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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13) - 강단·일제유사사학의 열도와 한반도 남부 고대사 창작 (7)

역사회복 2025. 4. 21. 19:51

7. 임나=가야 영역의 근거 없는 확장

 

가짜 음상사 기법에 의한 사기 치기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무시하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임나4현(상다리 하다리 사타 모루), 기문, 대사 등의 지명을, 음상사를 주된 근거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 배치하여 임나의 서부국경을 도출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열도 신라와 열도 임나의 마을 국가들의 국명으로는 부족하여, 『양직공도』에 백제의 속국으로 기재된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 지미, 마련, 상사문, 하침라 중 상당수를 임나=가야의 지역명으로 보며, 우륵의 12곡명까지 임나=가야의 지명으로 본다. 임나 영역의 크기는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도에 비례한다. 강단유사사학이 일제유사사학을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제가 임나의 영역을 충청도까지라 하였는데, 그들이 전라도 동부까지로 제한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임나=가야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방법은 오로지 음상사이다. 그들은 다른 근거가 없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으므로, 「일본서기」 지명 비정에서 음상사가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음상사를 지명 비정의 근거로 사용하더라도, 지명의 음이 전혀 다르게 변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음상사에 의한 지명 비정은 지명 변천에 대한 입증이 필요하다. 특히 백제 영역은 한반도, 요동반도, 중국 동부는 물론 열도가 포함되므로, 백제의 지명이라 하더라도 그 지명을 열도가 아닌 남한에 비정하려면, 신라가 점령한 지역으로 확인되어야 하며, 신라가 지명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도 입증되어야 하고, 그 이후로도 지명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음상사에 의한 지명 비정의 선결조건을 모두 무시한다.

나아가 그들은 음상사가 아니어도 음상사라고 우긴다. 즉 그들은 음소 하나라도 비슷하면 음상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음상사에 근거한다고 주장할 뿐이지, 그들의 소설에 의해 마음대로 지명 비정을 하고 있다. 그들이 사기 치는 증거는 열도에 더 정확한 음상사 지명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진정한 음상사 지명은 무시하고 음상사가 아닌 지명을 음상사라고 우기면서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본서기」는 열도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문학서이므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한반도 남부에 관한 이야기로 날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륵의 12곡명까지 임나=가야의 지명이라 주장

그들은 음상사 기법을 더욱 발전시켜 우륵 12곡의 곡명에서 10곡의 곡명도 임나=가야의 지명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근거는 전혀 없다. 왜 보기와 사자기는 지명이 아니고 다른 곡명만 지명인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조선총독부 소설을 유지하기 위해 억지 부릴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활용한다. 그러나 객관적 사료에 의하면 우륵 12곡명은 지명과는 무관하다.

『삼국사』에 의하면, 가실왕은 당의 악기를 보고 12달의 음률을 본 떠서 가야금을 만든 후, 나라마다 말이 다르므로 음악도 달라야 한다고 말하며 우륵에게 12곡의 작곡을 명하였다. 이는 가실왕이 중국의 음악과 구별되는 가야의 음악을 12달에 맞추어 작곡하라 명한 것을 의미한다. 12달은 한 해를 말하고 달력을 제정할 수 있는 제왕의 권력과 관계된다. 12곡명이 1년의 12달과 관계되므로 가야의 지역명과 관련될 수는 없다. 아마 12곡명은 농경사회의 세시풍속이나 왕도정치의 이념과 관련되거나, 곡의 형식이나 내용과 관련되었을 것이다.

12곡명이 지명이 아님은 우륵의 곡을 전수 받은 신라인들이 12곡을 5곡으로 요약한 이유에서 명백해진다. 신라인 세 명은 우륵의 허락도 없이 12곡이 번다하고 음란해서 우아하고 바르다고 할 수 없다는 이유로 5곡으로 요약하였고, 우륵(于勒)은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그 다섯 곡의 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한 후 곡이 좋다고 하면서 왕 앞에서의 연주를 허락하였다. 신라인들이 12곡을 허락 없이 5곡으로 줄였다는 것은 가야가 망했으므로 가야의 음악은 12곡이 될 수 없다는 의미이고, 우륵을 망명인으로 대우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처음에 우륵이 화를 낸 이유이다. 우륵은 다섯 곡의 음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한 이유는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완성한 작품이 손상되었고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서이고, 왕 앞에서 연주하라고 한 것은 포기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강단유사사학의 주장대로, 12곡명 중 10개가 가야의 지명이었다면, 우륵은 12곡이 5곡으로 축약되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가야가 망한 마당에 과거의 가야 지명으로 된 곡체계는 당연히 변화되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륵의 12곡을 수정한 5곡이 신라의 대악으로 되었다는 것은 우륵 12곡이 어떤 국가에서도 사용가능한 보편적인 국가음악 형식을 갖춘 음악이었음을 나타낸다. 따라서 12곡명이 지명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음상사 서번트 증후군이 의심되는 일제유사사학을 이어받은 강단유사사학에겐 모든 것이 지명과 음상사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우륵 12곡명은 지명과 무관하다고 보아야 한다. 곡명까지 지명으로 바꾸려는 것은 그들 주장의 무근거성을 지푸라기라도 잡아서 감추고 싶은, 강단유사사학 종사자들의 다급함의 발로일 것이다.

 

소위 반파국의 확장 소설

강단유사사학은 반파의 위치에 대해 경북 고령, 경북 성주, 전북 남원, 전북 장수라는 여러 견해를 제시한다. 다수설인 고령설은 고령의 변한 반로국이 대가야가 되었는데 백제가 영역 다툼 때문에 비칭으로 반파라 불렀으며, 반파국 즉 대가야는 백제의 기문(남원 임실 장수 일대)과 대사(하동)까지 진출하여 영역화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일본서기」의 반파(伴跛), 「양직공도」의 반파(叛波), 『삼국지』 「동이전」의 변진반로국을 근거라고 주장하나, 「일본서기」와 「양직공도」의 반파는 열도의 국명이고, 『삼국지』 「동이전」의 반로국은 BCE 24세기 중국 동부의 변한 지역의 나라이므로 고령이 반파국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고령 반파국(대가야)이 서쪽으로 남원까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는데, 남원과 임실이 기문국으로 대가야의 세력권이고, 남쪽으로는 진주(子呑), 하동(滯沙, 帶沙津, 多沙津), 광양(滿奚)까지 세력권이라 한다. 강단유사사학 중 일부는 반파국은 고령과는 다른 임나국으로 장수와 전라도 동부와 섬진강 유역을 영역으로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강단유사사학은 일가를 이룬 음상사학의 대가들답게 반파, 기문, 대사와 그들의 관계, 반파와 가라의 관계에 대해 각양각색의 견해를 제시하나, 주류는 기문을 통해 전북 동부, 대사를 통해 하동을 가야의 영역이라 하며, 임나4현을 통해 전남 동부까지 가야의 영역이라 주장한다.

이들은 모두 그들이 주장하는 지역이 언제 임나=가야의 영역으로 되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일본서기」에 그들이 임나라고 주장하는 지명이 나오며, 그것이 전라도의 현재 지명과 음상사이므로 전라도가 임나=가야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의 주장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이하에서 이들 주장의 코미디성과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지극한 충성을 살펴본다.

 

임나4현의 광역화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 512년 이야기를 전라남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여 임나4현의 위치를 비정한다. 그들은 주장자마다 음상사학에서 일가를 이루어 서로 다른 위치를 주장하고 있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음상사를 통해 임나4현을 경남, 전북, 충남, 경북, 전남, 부산 등 다양한 위치에 비정하는데, 강단유사사학은 주로 섬진강 유역의 전남 동부지역으로 비정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현을 군단위 이상으로 보아 4현을 4군 이상의 영역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서기」 원문은 임나4현을 아주 작은 마을로 보고 있다. 이들이 근거로 하는 「일본서기」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일본서기」 512년 12월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調)를 바치고 따로 표를 올려 임나국(任那國)의 상다리(上哆唎), 하다리(下哆唎), 사타(裟陀), 모루(牟婁) 4현을 청하였다. 다리국수인 수적신압산이 아뢰기를, “이 4현은 백제에 근접해 있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백제와 4현은) 아침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백제에 주어 같은 나라로 합치게 한다면, 굳게 지키는 대책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나라를 합쳐도 후세에는 오히려 위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따로 떨어져 있다면 몇 년도 제대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반금촌대련(大伴大連金村)도 이 말을 믿고 뜻을 같이하여 상주(上奏)하였다. --- 대련은 그 청에 따라서 사자를 바꾸어 칙을 알렸다. 하사품과 칙명의 뜻을 전하고, 상표에 따라 임나 4현을 주었다.

 

원문이 ‘(백제와 4현이)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기 쉽고 닭과 개도 어느 쪽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므로, 백제나 임나4현이나 모두 아주 작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의 이 부분은 아침저녁의 왕래와 닭과 개를 명시하여 열도 마을국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는데, 초탈문헌주의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임나4현을 한반도의 광대한 지역에 위치시킨다. 김태식은 임나4현을 순천, 광양, 여수로 비정한다.

 

결과적으로 백제가 임나 4현을 빼앗은 것이니, 원래는 그 곳이 임나, 즉 가야의 영역에 속하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이 임나 4현의 위치는 섬진강 유역의 전남 지역에 해당하여, 상·하다리는 전남 여수시와 돌산읍, 사타는 전남 순천시, 모루는 전남 광양시 광양읍에 비정된다. 여기서 다리국수란 그 해 4월에 왜에서 이 지역으로 파견했던 사신을 가리킨다.

 

김태식은 개와 닭을 어느 나라의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하므로 임나4현이 작은 지역이라고 말하면서도 광양, 순천, 여수 지역을 임나4현이라 주장한다. 당시에는 순천에서 닭이 지나가면, 그 닭이 광주 닭인지 여수 닭인지 순천 닭인지 하동 닭인지 몰랐다. 그렇게 활동범위가 컸던 우리의 닭과 개가 현재 전해지지 않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닭과 개는 과장법이라고도 하는데, 그렇다 하여도 임나4현의 1현이 1군은 될 수 없으며, 「일본서기」가 일본왕의 하사 지역을 일부러 작게 과장했다는 것도 「일본서기」의 성격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강단유사사학은 닭과 개로 유사사학 취급 받으니 되는 대로 지껄이면서 유사사학에 헌신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임나4현을 일제유사사학을 조금 더 추종하여 전남 전체라고 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도가 김태식보다 약간 크기 때문이다. 다른 학술적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는 백제 관료인 왜왕이 백제 출신 사람들의 마을국가에게 임나 마을국가의 일부를 주어 왜왕에 대항하는 세력의 부상을 막고 마을국가들간의 세력균형을 유지해 열도 통치의 편의를 도모한 사실을 토대로 한 것이고 한반도 남부와는 무관하다. 임나4현에선 그들의 유일한 근거인 음상사도 포기된다. 「일본서기」 원문에 의하면 작은 지역에서 네 유사한 지명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있을 리 없으므로 닭과 개의 활동범위를 무한히 확장시키고, 임나4현의 사람들을 축지법을 쓰는 도사들로 만들어버린다. 당시의 전남 사람들이 축지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세계 최초로 발견한 것이었던 것이었다.

만약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임나4현이 광대한 지역이라면, 그러한 광대한 지역이, 그들의 소설에 의할 때, 마한에서 임나=가야의 영역으로 변하였는지를 먼저 밝혀야 한다. 400년에 고구려에게 망한 임나=가야가 고대국가도 아닌 연맹체로서, 그들의 소설에서도 고대국가를 완성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고구려를 몰아내고 그들 소설상, 백제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마한을 점령하였는지를 밝혀야 한다. 임나를 한반도 남부로 날조하기 위해 가야를 연맹체로 상정하고, 고구려의 침공으로 임나=가야가 멸망했다고 주장했는데, 연맹체로 다시 재건한 가야가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를 이기고 경상남도와 전라도를 점령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 역사적 맥락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하여 마음대로 지껄이다가, 유일한 근거인 음상사도 포기한 채, 임나 4현이 전남이나 전남의 광대한 지역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제가 날조한 야마토임나설에 대한 그들의 무한한 충성심을 상정하여야만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6세기 초 백제의 열도 소국간 구역 조정

강단유사사학이 기문을 남원, 대사를 하동이라 주장하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일본서기」의 반파, 기문, 대사 관련 부분은 열도의 마을국가 사이에 발생한 사실이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임나4현의 소속 변경도 동일한 성격의 행위이다. 임나4현이나 기문 대사 다사진의 마을국가간 이동은, 6세기 초 백제가 고구려의 열도 위성국으로부터 열도를 완전히 탈환한 후, 고구려계 지배하의 기존 마을국가들간 역학관계를, 백제의 지배에 편하도록 재편하여, 안정적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이다. 「일본서기」의 관련 부분은 다음과 같다.

 

(ㄱ) 513년 6월

그리고 따로 “반파국(伴跛國)이 신의 나라의 기문(己汶)이라는 땅을 약탈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바르게 판단하여 원래 속한 곳에 돌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ㄴ) 513년 11월

겨울 11월 신해삭 을묘(5일), 조정에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安羅)의 신이해(辛已奚) 및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 칙명을 알리고, 기문(己汶)과 체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ㄷ) 513년 11월

같은 달, 반파국이 집지(戢支)를 보내어 진보를 바치고 기문의 땅을 청하였으나, 결국 주지 않았다.

(ㄹ) 514년 3월

3월, 반파가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고, 만해(滿奚)와 연합하여 봉수와 저각(邸閣)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하였다. 또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고 마차해(麻且奚) 추봉(推封)과 연합하여, 군사와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였다. 남녀를 포로로 삼고 마을을 노략질하니, 습격을 받은 곳은 살아남은 자가 드물었다. 포악함이 지나치게 과하며 사람을 괴롭히고 마구 학살하니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ㅁ) 515년

9년 봄 2월 갑술삭 정축(4일), 백제 사자 문귀 장군 등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칙을 내려 물부련(物部連;모노노베노무라지)[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을 딸려 보냈다[『백제본기』에서는 물부지지련(物部至至連;모노노베노치치노무라지)이라고 하였다.]. 같은 달, 사도도(沙都嶋)에 이르러 반파의 사람들이 원한을 품고 강한 힘에 의지하여 잔혹한 짓을 일삼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물부련은 수군 5백 명을 이끌고 바로 대사강(帶沙江)으로 나아갔다. 문귀 장군은 신라를 거쳐 백제로 들어갔다. 여름 4월, 물부련이 대사강에서 머문 지 6일 되었을 때 반파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이에 옷을 빼앗기고 가진 것을 약탈당하고 막사는 모두 불탔다. 물부련 등은 두려워 도망가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문모라(汶慕羅)[汶慕羅는 섬이름이다.]에 머물렀다.

(ㅂ) 516년 9월

가을 9월, 백제가 주리즉차(州利卽次) 장군을 물부련에게 딸려 보내어 기문의 땅을 준 것에 감사하였다.

(ㅅ) 529년 3월

23년 봄 3월, 백제왕이 하다리의 국수(國守) 수적신압산에게, “조공하는 사자들이 항상 해안의 험한 절벽[해안의 들쑥날쑥한 험한 절벽을 말한다. 세간에서 미사키(美佐祁)라고 한다.]을 피해 다니며, 바람과 파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물품들이 물에 젖어 모두 망가지고 못쓰게 된다. 청컨대 가라의 다사진(多沙津)을 신(臣)이 조공하는 통로로 삼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압산신(押山臣)이 청에 따라 (천황에게) 주상하였다. 같은 달, 물부이세련부근(物部伊勢連父根;모노노베노이세노무라지치치네)과 길사로(吉士老;키시노오키나) 등을 보내어 진을 백제왕에게 주었다. 이에 가라왕이 칙사에게 “이 진은 관가(官家)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칙사인 부근(父根) 등은 이에 그 자리에서 주기가 어렵다고 여기고 큰 섬으로 돌아가서, 따로 녹사(錄史)를 보내어 마침내 부여(扶余)에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가라는 신라와 우호를 맺고 일본을 원망하였다.

 

국수(國守)는 백제 관료인 왜왕 소속의 지방관료로 추측된다. 백제라는 마을국가가 이득을 보는 것은 이들이 韓이나 한반도의 본국백제로부터 와 본국백제가 이들을 다른 마을국가들보다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기문은 백제(열도의 마을국가, 이하 ‘백제마을’이라 한다)의 영토였다가 고구려계의 지배 시 반파마을의 영토가 되었고, 6세기 초 백제가 탈환하자 다시 백제마을의 영토가 된다. 왜왕(열도백제의 최고관료)이 513년 기문을 백제마을의 관할로 변경할 때 체사도 함께 백제마을의 관할로 한다. 그러자 514년 반파마을이 마차해마을 추봉마을과 함께 왜왕에게 반항하여 신라마을을 침략한다. 515년 왜왕이 물부련을 책임자로 군사 500명을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백제마을의 사자는 신라마을을 거쳐 백제마을로 돌아갔다. 문제가 어떻게든 해결되어 516년 백제마을은 기문을 받은 것에 대해 왜왕에게 감사하였다. 529년 백제마을은 가라마을의 다사진도 백제마을의 관할로 받았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이러한 열도의 이야기를 한반도 남부에서 있었다고 주장하는 임나(가야)와 백제의 이야기로 날조하고 있다.

 

반파, 기문, 대사(체사), 다사진을 한반도의 지명으로 날조

기문과 대사를 각각 남원과 하동으로 보는 주류 강단유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거를 제시한다.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이 부딪쳐서 대가야와 백제는 「己汶」을 놓고 영역을 다투게 되는데, 당시에 기문은 대가야에 속해 있었다. 이 사실은≪백제본기≫를 토대로 하여 개작된 듯한≪日本書紀≫소재의 사료에 보인다. 여기서의 기문은 가야 계통 국명의 하나로서 ≪新撰姓氏錄≫ 吉田連條에 上·中·下의 3기문이 나오고, ≪梁職貢圖≫ 소재의 百濟旁小國 중에 상기문이 나오며, ≪삼국사기≫ 樂志의 우륵 12곡명 중에 상·하의 奇物이 나온다. 기문은 상·하 또는 상·중·하로 나뉘는 것으로 보아 넓은 지역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위치는 지금의 남원(옛 지명 古龍郡) 및 임실(옛 지명 任實郡 居斯勿縣)지방으로 비정된다.

 

그들이 근거로 든 「신찬성씨록」은 기문이 아니라 파문(巴汶)이라 하며 임나의 동북에 파문이 있다고 하므로, 파문과 기문이 같다고 하더라도, 남원이나 임실과 하동이 임나의 서쪽 경계가 된다는 그들의 주장과 모순된다. 『양직공도』는 상기문이 아니라 상사문(上巳文)이라 하므로 그들 주장의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신라7국을 임나7국으로 바꾸는 것에 비하면, 巴와 巳를 己로 바꾸는 것은 바꾸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음상사를 통해 역사를 발견하므로 문헌이 음상사를 방해하면 그 문헌은 오류가 되어 교정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들은 반파를 임나로 간주하고 상기문이 임나에 속하는 땅이라 보는데, 이는 상사문을 반파와 동일하게 방소국으로 열거하는 『양직공도』와 모순된다. 『한원』의 基汶河를 섬진강으로 보아 섬진강 유역인 남원이 기문이라 하기도 한다. 基汶과 己汶은 한자가 다르다. 훈으로 읽는다면 발음이 달라질 수 있다. 기문하가 있다고 하여 그 유역에 기문이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다. 또한 대사와 다사진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고 주장할 때는 섬진강을 대사강으로 보므로 그들의 주장을 학술적 음상사라 보기는 어렵다. 그들은 처절하게도 우륵12곡의 곡명으로부터도 어떤 근거도 없이 12곡중 상기물(上奇物)은 남원, 하기물(下奇物)은 장수 임실 지역이라 한다. 그러나 기물과 기문이 음상사도 아니다. 물론 백제의 남방경영과 가야의 서진정책이 기문에서 충돌했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그들의 소설에 불과하다. 「일본서기」상 반파는 임나가 아니므로 반파의 기문 대사를 근거로 임나의 영역을 확정할 수 없다. 또 가야는 백제의 부용국이 아니었는데, 『양직공도』가 반파가 백제의 부용국이라 하므로 반파가 임나가 될 수는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반파가 임나=가야라 하나, 「일본서기」에 반파마을이 임나마을인 증거는 전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가라마을의 다사진이 반파마을의 대사라고 주장하지만 「일본서기」에 의하면 다사진과 대사는 같을 수가 없다. 우선 가라마을과 반파마을의 이름이 같지 않다. 반파마을이 가라마을이라는 증거는 없다. 또 백제마을이 반파마을로부터 516년 경에 기문만 받고 대사를 받지 못했다면, 529년에는 백제 관료인 왜왕에게 “반파마을이 아직도 주지 않고 있으니 반파마을을 혼내주세요”라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백제마을은 “조공하는 통로로 쓰게 하여 달라”라고 새로운 명분을 제시하고, 가라마을도 “이 진은 관가를 둔 이래 신이 조공하는 나루였는데, 어찌 갑자기 이웃 나라에 줄 수 있습니까. 원래 분봉받은 영토와 다릅니다.”라고 한다. 다사진을 불과 10여년 전에 백제마을로 귀속시킨 왜왕의 결정이 있었다면 백제마을과 가라마을의 언급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또한 帶沙의 帶와 多沙津의 多는 훈으로 읽는다면 전혀 다른 음이다. 따라서 반파마을과 가라마을은 다른 나라이고, 다사진과 대사는 다른 곳이다. 다사진과 대사가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처럼 하동이라면 조공하는 통로로 하겠다는 백제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된다. 백제와 임나=가야의 영역이 어떤 방식으로 나누어 있어야 섬진강 건너의 하동이 백제와 열도의 교통로가 되는지에 대해 그들은 묵언수행하고 있다. 더구나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 250년(370년) 5월 신공이 백제에게 다사성을 주었다는 이야기에 나오는 다사성(多沙城)도 하동으로 본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백제는 마한에 가로막혀 하동까지 영토로 할 수 없다. 또한 이 때의 다사성은 신공이 역(驛)으로 삼도록 하겠다 하므로 백제와 야마토왜와의 교역로상 육로에 위치해야 한다. 그들의 말은 전혀 앞뒤가 부합하지 않는다. 그 경우 그들은 항상 사료가 오류라고 사기를 치거나 묵언수행한다.

또 515년 백제마을의 사신은 물부련과 함께 사도도에 이르렀으나, 반파마을의 반란으로 인해 바로 백제마을로 돌아가지 못하고 신라마을을 거쳐 백제마을로 귀환한다. 사도도를 거제도로, 대사강을 섬진강으로 보는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호위하는 물부련 군사들과 떨어져야 하고 가야의 해안을 따라 한참을 가야만 신라의 해안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 불가능한 일은 물부련이 사도도에 이르러 반파의 잔혹한 짓을 알게 된 후 수군 5백명을 이끌고 대사강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거제도에서 열도에 수군 5백명을 보내라고 전보라도 쳤다는 말인가? 또한 5백명으로 한반도의 신라를 괴롭힐 정도의 힘을 가진 어떤 정치체를 진압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따라서 기문, 대사, 다사진을 열도의 지명으로 보아야 하며, 관련된 「일본서기」의 백제, 안라, 반파, 만해, 마차해, 추봉, 신라, 사라, 가라는 열도의 마을국가의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일본서기」가 그들 억지의 근거가 안 되니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신찬성씨록」과 『양직공도』의 글자를 날조하고, 심지어 우륵 12곡의 곡명까지 지명으로 날조하고, 그래도 음상사조차 성립하지 않으니, 가짜 음상사를 음상사라고 우긴다.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그들의 일제유사사학에 대한 충성심만을 근거로 한다.

 

가야의 서부 확장은 소설 야마토임나의 하일라이트

강단유사사학은 사료의 글자 날조와 횡설수설과 고도의 가짜 음상사 기법을 통해 가야가 전라도로 진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가야의 확장은 없었다. 가야는 백제와 싸울 수 없다. 신라와 싸우기도 벅찼다. 백제는 김수로 집단의 한반도 이주에 도움을 주었던 나라로 추정되나, 신라는 탈해왕이 60년경 가야를 정복하려 하였다. 처음 신라와 가야는 비슷한 소국이었고, 백제는 대국이었다. 가야가 대국인 백제를 적으로 하면 뒤에서 신라의 침입을 받게 된다. 백제는 가야를 존치시켜 신라를 견제하게 한 후 고구려에 대비할 수 있었으므로 가야와 적대적일 필요가 없었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4세기 말부터 백제가 약해졌고, 신라는 국력이 커지면서 고구려에서 독립하기 위해, 5세기 중엽부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게 된다. 백제와 신라의 동맹기에도 역시 가야가 백제를 공격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6세기 이후 백제는 韓을 상실하여 약해지고, 신라는 더 강해지면서 가야와 백제를 동시에 공격하게 되므로, 가야와 백제가 적대적으로 될 수는 없다.

마한은 韓에 있다가 CE 9년 백제에 망한다. 5세기 한반도 남부에는 있지도 않은 전라도 마한을 가공으로 설정하고, 그들의 소설에서 광개토대왕 때 망했던 연맹체의 가야가 아무런 계기 없이 부활하여 무려 고구려를 몰아내고, 가공의 마한을 정벌하여 전라도쪽으로 진출했다는 것은 일제·강단유사사학의 판타지소설에 불과하다.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백제의 남방경영과 대가야의 西進政策의 충돌’은 소설 「야마토임나」의 하일라이트이다. 대가야의 서진정책이 불가능함은 이미 살펴 보았다. 백제는 가야 멸망 시까지 한반도에서 남방정책을 펼 일이 없었다. 처음부터 백제인데 뭘 한단 말인가? 강단유사사학은 좀비 마한을 상정한 후, 백제의 마한 점령 과정, 임나의 서진, 백제와 임나의 충돌, 백제의 임나 영토 침식, 백제에 대한 임나의 방어, 임나를 둘러싼 백제와 신라의 경쟁, 그 과정에서 힘센 야마토왜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기 위해, 야마토왜와의 조공관계(경제적 이득)를 획득하기 위해, 때로는 야마토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한반도의 백제 신라 임나, 이들 소국을 조정하며 지휘하는 대국 야마토왜의 한반도 출장소 야마토임나를 멋지게 묘사하여 일제유사사학에 충성하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