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기타 강단유사사학의 코미디 억지들
강단유사사학의 주장 전체가 코미디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코미디를 따로 언급하는 이유는 그들의 판타지 소설과 역사학이 체계적으로 대응되기 어려워 그들의 금쪽 같은 코미디를 위에서 다 기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가야는 평양의 낙랑군과 해상으로 교역하였고 남제와도 교역했다?
전술하였듯이 新錢(소위 왕망전)은 김해를 중심으로 남해안과 제주도 대마도 구주 북쪽에서 상당량이 발견되며, 강단유사사학이 한4군 지역이라 사기 치는 북한과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미미하게 확인된다. 이는 왕망 정권의 실세였던 김씨 집단이 김해로 도망 온 것을 의미하며 CE 42년의 가야 건국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김해패총에서 출토된 王莽錢, 김해 良洞里 토광묘의 後漢代 尙方鏡, 창원 茶戶里 목관묘에서 나온 前漢代 星雲鏡·五銖錢·琴形帶鉤·小銅鐸, 창원 성산패총에서 나온 五銖錢 등은 낙랑과의 교역을 방증해 주는 것들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 대로 新錢이 평양의 낙랑군과 가야의 교역에 사용되었다면 낙랑군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되어야 한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는 新錢은 김해와 평양과의 교역과는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무역은 백제에 의해 행해졌다. 가야는 백제가 행하는 무역의 상대방에 불과하였고, 백제의 무역권에 대항할 정도의 힘이 없었다. 따라서 강단유사사학이 제시하는 가야 무역의 증거들은 가야가 백제가 행하는 무역의 상대방이라는 증거에 불과하다.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지』와 『후한서』를 오해하여 가야가 철의 주산지로서 낙랑군과 무역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삼국지』는 변진의 철이라 하고, 『후한서』는 진한의 철이라 하는데, 변진과 진한 모두 韓 지역의 신라를 가리킴은 전술하였다. 남한에는 변한 진한 변진이 있었던 적이 없다. 韓 지역 신라의 철이 좋았던 이유는 석씨 집단이 당시 질 좋은 철을 생산하였던 남인도 타밀에서 왔거나 타밀인들의 기술을 습득하였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어떻든 『삼국지』와 『후한서』가 말하는 철 생산자와 가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가짜 무역을 만들고, 가야가 낙랑군과 왜 신라의 중개무역으로 번성하였으며, 낙랑군이 평양에서 없어지자 가야가 약화되었다고 한다. 가야가 약화되자 포상팔국이 가야를 공격했고, 가야는 교역상대를 낙랑군 대신 백제로 변경하였으나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망했다고 한다. 전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고 그들의 소설이다. 특히 포상팔국의 공격이 『삼국사』와 『삼국유사』에서 3세기 초라고 나와 있음에도, 어떤 근거도 없이, 오직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4세기에 있었다고 사기 친다. 그들은 가야가 해상으로 평양의 낙랑군과 김해 사이의 무역을 했다고 주장하는데, 당시의 항해기술상 김해와 평양간 항해는 백제의 해안을 따라서 행해져야 하므로, 백제가 가야의 영향권 내에 있지 않는 이상, 가야의 독자적 무역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평양에 낙랑군은 없었고, 평양은 고구려의 한성이므로, 평양과 김해의 무역은 고구려와 가야의 무역이 된다. 즉 그들의 낙랑군과의 교역 소설은 낙랑군 평양설에 의존하므로, 낙랑군 평양설이 사기임이 드러난 이상 코미디에 불과하다.
『남제서』는 479년 가야왕 荷知를 輔國將軍本國王으로 책봉하였다 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이를 근거로 가야가 對中交易을 독자적으로 성공시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의 조공을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소도성은 찬탈로 정권을 잡아서 정통성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북조의 위와 비교하여 적당한 수의 조공국을 만들 필요가 있어, 가야를 이용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도성의 신하들이 백제에게 조공국을 추천해 주라 부탁하여 백제가 가야와 가야왕의 이름인 하지를 알려 주었을 것이다. 남제는 하지왕을 책봉했다고 하면서 가야의 정확한 표기를 몰랐기 때문에 ‘자기나라 왕’을 뜻하는 ‘본국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가야를 연맹체라 하고 대가야를 고령의 마을국가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의 소설을 위해선 마을국가가 고대국가 백제의 해상무역권을 침해한다는 놀라운 주장을 서슴치 않는다.
464년 「일본서기」의 일본이 고구려마을과 싸운 이야기는 거짓이다?
「일본서기」 464년 2월 이야기는 신라마을이 고구려마을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신라마을이 신라마을에 있던 고구려인들을 죽이자 고구려마을이 침략하였고, 신라마을이 임나의 일본부에 구원을 청하자, 일본이 고구려마을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천황이 즉위하고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新羅國)이 속이고 배반하며 포저(苞苴)를 바치지 않은 지가 지금에 이르러 8년째였다. 그러나 중국(中國)의 의도를 매우 두려워해서 고구려와 화의를 닦았다. 이로 인해 고구려 왕이 정예병사 1백 인을 보내어 신라를 지키게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고구려 군사 한 사람이 잠시 나라로 돌아갔는데, 이때 신라인을 전마(典馬)로 삼았다[典馬는 우마카히(于麻柯比)라고 읽는다.]. 그가 돌아보며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 의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어떤 책에서는 “너희 나라가 마침내 우리의 땅이 될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전마는 이를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고 물러나서 뒤에 있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달아나 들은 바를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이 고구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줄 알고, 사신을 보내 급히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은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명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곧 그 뜻을 알고 나라 안에 있는 고구려인을 모두 죽였는데, 다만 고구려인 한 사람이 틈을 타서 벗어나 도망쳐 자기 나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고구려왕은 곧 군사를 일으켜 축족류성(筑足流城)에 모여서[어떤 책에서는 도구사기성(都久斯岐城)이라고 하였다.] 드디어 노래와 춤으로 즐거움을 돋우었다.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로 인해 임나왕이 선신반구(膳臣斑鳩;카시하데노오미이카루가)[斑鳩는 이카루가(伊柯屢俄)라고 읽는다.], 길비신소리(吉備臣小梨;키비노오미워나시), 난파길사적목자(難波吉士赤目子;나니하노키시아카메코)에게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하였다. 선신(膳臣;카시하데노오미) 등은 군영을 설치하고 머무르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은 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하였다. 선신 등은 직접 힘써 군대를 위로하고 나서 군사들에게 빨리 공격할 준비를 시켜 급히 진격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대치한 지 10여 일이 지나자, 밤에 험한 곳을 파서 땅굴을 만들어 군대의 무기와 식량을 모두 운반하고 매복병을 배치하였다. 새벽에 고구려는 선신 등이 달아났다고 생각하여 병력을 모두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러자 매복병을 풀고,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는 고구려와 신라를 말한다.]. 선신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지극히 약한데도 지극히 강한 나라와 대적하였다. 관군(官軍)이 구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번 싸움에서 하마터면 나라를 빼앗길 뻔하였다. 지금부터는 어찌 천조(天朝)를 배반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이야기는 광개토대왕의 열도 정벌로 5세기 초 열도가 남북국시대로 되었다가, 다시 백제가 반격하는 과정의 이야기이다. 위 이야기는 고구려계의 지배 하에 있던 신라마을을 백제가 점령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이 이야기도 한반도의 신라와 고구려에 관한 이야기로 보면서, 황당무계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이 이야기의 行軍元帥는 外征에 나선 장군에게 주는 호칭이며 5세기에는 왜가 신라를 빈번하게 침략하였으므로,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서 온 왜의 장수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행군원수가 신라를 공격한 왜의 장수라면 뒤에 임나일본부가 신라를 구원하는 내용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임나일본부가 신라를 구원하는 내용은 사실 여부가 의심된다고 주장한다. 그들 소설을 전제하고, 그들이 사료라고 주장하는 「일본서기」를 그들의 소설에 따라 난도질하는 것이 그들이 자랑하는 실증적 역사 연구이다.
전술하였듯이 431년 이후 5세기에 신라를 침략하는 왜는 열도에서 백제에 밀려남에 따라 생존을 위해 신라로 해적질을 하러 간 고구려계 열도 소국들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열도의 우리 역사를 부인하므로 「일본서기」 464년의 이야기를 설명하지 못한다. 신라마을을 구하는 즉 신라마을을 영향권 내로 흡수하는 일본은 열도백제 즉 백제관료 왜왕이며, 신라를 침략하는 왜는 열도백제에 밀려난 고구려계 마을국가들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구원군을 침략군이라 날조하여서라도 일제의 소설에 충성하려고 한다.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 영토가 아니다?
강단유사사학이 기문국이라 주장하는 남원의 고분에서 백제의 금동신발, 청동거울, 계수호가 출토되었다. 지방세력에게 하사하는 위세품이 백제의 것이라면 당연히 그 지역은 백제가 지배한 지역이지 가야일 수가 없다. 충청도 전라도 모두 백제의 위세품이 발굴되므로 처음부터 백제의 영토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같은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충청도는 백제, 나주는 마한, 남원은 임나=가야라 주장한다.
그들이 백제 영역이 아니라고 사기 치는 곳에서 발굴되는 백제 위세품은 그 지역의 독립국이 백제와 교섭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위세품은 백제의 지방통제방식이므로 교역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열도 등 백제의 위세품이 나온 곳도 모두 백제의 영토가 아니라 백제와 교섭한 독립국이 되어 백제의 영토는 없어질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토기와 무덤의 구조 등을 근거로 남원 고분을 가야계 고분이라 하면서 남원을 가야라 주장한다. 토기나 무덤의 구조는 지배세력이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토착적 문화이다. 토기나 무덤양식이 같아도 지배자에 따라 백제가 지배한 곳은 백제가 되고, 가야가 지배한 곳은 가야가 된다. 백제와 신라의 지배층은 韓에서 왔고, 가야의 지배층은 新나라에서 왔는데, 이들이 온다고 모든 문화가 지배층의 문화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즉 토기 귀걸이 등 생활용품 등과 무덤의 구조는 지배세력이 달라진다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토착적 문화이며, 토기나 무덤양식이 같아도 지배자에 따라 백제가 지배한 곳은 백제가 되고, 가야가 지배한 곳은 가야가 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강단유사사학이 임나=가야의 것이라 사기 치는 모든 유물이나 유적은 한반도 남부식이라 해야 타당하다. 가야 토기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식 토기라 해야 하고, 가야 무덤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의 토착 무덤 형식이라 보아야 한다. 백제식 토기로 변경된다는 것도, 백제의 중앙에서 유행하던 토기가 지방에까지 유행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지 이를 영토가 가야에서 백제로 바뀌는 증거로 볼 수는 없다.
그들이 백제 위세품이 발견되어도 백제가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사기를 치는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후지노기 후나야마 등 열도의 고분에서도 백제의 위세품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나라와 구주가 모두 백제의 영토였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조선총독부 소설에 무한한 충성을 다하는 그들은 코미디인 줄 알면서도 사기를 칠 수밖에 없다.
장수의 반파국은 봉수망을 운영했다?
일부 강단유사사학은 반파국이 장수를 수도로 하고 전라도 동부지방을 영역으로 한 가야연맹체의 한 나라라고 주장하며, 장수가 철의 생산과 유통으로 국력을 다져 봉수망을 구축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주장엔 전혀 근거가 없다. 그들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직은 반파국과 제철유적의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지만, 반파국 가야 고총에서 단야구와 편자를 중심으로 마구류, 무구류 등 지역색이 강한 철기류가 출토되어 그 가능성을 더욱 높였다. 일단 반파국이 봉화 왕국으로 융성하는데 철의 생산과 유통이 결정적인 공헌을 했을 것으로 유추해 두고자 한다.
이들 강단유사사학도 여타 강단유사사학처럼 고분이 가야식이라고 하면서 전라도 동부를 가야라고 주장하나, 묘제는 한반도 남부식이지 가야식이 아니다. 이들이 장수의 봉수망과 제철 유적이라 주장한 유적 역시 가야 토기를 근거로 하나 이들 토기는 한반도 남부식 토기이고 가야식 토기가 아니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에서도 그들이 말하는 가야식 토기가 발견된다. 사비도 가야 영역이었는가? 즉 장수가 반파국의 수도이고 그들이 주장한 봉수와 제철유적이 반파국의 것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들은, 가야연맹체의 구성원에 불과하며 수도를 지킬 읍성조차도 없는 반파가 고대국가 백제를 침략하여 영토를 탈취하여 봉화망과 제철소를 운영하였다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소설이라 하기도 어렵다. 곽장근은 그가 주장하는 봉화나 제철 유적이 그가 주장하는 시기의 것이라 입증할 탄소연대측정의 결과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곽장근이 제시하는 봉화와 제철 유적 자체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아무런 실증이 없는 주장을 근거로 정부 예산을 받아내서 아무런 실증이 없는 결과물을 내놓아도 용인되는 것이 강단유사사학과 강단유사고고학이 자랑하는 실증주의의 정체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유일한 근거는 「일본서기」의 “반파가 자탄과 대사에 성을 쌓고, 만해와 연합하여 봉수와 저각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라는 이야기이다. 그들에 따르면 대사는 하동이므로 하동부터 장수까지의 봉화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하동부터 시작되는 봉화망은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반파는 백제를 침략하여 영토를 확보한 나라이며 봉수망을 운영할 정도의 대국이고, 그들이 인용하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반파는 신라를 괴롭히는 나라인데, 일본은 겨우 5백명으로 반파를 진압하려 했다. 그들의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는 역사소설도 될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남가라는 김해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남가라가 김해라 주장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남가라는 김해일 수가 없다. 「일본서기」의 남가라 관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ㄱ) 249년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ㄴ) 527년 6월
21년 여름 6월 임신삭 갑오(3일), 근강모야신이 무리 6만을 거느리고 임나에 가서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남가라(南加羅)와 탁기탄(㖨己呑)을 다시 일으켜 세워 임나에 합치고자 하였다. 이때 축자의 국조(國造) 반정이 은밀히 반역을 도모한 지 수년이 지났다.
(ㄷ) 529년 3월
같은 달,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신라에 천황의 칙을 전하여 남가라와 탁기탄을 재건토록 권하였다. 백제는 장군 군윤귀, 마나갑배, 마로 등을 파견하여, 안라에 가서 조칙을 들었다. 신라는 번국에 있는 관가를 멸망시켰으므로 두려워하여 높은 지위에 있는 자를 보내지 않고, 부지나마례와 해나마례 등을 안라에 보내어 조칙을 듣게 하였다. 이때 안라는 새로 고당(高堂)을 만들어 칙사를 오르게 하였다. 안라의 국주는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으며, 안라의 관위가 높은 자도 미리 당에 올라와 있는 사람도 하나 둘 있었으나, 백제의 사신 장군 군(君) 등은 당 아래에 있었다. 여러 달 동안 두 세번 당 위에서 회의가 이루어졌는데, 장군 군 등은 당 아래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ㄹ) 541년 4월
성명왕은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망한 것이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라고 말하였다.
(ㅁ) 541년 7월
그리고 (성명왕은) 임나에게 “--- 따라서 지금 선대의 화친의 우호를 존중하여, 삼가 천황의 조칙에 따라 신라가 빼앗은 남가라, 탁기탄 등을 빼앗아 본관에 되돌려 임나로 옮기고 영원토록 부형으로 삼아 항상 일본을 섬기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ㅂ) 544년 3월
3월에 백제가 나솔 아탁득문, 허세 나솔 기마, 물부 나솔 가비 등을 보내서 표를 올려 “---만약 탁순국의 왕이 신라와 내통하여 적을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한 화근을 두루 살펴보면 모두 내응하거나 딴 마음을 품은 자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마도 등이 신라와 마음이 통하여 그 옷을 입고 밤낮으로 왕복하면서 은밀히 나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나가 영원히 망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임나가 만일 망하면 신의 나라도 고립되어 위태롭게 됩니다.---”
(ㅅ) 600년 2월
8년 봄 2월에 신라와 임나가 서로 싸웠다. 천황이 임나를 구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 경부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수적신을 부장군으로 삼았다[모두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임나를 위하여 신라를 치려하였다. 이에 즉시 신라를 목표로 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그리고 신라에 이르러 5성을 공략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두려워하여 백기를 들고 장군의 휘하에 이르렀다. 그리고 다다라(多多羅), 소나라(素奈羅), 불지귀(弗知鬼), 위타(委陀), 남가라(南迦羅), 아라라(阿羅羅)의 6성을 할양하고 항복을 청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가 열도를 처음 점령할 때, 남가라, 탁(탁기탄), 탁순은 신라마을의 영토였다. 백제 담로는 신라마을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남가라 탁기탄 탁순 등 신라7국을 신라마을의 관할에서 제외하였다. 신라마을은 열도의 남북국 시대 고구려 지배 하에서 남가라 탁기탄 탁순을 탈환하였다. 백제마을은 백제가 다시 열도를 전부 지배한 후, 이 세 지역을 신라로부터 떼어내어 임나마을의 관할로 하려 한다. 백제 왜왕은 백제와 임나의 편을 들면서 신라마을의 세력을 억제함으로써, 마을국가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따라서 위 이야기의 백제 신라 임나 남가라 탁기탄 탁순 등은 열도의 마을국가명이나 지명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남가라를 김해, 탁기탄을 낙동강 동안의 영산, 탁순을 창원이라 주장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이 세 지역은 527년 6월 이전에 신라마을에 탈환된다. 열도의 남북국 시대에 탈환될 것이므로 5세기 초중반에 탈환되었을 것이다. 김해는 532년 최초로 신라 영토가 되므로 369년(249년) 이전에 신라의 영토였다가 369년(249년)에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가 5세기에 다시 신라가 되는 신라7국의 남가라가 김해일 수는 결코 없다. 고대국가의 일반적 국경선에 비추어, 낙동강 동쪽에 임나=가야의 영토가 있다는 것도 그들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영산을 527년 이전 어느 시기에 신라가 임나=가야로부터 탈취하였다는 사료도 전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탁순 탁기탄 남가라는 532년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에 통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서기」를 부인한다. 백제가 영산 김해 창원을 임나=가야로 재건하려 시도할 이유도 전혀 없다. 영산 김해 창원이 신라의 영토로 확정된다고 백제가 고립될 이유도 전혀 없다. 그들의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눈물겨운 충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앞뒤 불일치의, 모범적 유사사학성을 우리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함안의 안라국이 임나 재건을 위해 안라회의를 주재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안라회의와 사비회의라는 회의 형식의 새로운 코미디를 개발하여 소설 「야마토임나」를 풍성하게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위 「일본서기」 529년 3월 이야기를 근거로 529년 3월 함안의 안라국에서 김해 창원 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한 회의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은 함안이 가야의 지방이 아니라 독립성이 강한 가야라고 보아 함안의 안라국이 회의를 주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에 의하면 함안이 아나가야 또는 아시량국이므로 함안이 안라국이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안라가 아나나 아시량과 음상사라는 가짜음상사로 함안이 안라국이었다고 우긴다.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회의를 개최한 이유는 동쪽으로 진출하려는 백제와 서쪽으로 진출하려는 신라를 외교력으로 물리치고자 하는데 있었다고 한다.
함안의 마을 국가가 백제와 신라를 불러들여 회의를 한다는 것부터 코미디이고 더 가관은 백제대표는 회의장인 고당에 앉지도 못하고 땅에 앉아서 회의를 하였다는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백제대표가 땅에서 회의에 참석한 것은, 안라가 백제가 기문 대사를 취할 때는 백제 편이었다가, 안라회의 시에는 백제를 견제하기 때문이라 한다.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임나=가야가 연맹체인데, 백제가 가야를 침입할 때 안라가 백제 편이라면, 안라가 왜 임나=가야의 연맹체 소속인지 알 수 없다. 더구나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신라에 뺏긴 가야 소국을 가야 연맹체로 복귀 시키는 목적의 회의이므로, 신라 대표는 홀대 할 수 있어도 백제 대표는 홀대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달에 겨우 두 세번 회의가 있었던 것도 우습지만, 백미는 백제 대표가 당 아래에 있는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가 함안 마을 국가가 개최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부터 말이 안 되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상식적으로 함안이 다 도륙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백제 대표를 땅바닥에 놓아 둘 수 없고, 만약 그랬다면 백제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가버리지, 거기에 남아서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열도 마을국가들간의 이야기라 하여도 코미디인데, 이러한 이야기를 한반도의 백제 신라와 연결시키는 강단유사사학의 탁월함에 숨이 멈춰질 뿐이다. 그들은 안라를 한반도에 정착시키기 위해 철면피를 뒤집어 쓰고서라도 일제유사사학에 헌신하는 경이로운 투혼을 발휘한다.
성왕이 임나 재건을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다음 이야기를 근거로 성왕이 김해 창원 영산을 신라로부터 독립 시키기 위해 사비회의를 주재하였다고 주장한다.
(ㄱ) 541년 4월
여름 4월에 안라(安羅)의 차한기(次旱岐) 이탄해(夷呑奚),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등과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한기(卒麻旱岐), 산반해한기(散半奚旱岐)의 자식, 다라(多羅)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한기(斯二岐旱岐)의 자식, 자타한기(子他旱岐)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미마나야마토노미코토모치)의 길비신(吉備臣;키비노오미)[이름이 빠졌다.]이 백제에 가서 함께 조서(詔書)를 들었다. 백제의 성명왕(聖明王)이 임나의 한기들에게 “일본 천황이 조를 내린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이제 어떤 책략으로 임나를 재건할 수 있겠는가. 모두 각자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뜻이 펼쳐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임나 한기들은 “이전에 두세 차례 신라와 의논하였으나 회답이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다시 신라에 알린다고 해도 여전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함께 사신을 천황에게 보내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大王)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삼가 교지를 받드는 것에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있기 때문에 탁순 등이 화를 입은 것이 두렵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등이라는 것은 탁기탄(㖨己呑), 가라(加羅)를 말한다. 탁순 등의 나라처럼 망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명왕은 “옛날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의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 등이 처음 사신을 파견하여 통교하고 두텁고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어 자제(子弟)가 되어 항상 번영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신라에 속아 천황의 분노를 사고 임나의 원한을 산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후회하고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 마로(麻鹵), 성방(城方) 갑배매노(甲背昧奴) 등을 보내 가라에 가서 임나의 일본부를 만나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이후 이 일을 계속 염두에 두어 임나를 세우는 계획을 조석으로 잊지 않았다. 지금 천황이 조를 내려 ‘속히 임나를 세워라’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그대들과 함께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수립하고자 한다. 마땅히 잘 계획해야 한다. 또한 임나의 국경에 신라를 불러 조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닌가 묻겠다. 동시에 사자를 보내 천황에게 주상하여 삼가 교시를 받겠다. 만약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공하면 나는 반드시 가서 구할 것이다. 걱정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방비를 잘하고 조심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그대들이 탁순 등이 화를 입은 것이 두렵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탁기탄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망한 것이다. 임나도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멸망한 것이다. 남가라는 땅이 협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탁순은 임금과 신하가 나뉘어 뿔뿔이 흩어져 왕 스스로가 귀부하려는 생각으로 신라에 내통하였다. 이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힘과 마음을 합쳐 천황의 힘을 빌리면 임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게 주었다. 모두 기뻐하며 돌아갔다.
(ㄷ) 544년 11월
11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일본부의 신과 임나의 집사를 불러 “천황에게 보낸 나솔 득문과 허세 나솔 기마, 물부 나솔 가비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지금 일본부의 신과 임나국의 집사는 마땅히 와서 칙명을 듣고 함께 임나의 일을 협의하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길비신(吉備臣), 안라의 하한기(下旱岐) 대불손(大不孫), 구취유리(久取柔利), 가라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 졸마군(卒麻君), 사이기군(斯二岐君), 산반해군(散半奚君)의 아들, 다라의 이수위(二首位) 흘건지(訖乾智), 자타한기(子他旱岐), 구차한기(久嵯旱岐)가 백제에 이르렀다. 이에 백제의 성명왕이 조서의 개요를 알리며 “나는 나솔 미마사, 나솔 기련, 나솔 용기다 등을 일본에 보냈다. 그러자 (천황이) 조를 내려 ‘빨리 임나를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또 진수련이 칙을 받들어 임나를 세웠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따라서 모두를 부른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임나를 세울 수가 있을 것인가. 각자의 계책을 말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길비신, 임나한기 등이 “무릇 임나국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왕을 따라 함께 주상하여 칙을 듣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성명왕이 “임나국은 우리 백제와 예부터 지금까지 자제와 같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지금 일본부의 인기미(印岐彌)[임나에 있던 일본의 신하의 이름이다.]는 이미 신라를 쳤고 이번에는 우리를 치려고 한다. 또 기꺼이 신라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릇 인기미를 임나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해하려 한 것이 아니다[잘 알 수 없다.]. 예부터 신라는 무도하다.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깨고 탁순을 멸망시켰다. 신뢰하는 나라로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오히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를 불러 같이 은조(恩詔)를 받들어 임나국을 일으키고 계승시켜, 옛날과 같이 영원히 형제가 되기를 바란다. 듣건대 신라와 안라 양국의 국경지역에 큰 강이 있는데 요해의 땅이라고 한다. 나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6성을 쌓으려 한다. 삼가 천황에게 3천 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성마다 5백 명씩 두고, 이곳을 우리 병사와 함께 신라가 경작하는 것을 막으면 구례산의 5성은 자연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이다. 탁순국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요청한 병사에게는 내가 의복과 식량을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려는 첫번째 계책이다.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의 뜻을 거스르고 조공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겠는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강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무릇 저 흉악한 무리는 누구와도 손잡으려 할 것이다. 북적(北敵)은 강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다. 만일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어 수리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이 강적을 막을 수가 없다. 또한 신라도 누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하여 임나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멸망하여 조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고자 하는 두 번째 계책이다. 또 길비신, 하내직, 이나사, 마도가 계속 임나에 머문다면 천황이 임나를 세우라는 조를 내리더라도 불가능할 것이다. 바라건대 이 네 명을 이주시켜 각각 본읍(本邑)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천황에게 주상하려 하는 세 번째 계책이다. 일본의 신(臣)과 임나의 한기 등과 함께 사자를 보내 같이 천황에게 주상하여 조를 받들겠다고 청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길비신과 한기 등이 “대왕이 말씀하신 세 가지 계책은 우리의 마음과도 맞습니다. 지금 돌아가서 일본의 대신(大臣)[임나에 있는 일본부의 대신을 말한다.]과 안라왕과 가라왕에게 삼가 보고하고 함께 사신을 보내어 같이 천황에게 주상하겠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심사숙고하여 계책을 세워야만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위 이야기에 의하면 사비회의 참석자는 다음 표와 같다.
[사비회의 참석자]
國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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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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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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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羅
加羅
卒麻
散半奚
多羅
斯二岐
子他
久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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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旱岐夷呑奚․大不孫․久取柔利
上首位古殿奚
旱岐
旱岐의 兒
下旱岐夷他
旱岐의 兒
旱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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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旱岐大不孫․久取柔利
上首位古殿奚
君
君의 兒
二首位訖乾智
君
旱岐
旱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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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임나의 주도국으로 신라와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백제는 임나 부흥보다는 고구려와의 대결을 위해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하여 성과가 없었다거나, 안라가 친신라 경향이 있었고 백제는 이러한 정황을 반전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고 분석하기도 하면서 「일본서기」의 이 부분을 한반도의 사실로 주장한다.
그러나 541년 현재 가야는 대가야 즉 합천과 고령(성산면 포함)만 남고 모두 신라에 점령된 상태인데, 소위 사비회의에는 임나십국 중 8국이 참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강단유사사학은 안라가 가야의 실질적 리더로서 회의에 참석한다고 하거나 백제가 안라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려 회의를 개최하였다고 하여 안라를 회의의 중요한 국가로 보고 있는데, 함안은 법흥왕 시에 이미 신라에 점령당하여 아무리 늦어도 540년엔 신라의 영토이다. 그리고 함안은 대가야의 지방이었던 곳으로 가야의 리더가 될 수도 없다. 또 신라가 가야를 잠식하는 상황에서, 그들의 견해에 의하여도 가야의 구성국인 안라가, 친신라경향이었다는 것은 앞뒤가 불일치하는 그들의 공상 소설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열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반도의 이야기로 날조하기 위해 가야를 근거 없이 여러 갈래로 찢어놓고 있다. 물론 그들은 『삼국사』 법흥왕의 함안 점령 기록도 날조라 주장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기존의 견해들에서도 지리지의 기록은 신라의 安羅 통합에 관련된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으로 보는 한편, 安羅의 신라에로의 통합을 560년에서 561년 사이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라고 한다. 객관적 사료를 부정하는 그들의 상투적 표현은 ‘어떤 전승이 반영된 것’이다.
전술하였듯이 안라는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이고, 6세기 초 이전에 모든 고구려계 국가는 백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안라는 한반도의 가야와는 전혀 무관한 나라이므로, 소위 사비회의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면 열도의 일이다. 성왕이 등장하는 것은 열도의 백제마을을 본국백제로, 열도백제의 관료인 왜왕을 일본천황으로 변개하기 위한 날조에 불과하다. 대가야 이외에 안라가야가 있다는 것도, 함안이 신라의 가야 잠식 과정에서 친신라적이었다는 것도, 백제가 함안의 친신라경향을 반전시키기 위해 수년에 걸쳐 사비회의를 도모하였다는 것도 모두 코미디이다. 가야 전체가 557년에 망해서 562년에는 신라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함안의 안라가 560년까지 존속했다는 그들의 주장도 코미디이다. 더구나 안라가 함안이 아님은 「일본서기」에 의해 입증된다.
함안에 안라국이 있었다?
다음은 안라가 함안이 아님을 알려주는 「일본서기」 관련 부분이다.
(ㄱ) 249년
그 후 모두 탁순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려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ㄴ) 552년 5월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또한 황공하신 천황의 영위에 의한 가호가 있을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ㄷ) 554년 12월
겨울 1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의 여러 왜신들, 임나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이 아룁니다. 사라(斯羅)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과 마음을 같이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ㄱ)에서 369(249+120)년에 신라를 공격하여 안라를 점령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함안은 가야이지 신라가 아니다. 「일본서기」의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더 이상 안라를 한반도의 나라로 왈가왈부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다.
(ㄴ)에서 552년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한다고 하는데, 550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가 지친 틈을 타서 도살성과 금현성을 취하였고, 551년 고구려를 침공하여 10군을 빼앗았고, 553년에는 백제의 한강 이북을 점령하여 신주를 설치하였다. 신라가 한강 이북의 백제 땅도 차지하여 한반도에선 고구려는 신라와만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신라에 도살성과 10군을 빼앗겼고 신라가 이를 돌려주지도 않았으므로 신라와 통모할 이유가 없다. 553년 이후 고구려는 한반도에선 백제를 공격할 수조차 없다. 전술하였듯이 554년 백제 웅천성 공격은 韓에서의 공격이다. 고구려와 신라가 공모하여 백제와 가야를 공격하려 했다는 것은 한반도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있게 되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가 화친하여 신라를 견제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ㄷ)에서 사라와 박이 바다 북쪽의 미이거를 공격하려 한다고 백제 안라 임나가 말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박국이 고구려라 하며, 미이거는 백제와 임나를 의미한다고 한다. 바다 북쪽이라 표현했으므로 열도의 지명을 의미한다 추정되지만, 미이거가 한반도의 백제와 임나를 의미한다는 강단유사사학의 견해에 따른다 하더라도, (ㄴ)과 관련하여 기술한 바와 같이, 신라와 고구려가 화친하여 백제를 공격한다는 것은 한반도에선 불가능한 상황이므로 열도의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소위 안라회의와 사비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보는 근거는 「일본서기」에서조차 찾을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이 이러한 회의를 한반도의 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야마토임나설 즉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 이외에는 없다. 『삼국사』는 절대로 믿지 않고, 열도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일본서기」는 어떻게라도 왜곡 날조해서 한반도의 이야기로 만들겠다는 그들의 굳은 다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들의 행태를 이해할 수 없다.
백제, 임나=가야, 신라가 야마토왜와의 교역권을 위해 경쟁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근초고왕 시 백제와 신라. 양국은 야마토왜와의 독점적인 교역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하였으나 백제측의 우세로 끝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전술하였듯이 열도에는 가야가 먼저 진출하였다. 3세기 말부터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였으므로 열도의 지배와 관련하여선 백제와 가야의 대립이 처음에는 있었을 수 있지만 신라와 백제의 대립은 있을 수 없다. 신라가 열도와 교역하려 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신라는 백제의 열도 정벌 시 백제에 협력하려는 방안까지 고려하였다. 가야가 먼저 열도에 진출한 후 백제가 관할하지 않았던 한반도와 열도의 교역을 하였겠지만, 백제의 열도 진출 후엔 열도의 무역도 백제의 관할이 되므로 가야의 무역이란 있을 수 없다. 더구나 백제가 열도에 진출하면서, 열도에 진출하여 한반도와의 교역을 하고 있었던 허황옥계(타밀계)가 백제에 복속되고, 한반도의 가야 권력 자체도 고령의 토착세력으로 이전되므로 가야는 해상무역에서 완전히 퇴출 당한다. 열도가 백제 땅이고 동아시아의 유일한 해상무역세력은 백제이므로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그들이 백제 신라 임나=가야와 야마토왜의 교역 근거로 주장하는 「일본서기」의 조공 이야기는 열도의 마을국가들이 백제의 담로나 왜왕과 더 밀접한 관련을 맺어 주변 마을국가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려는 시도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대사=다사진=하동이라 날조하면서 가야와 백제가 야마토왜와의 교역을 위해 하동을 두고 경쟁하였다고 주장하나, 고령이 가야의 맹주국이라면 열도와의 무역을 위해선 낙동강을 통해 김해로 가거나, 김해에서 가까운 남해안으로 가면 되고, 지리산을 넘어 섬진강으로 가는, 반대방향으로 우회하는 경로를 취할 필요가 없으며, 백제는 서해안이나 전라도의 남해안으로 가면 되고, 섬진강 건너의 하동을 경유하여 가는 경로를 취해야 할 필요가 없다. 즉 하동이 야마토왜와의 교역을 위한, 백제와 가야의 쟁탈지가 될 이유는 전혀 없다. 강단유사사학의 말대로 백제 신라 임나=가야가 야마토왜와의 교역을 원하고, 야마토왜의 군사력이 한반도 남부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줄 정도였으면, 야마토왜는 삼국 모두에게 교역을 허용하면 되고, 그 중의 한 나라만을 택할 이유는 없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 「일본서기」가 전하는 열도의 마을국가 이야기를 한반도의 역사라 사기 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은 가야는 백제와 야마토왜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하려 하였고, 백제는 가야 지역 내에서 야마토왜와 직접 교역하려 하여, 가야와 백제 사이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서기」의 열도 이야기를 한반도에서 있었던 일이라 사기 치려다 말도 되지 않는 소설을 창작하고 있다. 백제는 항해능력이 없어서 가야 지역 내에서 야마토왜와 교역하려 하였는가? 항해능력이 없었다면 왜 백제는 다사진을 차지하려고 하였는가? 도대체 그들의 소설은 앞뒤조차도 맞지 않는다. 똑같은 백제 위세품이 나와도 일제의 소설에 따라 남원은 임나=가야, 나주는 마한, 열도는 야마토왜, 충청도는 백제라고 주장하면서, 위세품을 교역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강단유사사학은 가야도 하동을 통해 해로로 중국과 교통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역품목이 발견된다는 것이 그 나라가 교역을 주도적으로 행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야는 백제가 행하는 교역의 당사자였을 뿐이다. 연맹체의 마을국가가 고대국가 백제의 해상무역권을 침해하였다는 주장은 소설적 가능성도 없다. 가야나 신라가 해상무역을 하였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그들은 교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일제의 소설에 무한한 충성을 바치고 있을 뿐이다.
임나=가야는 야마토왜에게 군사기지를 제공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일본서기」를 날조 해석하여, 야마토왜가 가야에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서기」 249년(신공49년) 이야기를, 249년을 369년으로 바꾸고, 일본을 백제로,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고 변조하고, 정복을 상호선린우호관계로 날조한 후, 다음의 「일본서기」 262년 기사를 날조하여 382년 가야가 백제의 실질적 지배 하에 들어갔다고 주장한다.
62년에 신라가 조공해오지 않았다. 그 해에 습진언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 [『백제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사지비궤(沙至比跪)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나루에서 사지비궤을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사지비궤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가라국을 쳤다. 가라국의 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 아수지(阿首至), 국사리(國沙利), 이라마주(伊羅麻酒), 이문지(爾汶至) 등은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누이인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에 가서 ‘천황은 사지비궤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지비궤는 신라의 미녀를 받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게와서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목라근자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서 가라에 모여 그 나라의 사직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사지비궤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은 황궁에서 일하고 있었다. 비궤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 꿈에서 사지비궤를 보았습니다.’라고 아뢰자 천황은 ‘어떻게 감히 비궤가 돌아올 수 있는가.’라며 몹시 분노하였다. 누이동생이 이말을 전하자 비궤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석굴에 들어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위 「일본서기」 내용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고대국가들 관계에서는, 미인 두 명에 의해 공격대상이 바뀌는 것도, 공격대상이 변경되어 공격 받은 나라가 갑자기 망하는 것도, 망한 나라가 금방 복구된다는 것도, 인민이 왕과 함께 이웃 나라로 도망가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내용상 마을국가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다. 백제의 담로가 신라마을을 통제하라고 보낸 사람들이 뇌물을 받고 가라마을을 괴롭히니, 담로정부가 백제마을을 시켜 먼저 보낸 사람들을 처리했다고 보아야 말이 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이 이야기에서, 262년을 382년으로 바꾸고, 일본이 보낸 사람을 삭제하고, 가야 침략자를 일본에서 신라로 날조하고, 가야 구원자도 일본의 명령을 받는 백제에서 백제로 날조한 후, 382년 신라가 가야를 침입하였는데, 백제가 가야를 구원하였다는 가공의 역사를 창작한다. 이어서 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간 가야는 백제가 요청한 야마토왜 군대의 가야 주둔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소설을 창작한다.
한편<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400년과 404년 백제가 끌어들인 야마토왜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고령가야는 야마토왜에게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382년 이래 고령가야는 실질적으로 백제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었다. --- 369년 이래 백제와 상하관계를 맺고 있던 가야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친 신라의 침입과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해서 더욱 백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가야와 백제와의 형식적인 상하관계는 실질적인 상하관계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고령가야는 백제의 직접 구원을 받고 야마토왜에게 전진기지를 제공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백제와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탁순을 제치고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의 위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창작소설이다. 먼저 전술하였듯이 야마토왜의 실체가 없다. 일본인들조차 야마토왜가 가공임을 알고 있어, 일본 고대사 시대구분에 야마토왕국 시대는 없다. 백제 멸망 전까지 열도에는 도성도 왕궁도 없다. 광개토대왕릉비문 400년과 404년에 나오는 왜는 모두 백제의 주민이다. 400년 동원된 왜는 열도의 왜로서 바로 신라 해안으로 공격했고, 404년 동원된 왜는 요동반도의 왜이다. 모두 가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야가 가공의 야마토왜에게 대고구려 전진기지를 제공했다는 것은 어떤 근거도 없는, 강단유사사학의 상상에 불과하다. 고령이니 탁순이니 하는 이야기도 근거 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그들은 탁순의 위치에 관해서도 창원, 칠원, 대구, 의령 등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이다.
바보가 아닌 한 열도 마을국가들간의 이야기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본서기」의 문언을 마음대로 파괴하여, 한반도 남부의 이야기로 날조하고, 있지도 않았던 야마토왜 정권을 창설하고, 나아가 야마토왜의 해외군사기지까지 날조하는 그들의 상상력과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정은 일제유사사학을 뛰어넘는 청출어람의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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