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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15) - 강단·일제유사사학의 열도와 한반도 남부 고대사 창작 (9)

역사회복 2025. 4. 24. 12:29

9.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는가?

일제유사사학의 야마토임나설(임나일본부설)

쓰에마스의 「임나흥망사」(1949)는 일제유사사학의 통설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야마토왜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임나=가야를 직접 지배했다는 것으로 연민수는 쓰에마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末松說에 따르면, 백제는 367년 처음으로 일본에 遣使하여 국교를 열고 백제의 요청에 따라 己巳년(369년)에 일본이 대규모 출병을 단행하여 이를 계기로 이전부터 진행중이던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나아가 김해의 임나가라를 중심으로 한 가야제국을 직접 지배 하에 두고 그 외곽에 있던 백제와 신라를 부용화시켜 간접지배 하에 두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가이제국을 총칭하는 이른바 임나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말송설에서 말하는 임나의 성립이란 일본의 가야제국에 대한 일괄지배체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임나에 대한 지배는 大和朝廷의 국내적 지배형태인 屯倉(미야케) 형식으로 본다. 미야케란 대화조정 직할령에 대한 도시, 경작자, 곡물을 포함하는 지배 형태를 가리킨다. 즉 임나의 지배를 大和조정의 국내지배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다. 또한 임나 지역에는 大和조정에서 파견된 지배자가 놓여져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김태식은 쓰에마스의 날조가 외형적 근거를 갖춘 야마토임나설이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에마스의 견해를 요약하고 있다.

 

「일본서기」로 보아, 신공황후 섭정 49년인 서기 369년에 왜군은 바다를 건너 신라를 쳐서 比自㶱(창녕), 南加羅(김해), 㖨國(경산), 安羅(함안), 多羅(합천), 卓淳(대구),加羅(고령) 등 일곱 나라를 평정함으로써 임나 지배를 시작했으며, 또한 왜군은 전라도 지역을 평정하여 일부를 백제 근초고왕에게 줌으로써 조공의 서약을 받아냈다고 했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문에는 왜가 신묘년, 즉 서기 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 등을 깨뜨려 臣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서기 400년을 전후하여 이들은 신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군대에게 상당히 격파되기도 하지만, 그 지배체제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했고, 오히려 왜군은 그 얼마 후 황해도 연안까지 북상하여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 25사의 하나인 『宋書』에 보이듯이, 5세기에 왜왕은 중국 남조에 조공하여 ‘使持節都督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七國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는 작호를 받아냈으니, 이는 왜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국제적으로 공인 받은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 백제가 점차 남쪽 지역에 대해 팽창해옴에 따라 왜는 임나 지역의 일부를 백제에게 할양해 주기도 했고, 신라의 무력 진출에 의해 남가라·탁순 등의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 임나의 지배기관인 임나일본부가 이를 막지 못하여 임나는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임나의 일본 관가는 562년 신라 진흥왕이 보낸 군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는 것이다.

결국 왜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200년 동안 가야 지역에 해외 통치 기관인 임나일본부를 두고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것이 그 요점이다. 이는 기존의 전통에 비하여 임나 지배 기간을 대폭 줄여서 본 것이다.

 

강단유사사학의 유사 야마토임나설

강단유사사학은 임나일본부의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을 안라국으로 축소하고, 그 성격을 외교기관으로 보므로 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한다. 연민수는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국내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것은 이병도였다. 그에 따르면 소위 임나부라고 하는 것은 본래 왜국이 가야제국과의 무역관계를 위하여 마치 조선시대 왜관과 같은 상관으로 설치하였던 것인데, 가야제국이 신라세력의 압력에 못 이겨 왜인의 무력원조를 구했기 때문에 임나부가 그 역할의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사료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천관우의 기본 시점을 계승한 김현구의 백제지배기관설부터다. 이 설은 흠명기의 임나 관련 사료가 백제중심으로 되어 있다는 데 착안하여 백제가 가야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을 임나일본부라고 본 것이다. 이 설은 일본부의 반백제적 성격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는 일정한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이루어낸 선구적 업적으로 그 연구사적 의의는 크다. 이에 자극받아 任那日本府에 관한 몇 개의 專論이 나왔다. 필자는 日本府官人의 출자 분석을 통해 그 중 핵심멤버가 己汶國 출신의 가야인이고 西日本豪族, 왜계 가야인을 포함하는 일단의 세력이 6세기 30년대 이후 안라국에서 안라의 지배층과 함께 가야제국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해 주변 제국을 왕래하며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 임나일본부의 실태라고 추정하였다. 李永植은 일본부의 구성분자 중에 的臣, 吉備臣, 河內直이 일본에서 각각 임나와 안라로 파견된 후, 귀국하지 않고 장기체재하면서 가야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보고, 이를 가능케 한 것은 吉備臣과 河內直 등 가야계 도래인이었다고 추정한다. 이들 일본부를 실질적으로 움직였던 것은 가야의 旱岐인 阿賢移那斯, 佐魯麻都였고, 가야제국은 이 일본부를 왜국으로부터의 구원을 얻는 창구로 활용했다고 본다. 김태식은 백제가 534년 직후에 왜계관료인 印支彌를 파견하여 설치한 대왜무역중계소인 안라왜신관을 임나일본부의 성립으로 보고, 540년대 이후 안라가 이 왜신관을 장악하여 가야연맹과 왜 사이의 외교교역기관으로 변경시키면서 안라의 독립보장을 위해 기능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 연구는 그동안 일본이나 백제 측의 시각에서 생각해 왔던 임나일본부에 대해 가야제국의 입장을 강조하면서 그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한 점, 그리고 임나일본부 관인의 출자를 분명히 하고 가야제국의 독립보존 및 유지라는 성격을 공통적으로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한 단계 진전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일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의 유사성

둘 모두 야마토왜가 열도를 장악한 고대국가라고 간주하여 열도를 우리 상고사의 강역에서 제외한다. 전술하였듯이 야마토왜는 실체가 없는 정치체다. 둘 모두 「일본서기」의 일본이 백제의 담로나 백제 관료인 왜왕임을 숨기기 위해 일본을 야마토왜로 날조하고 있다. 둘 모두 낙랑군을 보정시에서 현재의 평양으로 옮겨 중국 동부와 북부의 우리 역사강역을 제외하고 있다. 둘 모두 BCE 24세기의 고조선을 부인하고, 『삼국사』의 사료가치를 불신하면서 한반도 남부는 소국들이 우글거리는 원삼국 시대를 거쳐 고대국가가 성립되며, 가야는 고대국가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연맹체 단계의 여러 소국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면서, 「일본서기」에 나오는 여러 마을국가의 명칭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가야 소국의 명칭이라고 날조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이 임나일본부의 시기를 6세기 전반대로 한정하고, 공간을 안라국으로 축소하고, 그 성격을 외교기관으로 보므로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였다고 주장하나, 그들도 백제 신라 가야가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으로 야마토왜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며, 일본 즉 열도백제가 열도의 마을국가를 통제하는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한반도 남부의 이야기로 보므로, 일제의 야마토임나설과의 차이는 극히 사소하다.

방법론적으로도 둘 모두 「일본서기」의 임나는 557년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가 될 수 없음에도 ‘무슨 이유에선가’ 임나=가야라고 우기며, 「일본서기」 249년 신라7국을 임나7국이라 우기며, 「일본서기」 임나는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다는 문언을 무시하는 등 일제가 교시한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따라 「일본서기」를 철저히 무시한다. 둘 모두 유일한 근거는 음상사인데, 이마저도 가짜 음상사이며, 열도에 있는 진짜 음상사 지명은 모두 무시한다. 둘 모두 조선총독부 소설에 충성하기 위해 마을국가에나 적합한 「일본서기」의 이야기를 철면피를 쓰고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들에 적용시키는 코미디로 일관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한국사의 고대사 연표를 작성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의 청출어람은 「일본서기」 무시에서 두드러진다. 그들은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날조하면서, 전쟁과 정벌을 동맹과 통교라 하고, 「일본서기」 464년 2월 이야기와 관련하여선 구원군을 침략군이라 하고, 문언에 없는 고령의 야마토왜 군사기지를 창조하는 등 언어의 연금술사적 능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낙동강이 바다이므로 가야가 임나라는 놀라운 역사지리학의 업적을 선보이며, 임나4현과 관련하여선 놀라운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의 성과를 내놓기도 한다.

일제유사사학의 핵심적 날조인 야마토왜 실재설과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라는 억지에 동의하면서, 임나일본부의 성격이나 범위에 관해 말장난하는 것이 일제유사사학과의 대단한 차별점이나 되는 것처럼 주장하며 대중을 속이고 일제유사사학의 날조를 퍼뜨리는 것은 그들이 일제유사사학의 주구임에 불과하다는 명확한 증거일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의 분국설에 대한 대응

강단유사사학은 김석형과 조희승의 분국설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경향에 대해 일찍이 북한학계에서 제기된 것이 分國論이다. 김석형을 대표로 하는 이 설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이주민이 한반도계 소국 이른바 分國을 일본열도 각지에 건설했는데, 이들 분국은 5세기 이후 대화정권의 국토통일 과정에서 통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임나일본부란 대화정권이 이들 한반도계 분국을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다. 「일본서기」 任那 관련 지명을 대부분 일본열도에 비정하는 등 사료해석과 操作에 모순점도 많아 그대로 수긍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국론의 제기에 의해 임나일본부설을 포함한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재검토 분위기를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는 크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金錫亨은 ≪일본서기≫와 일본고고학 자료들을 가지고 일본열도 내에서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 고대한일관계사 영역을 개척하여서 이른바 「分國說」을 내놓았다. 그에 따르면 4∼5세기의 일본 고분문화는 백제·가야 등 한반도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졌고 그 주체세력들은 모두 한국 계통 소국 즉 분국이었으며, ≪일본서기≫에 나오는 모든 한반도 관계기사는 일본열도 내부의 한국 계통 소국들 사이의 일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들은 고고학적 문화 전파의 방향을 올바로 제시하여 일본고대사 자체 및 임나일본부설의 취약성을 입증함으로써, 1970년대 이후 일본학계의 반성을 촉구하는 데 성공하였다. --- 분국설은 ≪일본서기≫를 비롯한 문헌사료들을 이용할 때 거의 모든 사료를 무리하게 일본열도에서의 사실로 억측함으로써 오히려 한반도 내의 가야사를 포기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들은 가야사 및 일본고대사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 속에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분국설이 「일본서기」 일본의 실체를 백제 담로나 백제 관료인 왜왕으로 파악하지 않고 야마토왜로 본 것은 잘못이나, 「일본서기」의 이야기가 열국으로부터 열도로 이주한 이주민의 마을국가들 사이의 일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강단유사사학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임나 관련 지명을 열도에 비정하는 것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분국설은 연구사적 의의나 대중적 관심의 대상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려면 최소한 왜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인지와 왜 「일본서기」 249년 신라7국을 그들은 임나7국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그들은 묵언수행하거나, ‘무슨 이유에선가’라는 헛소리를 하거나, 그냥 우기기만 한다.

연민수는 임나 지명의 열도 비정에 어떠한 모순점이 있는가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며, 임나 지명의 한반도 비정 시 나타나는 수많은 모순점에 대해선 변명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김태식은 분국설이 「일본서기」의 내용을 일본열도에서의 사실로 억측하여 한반도의 가야사를 포기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는데, 이 말은 적반하장의 진수를 보여준다. 「일본서기」를 역사책이라 가정하면,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책이므로 등장 국가를 열도 내의 소국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그것이 억측이 되는가? 일본의 역사책에 등장하는 지명을 한반도의 사실로 주장하는 것이 억측이 아닌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소국을 한반도의 소국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가야사를 포기한 것이라는 그의 말을 필자와 같은 범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김태식이야말도 「일본서기」의 내용을 남한의 사실로 억측하여 진정한 가야사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들은 논리에 근거한 분국설에 대해선 학문적 반론은 전혀 하지 못하고 그저 비난과 무시로 일관하며, 횡설수설과 가짜 음상사로 조선총독부 소설을 위해 봉사한다.

 

강단유사사학과 일제 육군 참모본부의 교시

최재석은 일본인 학자들의 수미불일치를 ‘서두의 위장법’이라 명명하였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의 스승을 좇아 항상 서두의 위장법을 사용한다. 그들은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하고, 『삼국사』를 신뢰하고, 동북공정에 반대한다고 항상 서두에서만 말하고, 본론과 결론은 『삼국사』를 불신하고 야마토임나설과 동북공정을 추종한다.

전술하였듯이 일본육군 참모본부는 1870년부터 역사 날조를 시작하였다. 참모본부는 야마토임나설에 관해서는 『황조병사』(1880년)와 『임나고』(1882년)를,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관하여는 1884년 「동부여영락대왕비명해」와 「고구려고비고」를 제작하였다. 일제는 야마토임나설을 날조하고, 광개토대왕릉비의 글자를 변조하거나 지워서 야마토임나설의 장해물을 제거하였다. 일제 참모본부 날조의 핵심사항은 임나를 가야로 만드는 것이었다. 임나가 가야가 되기만 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있었던 한반도에 「일본서기」를 바로 적용할 수 있다고 우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경우 장애물은 『삼국사』와 『삼국유사』인데 이에 대해선 두 사서가 날조라고 대응했다.

현재도 강단유사사학은 일제 참모본부의 구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사실, 어찌하여 『삼국유사』의 가야는 가야가 아니고, 「일본서기」의 임나가 한반도의 가야가 되는지는 강단유사사학 자신들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참모본부 교시의 영역이므로 그들은 그저 순종할 따름이다. 교시에 충성하기 위해 강단유사사학은 『삼국유사』의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기사를 근거없이 날조라 주장한다. BCE 24세기 방사천리 삼한조선과 BCE 1세기 韓 지역의 중마한을 기술한 『삼국지』와 『후한서』는 CE 3세기의 한반도 남부를 기술한 것으로 변한다. 辰韓과 弁韓이 시공을 초월하여 한반도 남부에 등장한다. 칠지도 명문으로, 열도가, 백제가 파견한 왜왕이 다스리는 지역이라 입증되었어도 억지만 쓴다. 우전팔번화상경이 칠지도를 보완해도 계속 우긴다. 왜5왕 중 무가 무령왕임이 입증되어도 모른 척 한다. 광개토대왕릉비문에 백제와 왜의 우열관계가 명시되어도 묵언수행을 한다. 파사석탑은 석공들이 날조했을 것이다. 거북이 방울은 거북이가 날조했을 것이다. 야마토임나설을 극복했다고 자부하는 김태식은 “성립 초기의 안라왜신관은 백제·왜 사이의 교역 대행기관의 성격을 가지며, 백제는 이를 통해 안라국(함안)·탁순국(창원)을 거쳐 왜국으로 향하는 교역로를 확보하려고 한 듯하다.”라고 주장한다. 동남아까지 활보하며 황해를 앞마당 삼아 무역선을 달리던 백제 선조들에게 김태식은 개그콘서트라도 하는 것일까?

 

임나일본부의 실체

「일본서기」의 이야기는 열도 내 마을국가들을 열도백제가 지배하는 이야기이다. 임나일본부는 백제의 관료인 왜왕이 열도 내 마을국가들을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지방통제기관이다. 임나일본부가 안라마을에 설치되었다면, 안라마을이 고구려의 핵심 동조국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안라마을을 확실하게 통제하기 위해 백제의 관료인 왜왕은 안라마을에 일본부를 설치했을 것이다.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은 야마토왜를 백제 관료인 왜왕으로, 한반도의 백제 신라 가야를 열도의 마을국가들로 대체하면 사실에 부합하는 말이 될 것이다.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였던 백제가 지방세력을 통제하였던 방법이 「일본서기」에 기재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본질상 문학서이고, 더구나 「일본서기」는 백제가 열도를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작성된 후에도 꾸준히 날조되어 왔으므로, 현재의 「일본서기」를 사료로 활용할 시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