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임나=가야 주장의 허구성
사료에 나타나는 243회의 임나 또는 미마나의 차자는 광개토왕릉비 경자년조, 진경대사탑비, 『삼국사』 「강수전」에 보이는 3례 이외에는 모두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백제 관료인 왜왕의 외교문서에 등장한다.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백제 관료인 왜왕의 관할은 모두 열도와 관련된다. 따라서 임나나 미마나는 열도의 지명이라 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조, 진경대사탑비, 『삼국사』 「강수전」에 보이는 임나(주나)가 가야라고 사기를 친다. 그러나 이 세 경우에도 임나는 열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1) 진경대사탑비의 임나로 날조된 주나
강단유사사학은 진경대사탑비에 나타나는 임나가 김해 지역을 의미한다고 한다. 비문의 관련된 부분과 그에 대한 강단유사사학의 판독과 해석은 다음과 같다
大師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草拔聖枝, 每苦隣兵, 投於我國.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水雲雖縱其閑居, 朝野恨其無貴仕.
대사의 이름은 심희(審希)이고, 속성은 신(新) 김(金)씨이다. 그 선조는 임나(任那)의 왕족이요, 초발(草拔)의 신성한 후예였는데, 매번 이웃 나라의 군대에 괴로워하다가 우리나라에 귀의하였다.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두 원수[二敵]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진덕왕, 무열왕, 문무왕의〉 세 임금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대사의〉 아버지는 배상(盃相)으로, 도덕은 장자와 노자를 높이고 뜻은 적송자(赤松子)와 왕자(王子) 교(喬)를 흠모하였으니, 물과 구름은 그의 한가로이 지냄을 인정하였지만 조정과 재야의 선비들은 그가 벼슬을 귀히 여기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강단유사사학은 ‘임나왕족’이라 판독하는데 전혀 임나로 볼 수 없는 글자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제시하는 비문은 다음과 같다.

강단유사사학이 임나라 읽는 글자는 누가 봐도 任那가 아니고 住那이다. 조선총독부가 임나라고 읽어라 교시하니까 강단유사사학은 토달지 않고 자기 눈을 바보로 만들어버린다. 그들의 조선총독부 소설을 향한 충성은 끝이 없다. 자기 눈을 칼로 찔러서라도 조선총독부 소설을 떠받드는 그들의 피끓는 충절에 그 누가 감동하지 않을 것인지.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의 판독문에는 住자로 읽을 수 있다는 주석조차도 없다. 설사 임나라 읽어도 그들의 주장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강단유사사학처럼 임나를 김해로 해석하면 진경대사의 선조를 괴롭힌 나라는 신라가 된다. 김해를 매번 괴롭힌 나라는 신라이지 백제가 아니다. 경명왕은 진경대사에게 제자의 예를 표할 정도로 존경하여서 직접 진경대사의 비문을 지었다. 임나가 김해라면 경명왕은 신라가 임나를 괴롭힌 것을 명시하지 않았을 것이고, 부처님의 섭리라거가 좋은 인연이라거나 하는 다른 좋은 표현으로 그의 선조가 신라에 귀부했다고 기술했을 것이다. 존경하는 사람의 선조를 신라가 괴롭힌 것을 탑비에 쓰는 것은 강단유사사학의 코미디 소설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또 문자 자체도 隣兵의 隣과 投於我國의 我를 달리 쓰고 있어 隣은 신라가 아님이 명확하다. 따라서 주나가 아니라 임나라 가정하더라도 임나는 가야의 김해 지방이 아니다. 전술하였듯이 임나는 가야인들이 열도에 세운 가야 소국이다.
비문에 의하면 진경대사는 신김씨인데, 신김씨도 김해김씨로 추정된다. 김해의 가야 왕족들이 열도로 건너가서 임나, 주나 등 마을국가를 세웠기 때문에 주나의 왕족인 진경대사도 김해김씨이며, 비문에서 김유신과 진경대사가 같은 성씨라고 하기 때문이다. 흥무대왕은 김유신으로 진경대사와 일가일 뿐이고 진경대사의 직계선조는 아니지만, 경명왕은 진경대사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그를 신라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김유신과 연결시켜 진경대사의 가계가 초라해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草拔聖枝는 사람의 이름이다. 강단유사사학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신성한 후예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려면 초발만 써서 ‘그 선조는 왕족 초발’이라고 써야 한다. 초발성지는 열도식 즉 백제식 이름이다. 초발은 수풀이고 성지는 슬기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초발성지가 열도식 이름임을 숨기기 위해 초발의 신성한 후예라고 사기를 친다.
어떻든 진경대사탑비의 주나는 주나가 열도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고, 강단유사사학이 주나를 임나라고 사기 치는 이유는 임나=가야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어 날조라도 해서 근거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2) 『삼국사』 「강수전」의 임나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臣夲任那加良人”이라고 말했는데, 本은 선조(근본)를 의미하며, 任那加良의 加良은 음을 가라로 볼 수 있는데, 가라는 구루=城=마을=국가의 뜻이고 일족 친족 혈족 동족 등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강수가 한 말의 의미는 신의 선조는 임나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강단유사사학은 이 문구를 “신은 본래 임나가야 사람입니다”라고 해석한다. 강단유사사학은 고령이나 김해의 가야인들이 충주로 옮겨졌다고 하여 강수가 말한 임나가량이 가야의 고령이나 김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강수의 부 석체는 신라의 관직인 나마를 지냈다. 강수는 신문왕(재위 681-692년) 때 사망하므로 강수의 나이를 아무리 올려 잡아도 강수는 가야가 멸망한 지 한참 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고령이나 김해 사람들이 충주로 이주된 것은 6세기 중엽이다. 강수의 선조가 고령이나 김해 출신이더라도, 이주 후 적어도 50년이나 지난 후에 태어난 강수가 자신을 본래 고령이나 김해 사람이라고 할 리는 없다. 만약 강수가 말한 뜻이 강단유사사학이 말한 뜻이라면 강수는 반역죄로 처벌될 수도 있다. 가야가 망한 후 한참 후에 가야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 아버지가 신라의 벼슬까지 지낸 사람이, 신라 왕에게 자신을 망한 가야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의 本은 선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本을 선조를 의미하는 글자로 해석하더라도 임나는 고령이나 김해가 될 수 없다. 강수의 선조가 고령이나 김해 출신이더라도, 왕에게 가야가 존재할 당시의 지명을 들먹이는 것은 신라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줄 수 있으므로, 강수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고령이나 김해의 신라지명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나가 신라나 신라에 망한 한반도의 가야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강수는 그 선조가 임나국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강수 아버지의 이름이 석체(昔諦)이고, 따라서 강수의 성이 昔씨라면 강수의 선조는 신라에서 열도로 건너갔던 신라의 석씨 집단이 나중에 다시 신라로 되돌아온 경우로 보인다. 당시에 한반도에서 열도로의 이동이 주가 되었지만, 진경대사와 강수의 사례로부터 열도에서 한반도로의 이동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단유사사학이 本을 본래라고 사기 치는 이유는 本을 선조라 하면 강수의 선대가 고령이나 김해에서 충주로 이주하였다고 하더라도 고령이나 김해가 임나라는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충주로 이주된 고령이나 김해 출신의 사람들의 선조의 고향이 모두 고령이나 김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을 그대로 인정해도 임나가 고령이나 김해를 의미할 수는 없다. 그들이 강수의 선대가 고령이나 김해로부터 이주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임나가량이 고령이나 김해이므로 임나가 가야라는 동어반복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임나가 가야라는 증거를 만들기 위해 오역도 서슴치 않거나 동어반복을 무슨 대단한 증거인 것처럼 떠들어 대는 그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3)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조의 임나
담기양-왕건군의 비문 날조 해석과 글자수 축소
1963년 박시형을 비롯한 북한학자와 중국학자가 광개토대왕릉비를 공동으로 현지조사하였다. 현지조사 후 김석형과 박시형은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은 41자이고, 제1면 제6행만 아래 두 자가 없는 39자로서, 전부 1802자라 하였으며, 매 행간에 종선, 맨 위와 맨 아래에 횡선을 그어 괘선을 삼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1981년 비를 조사한 왕건군은 1775자라고 하면서 제2면 제9행 윗부분 7자와 제10행 윗부분 16자, 제4면 제1행 윗부분 4자에 해당하는 영역에는 원래 글자를 쓸 수 없었다고 한다.
호태왕비는 캐어낸 큰 돌을 약간 다듬어 이룬 것으로 전체가 方正形은 아니다. 제3면 머릿 부분은 斜面으로 되어 있어 제2면과 제3면이 서로 만나는 부분이 기울어져 있다. 제 3면의 기운 쪽엔 글자가 지금도 있어서 이는 비를 세울 당시 이미 제2면 왼쪽 위는 斜邊이었지 결코 단열로 기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제3면의 상단에 인접한 제4면 오른쪽 귀퉁이도 역시 글자를 새겨넣을 수 없는 사면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제3면의 머릿부분은 굴곡이 심하나(다른 곳도 이와 같다) 제4면 오른쪽 위 귀퉁이 변의 경사는 비교적 적어 제1행의 맨 윗자만 글자를 파 넣을 수 없을 뿐 제 2행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
이렇게 위에 든 것과 같이 글자를 새겨 넣을 수 없는 곳을 만나게 되면 곧 해당된 자리는 天格(옆금)을 그어서 글자가 없음을 표시했다.
예를 들면 제2면 제9행은 8번째 자(이것은 다른 행의 刻字 위치로 계산한 것이다. 아래도 같다.)에서 각자가 시작되었는데 바로 앞의 제7번째 자리에 하나의 長橫의 天格을 그어 놓았다. 또 제10행은 17번째 자부터 刻字가 시작되므로 바로 그 앞의 16번째 위치에는 역시 긴 천격을 파 놓았고 제 4면 제1행도 5번째 자에서부터 글자가 시작되기 때문에 그 앞의 제4번째 자리엔 긴 橫格을 표시해 두었다.
자세한 관찰을 거친 결과 이 세 곳은 모두 맨 위에 있어야 할 天格이 아래로 이동되어 있어 비가 원래 그랬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60년대의 북한과 중국의 공동조사에서는 발견되지 못한 횡선을 80년대의 조사에서 특별히 더 과학적인 조사기법을 사용하지 않았으면서도 발견하였다는 왕건군의 주장은 믿기 어렵다. 왕건군이 주장하는 글자수가 조작임은 그의 비문 해석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날조의 목적으로 해석하고 있어, 글자 수도 날조하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건군의 광개토대왕릉비 재조사는 담기양의 역사날조공정 일환으로 행해졌다. 왕건군은 비문조작설을 부인하고 일제유사사학과 완전히 일치하는 비문해석을 한다. 그는 병신년조 도입부 문장을 “百殘(백제)과 신라는 과거에 우리 고구려의 속국이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조공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부터 왜구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서 그들을 신민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백잔과 신라는 우리에게 稱臣朝貢을 하지 않았다] 영락태왕 6년, 그해는 병신년, 호태왕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을 토벌했다.”라고 하여 일제유사사학과 똑같이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여, 이어지는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 해석을 한다. 그는 399년 기사도 영산강왜의 항복이 아니라, “국내엔 왜인이 가득찼으며 성지는 모두 파괴 당했으며 태왕의 신하인 신라왕은 천민으로 변해서 신라왕은 태왕께 귀의하여 태왕의 지시를 듣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태왕은 인자하여 그들의 충성을 칭찬했다. 이에 신라사신을 돌려 보내면서 그에게 밀계를 얘기해 주었다.”라는 문장도 되지 않는 해석을 하여 일제와 강단유사사학에 동조하고, 407년 정미년의 공격대상도 일제유사사학과 강단유사사학처럼 백제로 본다.
중제유사사학의 고구려 연호 사용 부정
왕건군은 갑자기 영락이 광개토대왕의 연호가 아닌 시호이며 고구려의 다른 왕도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가 고구려의 연호 사용을 부정하는 것은 병신년조 문장을 왜가 신민을 두었다고 날조하고, 407년 고구려가 후연을 정복하였다는 것을 부정하기 위함이다. 연호를 사용하지 않아야 즉 고구려가 스스로를 제후국으로 생각했어야 왜가 신민을 둔다고 쓸 여지가 생긴다. 물론 제후국으로 자처했더라도 왜가 신민을 거느린다고 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구려의 연호를 부정해야 永樂 18년이 나오는 덕흥리고분과 영화 13년이 나오는 안악3호분에 의해 증명되는 고구려의 서진 유주·평주 지배사실을 감출 수 있다. 왕건군은 1976년 발굴된 덕흥리고분에서 영락 18년이 발견되어 고구려의 연호 사용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임에도 날조의 의도로 억지를 썼을 것이다.
중제유사사학과 일제유사사학의 공조
광개토대왕릉비를 재조사했다는 명목으로 쓴 왕건군의 글은 학문적 탐구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담기양에 의해 주도되는 날조역사 제작의 일환으로 제조된 것이다. 왕건군이 만든 탁본은 일제시대의 탁본보다 더 선명하여, 이진희는 왕건군의 탁본은 본을 뜬 뒤 먹칠을 해서 글자 모양을 뚜렷하게 만든 것이라고 의심했다. 중제유사사학이 도해파와 궤파성지가 조작된 글자임을 부인하고 일제유사사학에 동조하는 것은 남한 야마토임나설과 북한 낙랑설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남한이 소위 후삼한 78개국이 우글거리는 지역이어야, 야마토임나가 들어설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후삼한 소국의 하나인 초기 백제와 신라의 북쪽인 지금의 평양에 낙랑군이 들어설 수 있고 북경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을 숨길 수 있다. 역으로 지금 평양에 낙랑군이 들어서야 후삼한이 남한에 있게 되고 거기에 야마토임나가 들어설 수 있다. 그래서 중제·일제유사사학은 공동으로 우리 역사를 날조한다. 왕건군이 중립적인 위치에서 광개토대왕비를 연구할 수 있다는 강단유사사학의 주장은 왕건군이 중립적이므로 왕건군을 추종하는 강단유사사학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사기 치기 위한 말에 불과하다.
따라서 왕건군의 재조사 동기와 비문해석의 날조성을 고려하면, 제2면 제9행 윗부분 7자와 제10행 윗부분 16자에 해당하는 영역에 원래부터 글자가 없었다는 그의 주장을 믿기 어렵다. 왕건군이 400년 경자년조의 글자를 23자 줄인 것은 야마토임나설을 지원하기 위함이다. 400년 기사의 글자만 유독 많이 지워져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어, 비문의 고의적 삭제의 의심이 생기는데, 글자수 축소는 이러한 의심의 강도를 줄이기 위함이다. 물론 글자 수를 줄인다고 하여 의심에 큰 영향은 없지만 왕건군이 담기양에 날조실적을 보고할 때는 중요한 실적으로 산정하였을 것이다.
왕건군의 경자년 소설 창작
왕건군은 글자가 있었다고 보아 문장이 통하지 않았는데, 글자가 없다고 보면 문장이 통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경자년조에서 23자를 제거한 후 다음과 같이 판독하고 해석하였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住(往)救新羅. 從南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即歸服, 安羅人戍兵. 拔新羅城, 鹽城, 倭寇大潰, 城內十九, 盡拒隨倭, 安羅人戍兵. 新羅城□□□□□□□□□□----
10년 경자에 태왕은 보병 기병 5만을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男居城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인은 그중에 가득했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관군]은 왜적의 배후를 추격하여 任那加羅의 從拔城까지 이르자 이 성은 즉시 항복하여 신라인을 그곳에 파견하여 戍兵把守시켰다. [이어서 또한] 신라성과 鹽城을 공격하자 왜구는 크게 무너졌다. 성안의 십분의 구의 신라인은 모두 왜를 따라가기를 거절하자 〔고구려 군대는 또한] 신라인을 안치하여 戍守하게 했다. 신라성…………
왕건군은 글자가 없다고 보면 문장이 통한다고 했으나 그의 판독과 해석역시 문장이 통하지 않는다. 그는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걸쳐 왜군이 가득했다가 고구려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는데, 고구려군이 임나가라의 종발성을 함락시킨 후 또 신라성을 공격한다고 한다. 제2 신라성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그의 해석은 성립할 수 없다. 말도 되지 않는 판독이나 해석은 하지 않음만 못한데, 그가 이렇게 유치한 해석이라도 한 이유는, 왕건군의 목적이 그가 어떤 구체적 해석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바다를 건너 열도를 정복한 것을 숨기고 글자 수 축소를 기정사실화 하려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하여서 담기양으로부터 유능한 역사 제조 작업 수행자로 인정 받았을 것이다.
일제 참모본부의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조와 정미년조의 고의 삭제
2면 8행∼10행과 3면 1행∼5행을 모두 41자라 보고 노태돈의 판독에 따라 쓰면 다음과 같다.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盡□□□安羅人戍兵新□□□□其□□□□□□□言
□□□□□□□□□□□□□□□□□□□□□□□□□□辭□□□□□□□□□□□□□潰
□□□□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𦊆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
비의 다른 부분에서는 이렇게 많은 글자가 지워진 곳은 없다. 경자년조 왜 토벌을 기술하는 부분에서 2면 9행 상단 글자가 없어진 부분은, 전술하였듯이 임나가라가 열도에 있으므로, 왜가 바다로 도망가고 고구려군이 바다를 건너 왜를 추격하는 장면이라 추정되는데 지워졌고, 2면 10행과 3면 1행은 열도 내 고구려의 연승을 기록하는 장면으로 추측되는데, 안라만 안 지워지고 거의 다 지워졌다. 정미년조는 공격대상이 후연임을 알리는 부분이 지워져 있다. 일제와 중국의 역사날조에 필요한 부분만 정확히 지워져 있다. 특히 경자년조 2면 10행과 3면 1행은 바로 옆 행의 글자가 아주 높은 비율로 멀쩡하다. 물론 3면 1행의 하단부는 옆글자들이 상당히 지워졌는데, 이는 3면 4행에 있는 정미년조의 공격대상을 지우기 위해 2행과 3행의 글자도 일부러 조금 지운 것이다. 지워야 되는 부분은 혹시 일부 글자로 전체가 추정될까봐 연속해서 지워져 있다. 지워야 될 부분에서 예외적으로 남아있는 부분은 일제와 강단유사사학이 한반도에 있다고 날조하는 임나가라와 안라 뿐이다. 이는 자연적 현상이라 보기 어렵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임나는 대마도
전술하였듯이 광개토대왕릉비의 임나는 열도의 지명이다. 가야인의 이동에 따라 지명인 임나도 대마도 구주 본주로 이동하였으며, 이동한 뒤에도 그 지명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므로, 동시에 여러 임나가 있게 된다. 따라서 400년 기사 글자가 거의 삭제된 상태에서는 비문이 지칭하고 있는 임나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임나가라종발성’이 400년 기사의 앞 부분에 나오므로 여기의 임나는 대마도의 임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안라인수병애 대한 왕건군의 횡설수설
왕건군은 ‘安羅人戍兵’의 安을 동사로 보아 安置 또는 安放이라 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安羅人戍兵: 신라인을 그곳에 안치하여 戍兵把守를 시켰다는 뜻이다. “安”은 동사이다. 뒷면의 비문에 호태왕의 생존시 교언에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란 귀절이 있으며 또한 “自上祖先王以來, 墓上不安石碑,”도 보이는데 이런 곳의 “安”자는 모두 동사로 “安置, 安放”의 뜻이다.
그러나 왕건군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실제 비문 해석에서는 “신라인을 그곳에 파견하여 戍兵把守시켰다”라고 하여 안치란 뜻이 아니라 파견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병사는 安置의 대상이 아니라 배치의 대상이다. 안치란 안전하게 안정적으로 둔다는 말이므로 병사의 전투업무 배치를 안치라 할 수는 없다. 그가 安이 안치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의 해석은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略取해 온 韓人과 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이다. ‘安守墓者’는 ‘묘를 편안히 지키는 자’로 해석되므로 安은 부사로 사용되었고 안치의 뜻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不安石碑’의 安은 安置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비석과 군대는 다르다. 비석은 안치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不安石碑’가 병력 배치에서 安을 사용할 수 있다는 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는 ‘安羅人戍兵’과 관련하여 거짓말로 일관하고 있다.
안라인수병애 대한 일제·강단유사사학의 코미디 해석
일제·강단유사사학의 종래 통설은 왕건군과 달리 안라인수병을 명사로 보며, 안라를 가야로 보아 백제나 왜에게 동조하는 세력으로 본다. 유사성이 뛰어난 그들은 왕건군의 비학문성을 뛰어 넘는다. 고구려가 안라인수병을 이길 때는 보직(수병)까지 표시하면서 이겼다고 세 번이나 기록할 만큼 안라인수병이 특별한 군인이었음을 그들은 결자 속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무에서 유를 발견하는 그들의 세계적 유사성은 우리를 감탄하게 한다.
안라인수병이 세 번이나 등장하는 이유
전술하였듯이 안라는 고구려계 열도 소국이다. 고구려는 바다를 건너 열도로 원정하였으므로 그렇게 많지 않은 군대였을 것이다. 점령지에 수비병을 배치하는 경우 본대의 병력이 줄어드므로, 고구려군은 일련의 전투에서 이겨 성들을 점령하면, 우호 세력인 안라의 병력을 동원하여 점령지를 방어하고 전진하였다. 그래서 중요한 전투 기사 마지막 부분마다 안라인수병을 배치하였다는 문구가 기재된다. ‘安羅人戍兵’의 바로 앞에 配나 그와 비슷한 의미의 글자가 있었을 것이다.
열도고구려의 증거들
일제유사사학이 임나와 안라를 지우지 않아서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해 고구려의 열도 정벌이 명확히 입증된다. 오사카에는 고구려계통의 장식고분으로 추정되는 많은 고분과 고려사적(高麗寺跡) 등이 발견되며 이즈모 지역에도 고구려계 벽화고분, 가미요도폐사에서 발견된 벽화의 파편, 가모스 신사 등이 발견되었고, 이즈모와 인접한 오카야마에서 고구려 문양의 기와가 출토되었다. 백제가 고구려계 소국을 정벌하면서 많은 유적이 파괴되었고, 일제가 모든 유물 유적을 숨기거나 왜곡하는 것처럼 고구려의 것도 그 시기를 속이거나 숨기고 있으므로 유적 유물을 통해서는 정확히 고구려의 지배범위를 알기는 어려우나, 399년 신라에 투항한 전라도왜가 나라로 보내졌으므로 고구려계 국가는 오사카와 나라를 중심으로 지배하였고, 백제는 구주를 통치하였다고 추정된다. 전술하였듯이 오사카와 나라엔 3세기말 4세기초 예부여 일부가 이주하였다. 광개토대왕의 열도 점령 시 이들이 고구려에 협력하였거나 아니면 고구려계 국가에 점령당하여 오사카와 나라가 고구려계 국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지역에 5세기 초 전라도왜를 대거 이주시켜 저수지와 농경지 등이 개척되었고, 6세기부터 백제의 지배를 받으면서 발전하였다. 즉 나라에 야마토왜란 독립한 고대국가는 성립되었던 적이 없고, 하북성 왜 이주민의 소국이었다가, 5세기에 고구려계 국가가 되었다가, 6세기에 백제가 직접 다스리는 영토로 되었다.
최재석은 신라의 포로가 된 전라도왜가 신라에서 나라로 보내진 이유를 명시하지 않고 백제 주민이 피난지를 찾아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인구는 가장 중요한 국가자산이므로 신라를 압도하는 국가의 영향 없이 신라가 전라도왜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당시 신라를 지배한 국가는 고구려이므로 광개토대왕이 포로의 열도 이주를 명령했다고 보아야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기술되어 있듯이 광개토대왕은 399년 전라도왜의 대규모 항복을 내물왕이 보고하여 알고 있었고, 열도에서 고구려계 국가의 힘이 백제에 비해서 약했으므로, 이들을 나라로 보내어 고구려계 국가의 힘을 키워 열도에서도 백제를 견제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열도에서의 백제의 반격
백제는 5세기인 421년부터 478년까지 소위 왜5왕이 송으로부터 책봉을 받게 하는데 이는 열도에서 고구려계 국가와의 대결 때문이다. 왜왕 무는 478년의 표문에서 “동쪽으로 55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북쪽 95국을 평정하여 왕도를 성하게 하고 곽토를 키웠으며”라고 말하는데 이는 5세기 백제의 왜왕들이 고구려계 소국을 계속 침식해가는 과정을 과장하여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는 6세기 초 고구려계 국가를 완전히 정복하고 나라를 직접 다스리게 된다. 전술하였듯이 「일본서기」에 513년, 516년, 547년, 554년 백제가 나라에 관리를 파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513년 이후에야 백제가 관리를 파견하는 것은 그 전까지는 고구려계 국가가 나라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릉비의 399년 기사 400년 기사는 고구려의 열도 정벌과 5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열도 분할통치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 야마토임나설과 그 아류가 창작하는 소설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야마토왜라는 고대국가는 「일본서기」에도 전혀 근거가 없는 가공의 나라일 뿐이다. 영산강왜는 전라도에서는 백제의 국민이었고, 나라에서는 5세기 열도의 고구려계 국가의 국민이었고, 6세기 이후로는 다시 백제의 국민이 되었다.
강단유사사학이 임나=가야라고 주장하는 증거인 광개토대왕릉비 경자년조, 진경대사탑비, 『삼국사』 「강수전」에 보이는 임나는 모두 임나가 열도의 지명임을 재차 확인시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강단유사사학은 오역을 하고 억지를 부리면서, 임나=가야라고 소설을 쓰는 조선총독부에 열렬한 충성을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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