사설화의 특성으로부터 기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는 대부여-북부여-동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정통성의 흐름이 있지만, 고구려로 이어지기 위해 꼭 설명이 필요한 동부여로 바로 연결시켰다. 실제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인용된 『단군고기』와 『삼국사』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서 부루, 금와, 해모수는 추모의 고구려 건국을 설명하기 위한 조연으로 등장한다.

대부여의 건국설화에서 나타나는 하백은 수신이므로 농업과 관련된다. 춘추전국시대 중국동부에서 밀려난 북부 번조선인들은 일부는 韓지역으로 들어가고 일부는 북쪽으로 간 것으로 추측된다. 북쪽으로 간 농업세력이 대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추측된다. 당가홍도 포고=박고가 중국 동부에서 밀려나 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본다(이하동서설, 부록). 김명옥도 동이족인 하백 집단이 상나라가 그 제후국인 주나라에 패하자 일부가 본래 선조가 살았던 동북지역으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김명옥(Kim, Myung-ok). "고구려 건국신화 하백의 출자에 대한 인식 재검토." 문화와융합, 38권, 3호, 2016, 301-326.]

대부여 건국자 부루의 어머니가 하백의 딸이라는 것은 부여가 농업세력의 지지 또는 농업세력과의 연합으로 새 나라를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신조선의 위치상 수렵과 목축을 주로 하는 집단이 농업을 주로 하는 집단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추측되는데, 농업집단에 대한 과도한 수취가 이들의 반발을 가져왔고, 이러한 반발을 계기로 농업세력에 우호적인 수렵목축세력이나 농업세력(중국 동부로부터의 이주세력)이 권력을 탈취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부여(扶餘)라는 국호도 곡식이 남도록 즉 풍년이 되도록 돕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단군세기』가 정통성의 단절을 회피하기 위해 대부여를 삼조선과 연결시켜 기술하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지만, 다른 사서에 기술되지 않은 대부여를 기술하고 있고, 그것이 대부여의 건국설화에 의해 입증된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인정된다.

2. 고구려의 하백

진번조선의 지방세력이었던 고구려가 대부여를 무너뜨리고 북부여를 건국하였다. 진번조선은 상업세력이었으므로 북부여 건국설화에는 시녀, 햇빛, 알만 등장하고, 하백은 등장하지 않는다. 부여의 건국설화라고 주장되는 『논형』의 북이탁리국(北夷橐離國), 『위략』의 북방 고리국(高離國), 『후한서』의 색리국(索離國) 모두 고리국 즉 진번조선의 지방세력이었던 고구려를 의미하며, 관련 설화는 북부여의 건국설화이다. 고구려의 건국설화는 북부여의 건국설화에 해모수와 하백이 추가되는데, 해모수는 햇빛보다 더 확실하게 추모가 하늘의 자손임을 주장하는 것이고, 하백이 추가되는 것은 고구려가 농업세력을 보호하겠다는 것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 의하면 유화부인은 추모에게 오곡의 종자를 전해준다. 『동국이상국집』 「동명왕편」 朱蒙臨別, 不忍睽違, 其母曰, 汝勿以一母爲念, 乃裏五穀種以送之. 朱蒙自切生別之心, 忘其麥子. 朱蒙息大樹之下, 有雙鳩來集. 朱蒙曰, 應是神母使送麥子, 乃引弓射之, 一矢俱擧. 開喉得麥子, 以水噴鳩, 更蘇而飛去云云.

『삼국사』가 인용한 『북사(北史)』에 의하면 고구려는 고등신인 추모와 부여신인 유화에게 제사를 지냈다. 『삼국사』 「잡지」 제사조, 北史云, “髙句麗, 常以十月祭天, 多淫祠. 有神廟二所, 一曰夫餘神, 刻木作婦人像. 二曰髙登神, 云是始祖, 夫餘神之子. 竝置官司, 遣人守護, 蓋河伯女·朱蒙云.” [『북사』는 “고구려는 항상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낸다. 사당이 많다. 신묘 2곳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신인데, 나무를 깎은 부인상이다. 둘째는 고등신으로 시조인데, 부여신의 아들이다. 관사를 곁에 두고, 사람을 보내어 수호하는데, 하백의 딸과 추모를 말한다고들 한다”고 하였다.]

 

유화부인이 오곡의 종자를 전해주고, 추모와 유화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고구려가 농업을 중시하였음을 의미한다.

일연은 단군기 내용을 토대로 추모와 부루를 이복형제로 보는데, 대부여 건국설화에서 아버지는 단군이고, 고구려 건국설화에선 해모수이므로 일연의 추정은 타당하지 않다. 대부여 건국설화에서 하백은 농업세력이 건국의 주도 세력임을 나타내고,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하백은 고구려의 정책방향을 나타냄에 불과하다. 실제 추모의 건국을 도운 연타발 소서노는 상업세력이기 때문이다.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延佗渤, 卒本人。來往於南北曷思, 而理財致富, 至累巨萬。陰助朱蒙, 其創基立都之功, 居多。後, 率衆, 轉徙九黎河而賈漁鹽之利, 及高朱蒙聖帝, 伐北沃沮, 納穀五千石。移都訥見, 而先自願納, 招撫流亡, 以勤王事。以功得封於坐原, 而年八十。時, 平樂十三年, 丙申, 春三月也。[연타발은 졸본사람이다. 남북 갈사를 오가며 재물을 모아 엄청난 부를 쌓았다. 음으로 주몽을 도와 창업의 기틀을 닦고 도읍을 짓는데 세운 공이 많았다. 훗날 사람들을 이끌고 구려하로 이주하여 어물과 소금 장사로 돈을 벌었고,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 곡식 5천석을 바쳤다. 눌견으로 도읍을 옮길 때는 먼저 자원하여 양곡을 바치고 유망민을 거두어 달래면서 부지런히 왕의 일을 도왔다. 그러한 공으로 좌원에 봉해졌고 80세가 되어 죽었다. 이때가 평락 13년 병신년 춘삼월이었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