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열도백제)을 야마토왜로 날조
열도에서도 왜(예)계는 피지배민에 불과하였다
왜는 강어귀로 간 우리 민족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강역에 살았던 이들은 백제와 고구려인이 되었고, 석탈해 세력은 신라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어업을 주로 한 왜(예)인들이 열도로 먼저 이주하여 열도의 지역명이 왜로 되었다. 전술하였듯이 왜계 세력이 열도를 지배한 적은 없다. 백제 멸망 후, 신라와 당에 점령 당하지 않은 열도의 백제인들이, 국호를 백제의 별칭이었던 일본으로 하면서, 일본국이 등장하였고, 이들이 신라와 대진의 간섭기가 끝난 후 독립하여 우리의 역사에서 이탈하였다. 8세기까지 한국말을 하였고 한국옷을 입었던 열도의 고대사는 우리의 고대사이다.
「일본서기」에서 야마토왜는 일본의 지방명이나 속국이다
일제유사사학은 일본이 한국이었음을 부정하기 위해 야마토왜라는 가공의 왕조와 가공의 역사를 창작하였다. 그들은 「일본서기」를 야마토왜 왕조의 근거로 제시하나, 「일본서기」 어디에도 야마토왜 왕조는 없다. 「일본서기」에서 왜나 대왜(대화)는 일본의 영토였음이 일관성 있게 기록되어 있다. 전술하였듯이 大倭(大和)는 ‘다이와’ 정도로 읽을 수는 있으나 야마토라고 읽을 수는 없는데, 일제유사사학은 가야계의 야마대국을 왜계의 국가로 날조하기 위해 大倭(大和)를 야마토라 읽고 있다. 즉 大倭(大和)는 그 이름부터 날조된 것이다. 大倭는 전술하였듯이 399년 신라에 항복하였다가, 5세기 초 전쟁포로로 나라로 끌려간 영산강왜이다. 대왜가 열도를 지배한 것이 아니다. 대왜는 고구려계 국가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백제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민이다. 대왜는 가야계의 야마대국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일본서기」의 왕(천황)은 대왜 왕이 아니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일본국 천황을 어떤 근거도 없이 야마토왜왕으로 주장하고, 「일본서기」가 야마토왜(大和)의 역사책이라 주장한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2세기 구주의 가야계 야마대국에서 야마토라는 국명을 취하면서, 열도가 3세기부터 왜(예)집단이 야마토라는 왕조를 중심으로 가야 백제 신라의 영향 없이 독립적인 나라로 출발하였다고 날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왜국이나 대왜는 일본과 별개의 나라이거나, 천황에 복속한 국가이거나, 일본의 지방명이라 명시하고 있다. 강단유사사학이 번역한 「일본서기」에 의해 일본이 왜가 아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ㄱ. 일본과 왜(대왜)는 별개의 나라
ㅇ 신무의 동쪽 정벌: 적들에 의해 길이 막히자, 제사를 지냄 (B.C.663년 9월 5일) 천황이 토전의 고창산(高倉山;타카쿠라야마) 꼭대기에 올라가서 나라 안을 바라보았다. --- 적의 거점은 다 중요한 땅이었다. 그래서 길이 차단되어 지나가려해도 방법이 없었다. 천황은 이런 상황이 싫어 그날 저녁 신(神)의 뜻을 알려 달라고 빌고 잤다. 그러자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서--- 천황이 삼가 꿈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대로 실행하려고 하였다. 그때 또 제활이 “왜국(倭國)의 기성읍(磯城邑)에는 기성(磯城)의 팔십효수(八十梟師)가 있고 또 고미장읍(高尾張邑;타카워하리노무라)[어떤 책(或本)에서는 갈성읍(葛城邑;카츠라기노무라)이라고 적었다.]에는 적동(赤銅;아카가네) 팔십효수가 있습니다. 이들이 지금 천황을 거역하여 싸우려 하고 있습니다. 신(臣)은 마음속으로 천황이 걱정됩니다.
ㅇ 정벌에 대한 논공행상 (B.C.659년 2월 2일) 갑진삭 을사(2일)에 천황이 논공행상을 하였다. 도신명에게 택지를 주어 축판읍(築坂邑)에 살게 하고 특별히 총애하였다. 또 대래목(大來目;오호쿠메)을 무방산 서쪽의 냇가 주변 땅에 거주하게 하였다. 지금 내목읍(來目邑;쿠메노무라)이라 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는다. 진언(珍彥;우즈히코)[珍彥는 우즈히코(于砮毗故)라고 읽는다.]은 왜국조(倭國造)로 삼았다. 또 제활에게 맹전읍(猛田邑;타케다노무라)을 주어 맹전현주(猛田縣主;타케다노아가타누시)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토전주수부(蒬田主水部;우다노모히토리라)의 선조다. 이름이 흑속(黑速)이었던 제기성을 기성현주(磯城縣主)로 삼았다.
ㅇ 「위지」 단순인용 부분
- (239년 6월) 39년 이 해의 간지는 기미(己未)이다 [위지(魏志)에서는 명제(明帝) 경초(景初) 3년 6월에 왜 여왕이 대부(大夫) 난두미(難斗米) 등을 보내 군(郡)에 이르러 천자에게 가서 조헌할 것을 청하자, 대방군 태수 등하(鄧夏)가 관리를 보내 데리고 가게하여 경도(京都)에 이르게 하였다고 한다]
- (240년) 40년 [위지에는 정시 원년에 건충교위제휴(建忠校尉梯携) 등을 보내 조서와 인수를 받들고 왜국에 가게 하였다고 한다]
- (243년) 43년 [위지에는 정시 4년에 왜왕이 다시 사신 대부 이성자(伊聲者)와 액야약(掖耶約) 등 8인을 보내어 헌상하였다고 한다]
ㅇ 사마숙녜(斯摩宿禰)를 탁순국에 보냄 (246년 3월 1일) 46년 봄 3월 을해삭(1일)에 사마숙녜(斯摩宿禰;시마노스쿠네)를 탁순국(卓淳國)에 파견하였다[사마숙녜는 어떤 성(姓)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때 탁순왕(卓淳王) 말금한기(末錦旱岐)가 사마숙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갑자년(甲子年) 7월 중에 백제인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동방(東方)에 일본이라는 귀국(貴國)이 있다는 말을 듣고 신들을 보내 귀국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ㅇ 신라가 구원을 요청함 (464년 2월) 이에 신라왕이 밤에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춤추고 노래한다는 것을 듣고 적이 모두 신라 땅으로 들어온 것으로 알고, 이에 임나왕(任那王)에게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하려 합니다. 이렇게 되니 흔들리는 깃발과 같이 불안합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은 것보다 더하고 목숨의 길고 짧음을 심히 헤아릴 수 없는 바입니다. 엎드려 일본부(日本府)의 행군원수(行軍元帥) 등의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말하였다.
ㅇ 일본이 당의 수군과 싸웠으나 패배함 (663년 8월 27일) 무신(27일)에 일본의 수군 중 처음에 온 사람들이 대당(大唐)의 수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이 져서 물러났다. 대당은 진열을 굳게하여 지켰다.
ㄴ. 왜(대왜)는 일본의 지방명이나 속국
ㅇ 수정천황을 장사지냄 (B.C.548년 10월) 병술삭 병신(11일)에 신정명천이천황을 왜(倭)의 도화조전구상릉(桃花鳥田丘上陵;츠키다노워카노워헤노미사자키)에 장사지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하였다. 이 해의 간지는 계축이다.
ㅇ 대물주신을 비롯한 많은 신들에게 제사지내니, 역병이 멈추고 나라가 안정됨 (B.C.91년 11월 13일) 기묘(13일)에 이향색웅에게 명하여 물부의 많은 그릇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물건으로 하였다. 그리고 대전전근자를 대물주대신을 제사지내는 제주로 삼고, 또 장미시를 왜의 대국혼신을 제사지내는 제주로 삼았다. ----
ㅇ 왜의 협성지(狹城池)와 적견지(迹見池)를 만듦 (6년 10월) 겨울 10월에 왜(倭)의 협성지(狹城池) 및 적견지(迹見池)를 만들었다.
ㅇ 경행천황을 장사지냄/황후를 황태후로 삼음 (132년 11월 10일) 2년 겨울 11월 계유삭 임오(10일)에 대족언천황을 왜국의 산변도상릉(山邊道上陵)에 장사 지냈다. 황후를 높여 황태후로 삼았다.
ㅇ 성무천황을 장사지냄 (191년 9월 6일) 이듬해 가을 9월 임진삭 정유(6일)에 왜국(倭國) 협성순열릉(狹城盾列陵;사키노타타나미노미사자키)에 장사지냈다
ㅇ 축자국으로 행차할 때 웅악(熊鰐)이 인도하여 배가 나아가지 않자, 신에게 제사지냄 (199년 1월 4일) 8년 봄 정월 기묘삭 임오(4일)에 축자(筑紫)로 갔다. ----. 반드시 이 신들의 뜻일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은 즉시 기도하고, 선장인 왜국 토전(菟田;우다) 사람 이하언(伊賀彦;이가히코)을 축(祝;하후리)으로 삼아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랬더니 배가 나아갔다.
ㅇ 왜의 둔전과 둔창의 관장 문제 (권제11 대초료천황 인덕천황 총서) 이때 액전대중언황자(額田大中彦皇子;누카타노오호나카츠히코노미코)가 왜(倭)의 둔전(屯田) 및 둔창(屯倉)을 관장하고자 둔전사(屯田司)인 출운신(出雲臣;이즈모노오미)의 선조 어우숙녜(淤宇宿禰;오우노스쿠네)에게 “이 둔전은 본래 산수(山守;야마모리)의 땅이다. -----. 그리하여 왜의 둔전에 관해 물었다. 오자롱이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전향옥성궁(纏向玉城宮;마키무쿠노타마키노미야)에서 천하를 다스린 천황의 시대에 태자 대족언존(大足彦尊;오호타라시히코노미코)에게 맡겨 왜의 둔전을 정했다고 합니다. 이때 조를 내려 ‘무릇 왜의 둔전은 언제나 천황의 것이다. ------
ㅇ 중(仲) 황자가 궁을 불태우자 태자가 도망감 (권제12 거래수별천황 이중천황 총서) 이에 중황자는 일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태자를 죽이려 마음먹고, 몰래 군사를 일으켜 태자궁을 둘러쌌다. --- 그래서 세 사람이 태자를 부축하여 말에 태우고 도망쳤다[어떤 책(一云)에서는 대전숙녜가 태자를 안고 말에 탔다고 한다.]. 중황자는 태자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여 태자궁에 불을 질렀는데,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태자는 하내국(河內國;카후치노쿠니)의 식생판(埴生坂;하니후노사카)에 이르러서야 깨어났다. 그리고 난파를 돌아보다가 불빛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리하여 바로 급히 말을 달려 대판(大坂;오호사카)에서 왜(倭)로 향하였다. -----
ㅇ 아담련빈자(阿曇連濱子)를 묵형에 처함 (400년 4월 17일) 여름 4월 신사삭 정유(17일)에 아담련빈자를 불러 “너는 중황자와 더불어 반역을 꾀하고 천황을 죽이려 하였다. 그 죄는 죽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큰 은혜를 베풀어 사형 대신에 묵형에 처한다.”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날 묵형을 행하였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아담목(阿曇目;아즈미메)이라 하였다. 또 빈자가 거느리는 야도(野島;노시마)의 해인 등의 죄를 면해주고 왜의 장대둔창(蔣代屯倉)에서 사역하였다.
ㅇ 황태후가 천황의 마음을 알고 육인부(宍人部)를 정할 것을 청함 (458년 10월 6일(是日) 이 날에 천황[車駕]이 길야궁(吉野宮)에서 돌아왔는데, 나라 안에 사는 백성이 모두 무서워서 떨었다. 이로 인해 황태후가 황후와 더불어 그 사실을 듣고 매우 두려워, 왜(倭)의 채녀인 일원(日媛;히노히메)에게 술을 들고 맞이하도록 보내었다. ---
ㅇ 대왜국(大倭國)의 구금교(勾金橋)로 도읍을 옮김 (534년 1월) 원년 봄 정월에 대왜국(大倭國)의 구금교(勾金橋;마가리노카나하시)로 천도하고 이를 궁의 이름으로 하였다.
ㅇ 선화천황을 장사지냄 (539년 11월 17일) 겨울 11월 경술삭 병인(17일)에 천황을 대왜국(大倭國) 신협(身狹;무사)의 도화조판상(桃花鳥坂上;츠키사카노우에)의 능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황후 귤황녀(橘皇女)와 그 어린 아들[孺子]을 이 능에 합장하였다 [황후가 죽은 해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유자(孺子)는 아마도 성인이 되기 전에 죽은 것 같다.].
ㅇ 백제의 기지부(己知部)가 귀화함 (540년 2월) 2월에 백제인 기지부(己知部)가 귀화하였다. 왜국(倭國) 첨상군(添上郡;소후노카미노코오리)의 산촌(山村;야마무라)에 안치하였다. 지금의 산촌기지부(山村己知部)의 조상이다.
ㅇ 왜국(倭國) 기성군(磯城郡) 기성도(磯城嶋)로 도읍을 옮김 (540년 7월 14일) 가을 7월 병자삭 기축(14일)에 왜국의 기성군(磯城郡;시키노코오리) 기성도(磯城嶋;시키시마)로 도읍을 옮기고 이름을 기성도금자궁(磯城嶋金刺宮;시키시마노카나사시노미야)이라 하였다.
ㅇ 소아대신도목숙녜(蘇我大臣稻目宿禰) 등을 보내 왜국, 기국에 둔창을 둠 (556년 10월) 겨울 10월에 소아대신도목숙녜 등을 왜국(倭國)의 고시군(高市郡)에 보내어 한인대신협둔창(韓人大身狹屯倉;카라히토노오호무사노미야케) [여기에서 한인이란 백제를 이른다.], 고려인소신협둔창(高麗人小身狹屯倉;코마비토노워무사노미야케)을 두도록 하였다.
ㅇ 저수지와 수로를 만듦 (607년) 이 해의 겨울, 왜국에 고시(高市;타카이치)못, 등원(藤原;후지와라)못, 견강(肩岡;카타오카)못, 관원(菅原;스가하라)못을 만들었다. 산배(山背;야마시로)국 율외(栗隈;쿠루쿠마)에 큰 수로를 만들고, 하내(河內;가후치)국에는 호예(戶苅;토카리)못, 의망(依網;요사노)못을 만들고, 또 나라마다 둔창(屯倉;미야케)을 두었다.
ㅇ 국사를 임명하고 국사의 임무를 밝힘 (645년 8월 5일) 8월 병신삭 경자(5일)에 동국 등의 국사(國司)를 임명하였다. 국사들에게 “천신이 명하신 대로 지금부터 사방의 전국을 다스리고자 한다. 그대들은 임지에 가서 무릇 국가가 소유한 공민(公民)이나 대소의 (호족이) 소유한 사람들을 그대들에게 맡기는 바, 모두 호적을 만들고 논밭의 넓이를 조사하라. ---이상이 법을 충실히 지키면 반드시 포상하라. 법을 지키지 않으면 작위를 떨어뜨려야 한다. -----. 왜국(倭國)의 6현(縣)에 파견된 사신은 호적을 만들고 아울러 전지의 면적을 조사하라. [개간된 전지의 면적과 백성의 호구와 연령을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대 국사들이여. 명확히 잘 알아듣고 물러가거라.”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비단과 삼베를 각기 차등 있게 주었다.
ㅇ 국조 등 관인들의 잘못에 대한 보고 (646년 3월 19일) ‘수적신사(穗積臣咋;호즈미노오미쿠히)가 잘못을 범한 것은 백성에게 호별로 물품을 요구하고는 이를 후회하고 돌려주긴 했지만, 모두 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 그리고 국조가 보낸 무기를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고 함부로 국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임지에서 칼을 도난당했습니다. 그리고 왜국에서도 칼을 도난당했습니다. ----- 이 잘못한 것은 왜국에서 관의 칼을 도둑맞은 것입니다. 이것은 조심하지 않은 것입니다. ------
ㅇ 소아신일향이 소아창산전마려대신을 모함함 (649년 3월 24일) 무진(24일)에 소아신일향(蘇我臣日向;소가노오미히무카) [日向의 자(字)는 신자(身刺;무자시)이다.]은 황태자에게 창산전대신(倉山田大臣;쿠라로야마다노오호오미)을 모함하였다. “저의 이복형 마려가 황태자가 해변에서 쉬는 때를 노려 해치려 합니다. 모반이 멀지 않았습니다.” 황태자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천황은 군사를 일으켜 대신의 저택을 포위하려 하였다. 그러자 대신은 두 아들 법사(法師;호후시)와 적저(赤猪;아까웨)[다른 이름은 진(秦;하다)이다.]를 데리고 모정도(茅渟道;치누노미치)에서 왜국(倭國)의 경계로 도망쳤다.
ㅇ 황태자가 왜경(倭京)에 행차함 (667년 8월) 8월에 황태자가 왜(倭)의 경(京)에 행차하였다.
ㅇ 왜국, 찬길국, 대마국 등에 성을 쌓음 (667년 11월) 이 달에 왜국(倭國)의 고안성(高安城;타카야스노키), 찬길국(讚吉國;사누키노쿠니) 산전군(山田郡;야먀다노코호리)의 옥도성(屋島城;야시마노키), 대마국(對馬國;츠시마노쿠니)의 금전성(金田城;카나타노키)을 쌓았다
ㅇ 대우황자가 군사를 일으키고자 함 (672년 6월 26일) --황자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 수적신백족(穗積臣百足;호즈미노오미모모타리), 그 아우 오백지(五百枝;이호에), 물부수일향(物部首日向;모노노베노오비토히무카)을 왜경(倭京)으로, 좌백련남(佐伯連男;사헤키노무라지워토코)을 축자에 보내고 장사주반수(樟使主磐手;쿠스노오미이하테)를 길비국(吉備國;키비노쿠니)에 보내 모두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ㅇ 대반련마래전과 취부는 대해인황자에게 귀순함 (672년 6월 26일) 이때 대반련마래전과 아우 취부(吹負;후케히)는 사정이 불리한 것을 알고 병을 핑계 삼아 왜(倭)에 있는 집으로 물러갔다. 그리고 황위를 잇는 것은 반드시 길야(吉野)에 있는 대황제(大皇弟)일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마래전이 먼저 천황에게 귀순하였다.
ㅇ 군대를 거느리고 왜와 근강에 들어가게 함 (672년 7월 2일) 가을 7월 경인삭 신묘(2일)에 천황이 기신아폐마려(紀臣阿閉麻呂;키노오미아헤마로), 다신품치, 삼륜군자수, 치시련토(置始連菟;오키소메노무라지우사기)를 보내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세(伊勢)의 대산(大山;오호야마)을 거쳐 왜(倭)로 향하게 하였다. ----- 전중신족마려를 보내 창력도(倉歷道;쿠라후노미치)를 지키게 하였다.
ㅇ 초위 이상인 관인들이 대사(大射)를 행하고, 대왜국과 근강국에서 흰 매와 꿩을 바침 (675년 1월 17일) 임술(17일)에 공경대부및 모든 백관들 중 초위(初位) 이상이 서문(西門) 마당에서 대사(大射) 행사를 가졌다. 또 이 날 대왜국(大倭國)이 상서로운 닭을 바쳤으며 동국(東國)에서 흰 매를 바쳤다. 그리고 근강국(近江國)에서 흰 꿩을 바쳤다.
ㅇ 기인을 뽑아 바칠 것을 명함 (675년 2월 9일) 2월 을해삭 계미(9일)에 대왜, 하내(河內;카후치), 섭진(攝津;셋츠), 산배(山背;야마시로), 파마(播磨), 담로(淡路;아하지), 단파(丹波), 단마(但馬;타지마), 근강(近江), 약협(若狹;와카사), 이세(伊勢), 미농(美濃), 미장(尾張;워하리) 등의 국(國;쿠니)에 칙을 내려 “각 관할하의 백성 가운데 노래를 잘 부르는 남녀 및 주유(侏儒) 기인(伎人)을 뽑아서 바쳐라.”라고 명하였다.
ㅇ 용전의 풍신과 광뢰의 대기신에게 제사지냄 / 왜국에서 상서로운 닭을 바침 (676년 4월 4일) 여름 4월 무술삭 신축(4일)에 용전의 풍신(風神)과 광뢰의 대기신(大忌神)에게 제사지냈다. 왜국(倭國) 첨하군(添下郡;소후노시모노코호리)의 악적길사(鰐積吉事;와니츠미노요고토)가 서계(瑞鷄)를 바쳤다. 그 볏이 동백꽃과 같았다. 이 날 왜국의 포파군(飽波郡;아쿠나미노코호리)에서 아뢰길 “암탉이 수탉이 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ㅇ 4국에 부역과 조를 교대로 면제해 줌/ 왜국과 단파국에서 상서로운 짐승을 보고함 (684년) 이 해에 “이하(伊賀), 이세(伊勢), 미농(美濃), 미장(尾張) 4국은 지금부터 조를 바치는 해에는 부역을 면하고 부역을 하는 해에는 조를 면하라.”고 명을 내렸다. 왜(倭)의 갈성하군(葛城下郡;카즈라키노시모노코호리)이 “네 발이 달린 닭이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또 단파국(丹波國;타니하노쿠니) 빙상군(氷上郡;히카미노코호리)이 “12개의 뿔이 있는 송아지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ㅇ 승려들이 곡을 하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조사를 읽음 (686년 9월 29일) 병인(29일)에 승니가 또 곡을 하였다. --- 다음으로 직광사 수적조신충마려가 여러 국사의 일에 관해 조사를 읽었다. 다음으로 대우(大隅), 아다(阿多)의 준인(隼人) 및 왜(倭)와 하내(河內;카후치)의 마사부조(馬飼部造;우마카히베노미야츠코)가 각각 조사를 읽었다.
ㅇ 고천원광야희(高天原廣野姬)의 가계와 황후로서의 역할 (지통 즉위전기) -----천정중원영진인천황 원년 여름 6월에 천정중원영진인천황을 따라 동국(東國;아즈마노쿠니)으로 피난하였다. 그리고 군에 명하여 무리를 결집시켜 함께 계책을 세웠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자들 수만 명에게 명령하여 여러 요해 지역에 배치하였다. 가을 7월에 미농(美濃;미노)의 장군과 대왜(大倭)의 호걸들이 함께 대우황자(大友皇子;오호토모노미코)를 주살하여 그 머리를 들고 불파궁(不破宮;후하노미야)으로 찾아왔다. 2년에 황후가 되었다. 황후는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황을 보좌하여 천하를 안정케 하였다. 항상 천황을 모시고 있는 동안에도 정사에 관해 언급하여 많은 도움이 되었다.
ㅇ 대신에게 폐백을 바침 (692년 5월 26일) 경인(26일)에 사자를 보내 이세, 대왜(大倭), 주길(住吉;스미노에), 기이(紀伊;키) 네 곳의 대신(大神)에게 폐백을 바치고 신궁(新宮)에 보고하였다.
ㅇ 신라의 공물을 신사에 바침 (692년 12월 24일) 갑신(24일)에 대부들을 보내 신라의 조공물을 이세(伊勢), 주길(住吉), 기이(紀伊), 대왜(大倭), 토명족(菟名足) 등 다섯 개 신사에 바쳤다.
「일본서기」에는 왜와 대왜가 나오는데,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왜와 대왜를 모두 야마토라 읽는다. 왜가 야마토라면 대왜는 야마토가 아니어야 한다.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신라는 천황의 나라를 왜라 하지 않고 일본이라 부르고 있다. 그들은 왜를 야마토라 사기 치기 위해 왜와 대왜의 발음이 같다고 사기 치며 「일본서기」의 작성자까지 바보로 만들어 버린다. 그들의 주장은 학문이 아니라 사기이다. 강단유사사학의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충성은 끝이 없다. 「일본서기」가 소위 백제삼서를 참조한 이유는 「일본서기」가 열도백제를 주역으로 하는 역사소설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는 백제 관료인 왜왕을 천황으로 상정하고 있으므로 왜집단의 나라는 일본의 속국은 될 수 있으나 일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일본서기」는 일본 즉 열도백제에 관한 책
「일본서기」는 신라에 쫓겨난 백제인들의 정신 승리를 위한 판타지소설이면서, 과거의 영광스런 백제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여 열도의 주민을 새롭게 다스리기 위해 제작한 통치신화이다. 열도에서 최초로 독립된 고대국가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과거 백제관료인 왜왕은 백제왕으로부터 수여받은 삼종신기가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는데 이제 백제가 없어졌으므로 정통성의 근거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민도가 달라졌으므로 과거처럼 하늘과 새와 알로 하늘로부터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대신에, 일본왕국은 오래 전에 하늘의 뜻에 따라 건국한 강력한 나라로서 많은 나라로부터 무수한 조공을 받고, 주변 소국을 정복하여 다스린 열도 내 황제국이었으며, 현재의 왕은 그러한 강력한 왕국의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갖고 있으므로 모든 열도 주민들은 현재의 왕에게 충성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날조 역사서를 만들었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관제 문학서이다. 조선이 만든 용비어천가와 그 성격이 같다. 물론 「일본서기」는 용비어천가에 비해 문학성도 없고, 사실의 조작도 심하여 그 품격이 매우 떨어지나, 이는 시대적 차이와 문화적 수준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일본서기」는 문학서이지만 역사서 형식이어서, 사실로 보이는 것들로 내용을 채워넣어야 했다. 그래서 창작자는 완전히 가공의 이야기를 만들기도 하고, 실제 인물과 사건을 토대로 한 가공의 기사를 만들기도 하였다. 창작 시 열국의 이주민들이 열도에 세운 마을국가들인 가라 임나 안라 백제 신라 고구려 모한 진한 왜 등을 백제 담로와 백제의 파견관료인 백제 왜왕이 지배하는 이야기를 중심 주제로 삼고, 백제가 지배하지 않았던 시기와 지역에서 갸야계와 고구려계가 지배하는 이야기도 활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까지 남아 있던 백제 본국의 역사서도 참고하였기 때문에 백제 본국에 관한 이야기와 열국의 역사가 일부 기술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서기」는 그 제목이 말하듯이 일본국에 관한 책이다. 백제의 영토였던 열도의 백제 지배세력이 망한 백제를 지우고 일본으로 독립하기 위해 작성한 책이다. 백제의 열도 지배 사실을 숨기기 위한 책이므로 역사서가 아니다. 물론 사실이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백제의 담로나 백제의 왜왕이 아닌 가공의 왕국인 일본국의 왕(천황)과 관련되어 기술되고 있으므로 즉 천황이 가공이므로 사실이 아니게 된다.
백제가 망하자 일본국이 열도 최초의 고대국가로 성립되었다. 일본국 이전 열도는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으로 왕궁도 도성도 없었다. 예군 묘지명에서도 일본이 백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는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일본의 남은 무리들이 열도에 의거하여 죽음을 피해 달아났다는 내용이므로 일본은 백제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일본서기」는 사실상 열도백제에 관한 문학서이다. 일본이 백제라는 것이 드러나면 열도의 참역사가 드러나므로 일제유사사학은 이를 숨기기 위해 일본을 야마토왜로 날조했다.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대가관계?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왜를 실체라고 사기 치기 위해, 백제가 야마토왜에 선진문물을 주고, 야마토왜로부터 군사력 지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ㅇ 백제는 왜에 학술·기술 등 선진문물을 제공하고 대신 왜는 백제의 요청에 응해 군사를 원조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백제가 왜에≪千字文≫과≪論語≫를 보내주고 五經박사 등을 파견한 것과<광개토왕비문>이나 白江전투에서 보듯이 왜가 원군을 파견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ㅇ 5세기에 왜왕은 국내 지배체제의 구축을 위해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입하면서, 한편으로 백제의 권유에 따라 송 중심의 책봉체제에도 편입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개로왕 7년(461)에는 왕의 동생 곤지를 왜국에 파견하여 군사동맹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ㅇ 남조와의 통교가 중단되고 난 후 왜국에서는 6세기 초 繼體(케이타이)천황이 즉위하여 새로운 왕조가 시작되었다. 계체천황은 선진 문화·물산 등을 수용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백제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백제 武寧王은 재위 13년(513)부터 대가야지역에 대한 진출을 꾀하면서 왜국을 백제측에 끌어들이기 위해 계체조정에 오경박사를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전하였다. --- 백제는 聖王대에 더욱 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여, 성왕 16년(538)에는 왜국에 佛像과 經論을 보내고 22년에는 금관가야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세워 왜국의 군사력을 끌어들여 고구려와 신라에 대항하려 하였다. 왜국은 군대와 군사물자를 백제에 제공하는 대가로 선진문물의 전수를 백제측에 요구하였다. 그 결과 성왕 32년 백제는 五經博士·易博士·曆博士·醫博士·採藥師 등을 왜국에 파견하였고 왜국은 병사 1,000명과 말 100필, 배 40척을 백제에 보냈다.
ㅇ 한강유역 탈환전이 성공한 후 552년의 시기에 가야연맹은 그 패권이 대가야국과 안라국의 둘로 나뉘어 있는 채로 백제에게 종속적으로 연합되어 대외관계면에서 백제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또한 백제는 왜에 불상·경론 등의 문물 전수를 하면서 군병을 요청하였고, 왜는 선진문물이 궁하여 백제의 요청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ㅇ 신공기 46년조에는 야마토왜의 사자인 사마숙례가 366년 왜 탁순에 왔는지 그 이유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탁순에 온 야마토왜의 사자가 결과적으로 탁순의 중개로 백제에 갔다. 이것은 야마토왜의 사자가 탁순에 온 목적 중의 하나가 탁순을 경유해서 백제로 가는 데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마토왜의 사자가 백제에 간 목적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재위 21년(366) 백제를 방문한 사마숙례의 종자인 이파이에게 준 품목 중에 철정 40개가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요가 증대하고 있던 철 등의 선진문물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왜가 무기의 원료인 철정이 없어서 백제에 군사력을 제공하였고, 말 선박 군량미 등 군수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면서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주장한다. 철정도 못 만드는데 군사강국이라는 것도 우스운 말이고, 선진문물을 위해 국가가 국민을 용병으로 만들어 타국의 전쟁에 보낸다는 것은 범인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강단유사사학이 만들어낸 희대의 코미디이다. 용병은 먹을 것을 위해 존재할 수는 있어도 선진문물을 위해 존재할 수는 없다.
열도를 백제 영토로 보면, 백제가 열도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탈하는 것은 당연한 국가행위가 된다. 백제의 박사 파견이나 불교 전수도 지방 경영을 위한 것이 되어 국가의 자연스런 행정 운영이 된다. 제 박사와 공인들이 순번제로 교대했다는 것은 그들이 백제의 관료였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야마토왜라는 실체를 상정하기 위해, 백제가 열도 지방에 전문 관료를 파견하는 것을 야마토왜의 선진문물 수용이라 날조해야 하고, 백제가 열도 지방으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수탈하는 것을 야마토왜의 군사력 제공이라 날조해야 한다.
일제와 강단은 백제가 중국 남조로부터 선진문물을 수용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백제는 남조 왕조에게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하였는가? 백제는 남조에게 형식상 사대하였지만 군수물자와 병력을 바친 적은 없다. 선진문물과 군사력의 대가관계는 국가 사이에는 있을 수가 없다. 지방의 물자와 인력을 징발하고 지방에 지배자와 지배 이데올로기를 보내는 것은 중앙정부이다.
백강구 전투의 상대방에 왜장은 없다
일제·강단유사사학은 백강구 전투에서 왜국과 백제유민의 연합군이 패배했다고 주장하지만, 사료에 의하면, 백강구 전투의 상대와 패배자는 백제왕 부여풍이고, 왜장은 명시되지 않는다.
당나라의 전투 상대 | 전투의 패배자 | |
삼국사기 | 遇倭人白江口 | 王扶餘豐脫身而走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與倭人並降 |
구당서 동이 백제조 |
遇扶餘豐之衆 於白江之口 |
扶餘豐脫身而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衆並降 |
신당서 동이 백제조 |
豐衆屯白江口 | 豐走 僞王子扶餘忠勝·忠志率殘衆及倭人請命 |
구당서 유인궤열전 |
遇倭兵於白江之口 | 餘豐脫身而走, 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士女及倭眾并耽羅國使,一時並降 |
신당서 유인궤열전 |
遇倭人白江口 | 扶餘豐脫身走, 偽王子扶餘忠勝、忠志等率其眾與倭人降 |
자치통감 | 遇倭兵於白江口 | 百濟王豐脫身奔高麗 王子忠勝、忠志等帥眾降 |
야마토왜가 구원병을 파견했다면, 전투 상대방이나 패배자에 왜국군 장수 이름이 나와야 하지만, 어느 사료에도 명시되지 않는다. 가장 직접적인 사료로 볼 수 있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백제조는 유인궤의 전투 상대를 풍의 군대(豐之衆, 豐衆)라 명시하고 있다. 모든 사료는, 도주자는 백제왕 부여풍이고, 항복의 주체는 백제왕자 부여충승과 충지라 한다. 『구당서』 『신당서』는 왜인을 백제왕자가 거느리는 무리에 명시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 『자치통감』은 왜인이 백제왕자가 거느리는 무리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보아 왜인을 명시하지도 않는다. 『삼국사기』는 왜인이 왕자와 함께 항복하였다고 해석할 소지가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작성 시 왜국이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구당서』 「유인궤열전」은 탐라국사까지 항복의 주체로 명시하나 왜장은 언급하지도 않는다.
「일본서기」에도 야마토왜 장수의 이름은 없다. 660년 12월 24일의 기사는 천황이 복신이 요청한 대로 준비를 한다는 내용이고, 663년 8월 28일의 기사는 백강구 전투에 대한 직접적 기록임에도 작전권자를 언급하면서, 백제왕과 ‘일본의 장군들’이라고만 기술하고, 야마토왜의 장수 이름을 명시하지 않으며, 백제왕 외에 유일하게 언급하는 박시전래진은 「일본서기」 661년 8월 이야기에 나오는 백제 구원군의 장수로 기재된 진조전래진과 동일인물인데 풍왕이 주유성에서 피성으로 천도할 당시 천도 불가론을 풍왕에게 간한 백제왕의 신하라고 「일본서기」 662년 12월 1일자에 기술되어 있다. ‘일본의 장군들’은 후에 첨가된 조작된 문구에 불과하다.
따라서 「일본서기」에 의해서도 백강구 전투 시 열도 군대의 지휘권은 백제왕 풍에게 있었고, 풍은 외국군이 아니라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온 것이며, 열도는 백제의 지방임을 알 수 있다. 풍이 야마토왜의 인질이었다면 복신도 왕족이므로 복신이 왕이 되었을 것이나, 풍은 백제의 열도 지역을 다스리는 왜왕으로 복신보다 선순위의 왕위 계승권이 있어 백제왕이 되었을 것이다. 복신은 열도에 있는 백제왕 풍에게 신하로서 열도에서의 전쟁 준비와, 왕의 한반도백제에서의 전쟁 지휘를 건의하여 661년 9월 풍이 전장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백제가 백강구 전투 패배 이후 열도에서 산성을 쌓으면서 전쟁에 대비한 것은 열도가 백제이기 때문이다. 열도가 백제가 아닌 야마토왜라는 독립국이었다면 당과의 전쟁 시 당이나 신라와 별도의 교섭을 하였을 것이나, 이러한 교섭은 없었다. 사료상 당시의 열도 군대가 백제의 군대임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일제·강단유사사학은 열도인의 동원을 야마토왜의 군대로 날조하면서 조선총독부 소설을 추종하고 있다.
야마토왜가 실재했고 그것의 목적이 선진문물 수용이었다면 백제가 신당연합군에 망한 이후에는 야마토왜가 백제를 지원할 필요가 없다. 선진문물 수용론은 백제 멸망 시 열도인의 총동원을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야마토왜에 선진문물을 주고 백제가 용병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강단유사사학의 정신상태는 조선총독부 소설에 대한 맹신 이외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일본서기」에도 강단유사사학 주장의 근거는 전혀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일본서기」를 문언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서기」 문언에 의하면 야마토왜 왕조는 가공임이 확인됨에도 그들은 총독부 교시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다. 야마토왜가 가공이므로, 야마토왜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만들었거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두었다는 임나도 가공이다. 강단유사사학은 그들이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그들의 주장을 제시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일본서기」 어디에서도 그들 주장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그들이 사기 치고 있다는 증거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일제유사사학에 충성하기 위해 「일본서기」를 핑계로 삼고 있을 뿐이다.
일제·강단유사사학 날조의 핵심
일제유사사학 날조의 핵심은 야마토가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였다는 야마토임나설이 아니라 일본 즉 열도백제를 야마토왜로 변조한 것이다. 일본이 야마토왜라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으므로, 야마토임나라는 더 큰 날조를 통해 이를 덮으려 하였다. 즉 야마토임나설은 야마토왜의 가공성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대마도를 반환하지 않기 위해 독도를 문제삼는 것처럼, 야마토왜의 날조를 숨기기 위해, 일제유사사학은 야마토왜의 한반도진출이라는 더 큰 날조를 실행하였다.
성덕(聖德)은 가공의 인물이다
일제유사사학은 야마토왜정권을 날조하기 위해 성덕(소위 성덕태자)을 창조하였다. 「일본서기」의 천황들이 가공의 인물이라는 것은 일제유사사학도 알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천황은 다음과 같은 여러 문제가 있다. 제1대부터 제15대까지 대체로 천황이 100세 이상이다. 또한 천황의 수명은 「일본서기」보다 8년 전에 나왔다는 「고사기」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1대부터 30대까지 천황권의 공위 시기가 13번이나 있으며 그 기간도 11개월에서 12개월이 4번, 1년에서 2년이 5번, 2년에서 3년이 2번, 3년에서 4년이 2번이다. 29대 흠명의 자녀 4인이 연이어 왕위에 올라 56년을 지배하며, 33대 추고의 나이를 576년 18세라 하였다가 586년 34세라 하는데, 이는 매우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34대 서명이 증손뻘인 35대 황극과 혼인하며, 이 둘 사이에 38대 천지가 태어나며, 황극의 남동생이 36대 효덕이 되고, 황극이 다시 37대 제명이 되는데, 이러한 왕위 승계는 조작일 수밖에 없다. 가야, 백제, 고구려와 백제의 남북국, 백제의 순으로 지배하는 열도의 역사를 숨기고, 야마토왜가 지배한 역사로 날조하다 보니 가공의 천황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일본서기」는 이와 같은 불합리한 사실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제유사사학은 「일본서기」의 모순을 모두 해결할 수 없어서, 성덕과 대화개신만 구체적으로 날조하여 야마토왜의 가공성을 보완하려 시도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덕은 586년 혼인한 용명과 혈수부간인 사이의 첫째 아들인데, 587년에 소아(蘇我)와 함께 참전하여 부처님께 절과 탑을 세운다고 맹세하며 정적인 물부(物部) 부자를 살해하였고 593년에 추고의 섭정이 되어 열도의 모든 정사를 주관하였으며, 604년에 헌법 17조를 만들었다. 이러한 성덕에 관한 기사는 조작 기사임이 분명하다. 586년 이후 태어나서 587년 전쟁에 나간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황태자가 나이가 어려 고모가 섭정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황태자인 남자가 고모인 왕의 섭정이 된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황들은 날조되었음이 명백하여 실존인물로 만들기 어려우니, 일본인들은 성덕을 날조하여 「일본서기」에 집어넣어 실존인물로 만들고 그가 만들었다는 헌법 17조를 역사적 사실로 몰고가려 하였지만, 헌법 17조의 한문체가 7세기 초에는 성립할 수 없음을 일제유사사학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 당연히 백제의 아좌왕자가 그렸다는 성덕의 초상화도 날조이다.
대화개신은 날조된 사건이다
「일본서기」는 소아입록(蘇我入鹿)이 살해된 다음 해 효덕이 대화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하였다고 한다. 대화개신의 지시 1조는 한서(漢書)와 동일하고, 2조는 757년 시행된 양로령(養老令) 가운데의 양로호령 양로선서령 양로공식령과 동일하고, 3조는 양로호령 양로전령과 동일하며, 4조는 양로부역령과 동일하다. 또 1조의 식봉(食封)과 2조의 군사(郡司)는 757년 양로령에 의해 비로소 제도화된 것이다. 즉 대화개신은 조작된 기사이다. 일제유사사학은 대화개신의 지시문이 645년 이전의 야마토왜 지방조직을 아는 유일한 문헌이라 주장한다. 즉 대화개신의 지시문을 부정하면, 7세기 국가로서의 야마토왜는 그 존재 기반을 상실한다. 그래서 일제유사사학은 지시문 자체는 당시의 것이지만 문장은 그 뒤의 것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며 가공의 야마토왜 왕국을 방어한다.
645년 소아입록 살해는 백제 중앙정부의 지방 토호세력 처단이다. 소아가문은 587년 물부 가문을 무너뜨리고, 나라 지역의 유일한 토호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파견 관료인 왜왕을 무시하며 전횡하였다. 소아가문은 607년 백제 중앙정부의 사전 허락 없이 수에 사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당시 백제는 수를 이용하여 고구려를 통제하려 하였으므로 수에게 무례한 국서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소아가문은 백제가 쇠약해지자, 백제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자신들에게 어떤 조치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고 이상한 외교문서를 통해 백제 중앙정부를 시험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백제는 수가 열도로 보내는 사신을 수행한 소가 가문의 사람이 소지한 수의 국서를 징발하고 열도에서는 백제와 구별된 왜가 있는 것처럼 수를 속이는 수준으로만 대처하였다. 무왕은 백제 귀족세력과 사이가 좋지 않아 소가가문을 방치한 것으로 보인다. 의자왕 초기 의자왕이 귀족세력에 굴복하면서 소가가문을 처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즉 6세기부터 시작된 나라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백제가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중간에 소가가문이라는 토호세력이 파견관료인 왜왕을 무시하는 기간이 있었으나, 백제 지배가 중단된 시기는 없었다. 대화개신은 날조된 야마토왜 왕국의 근거를 만들기 위한 또 하나의 날조에 불과할 뿐이다.
飛鳥문화(아스카 문화)와 白鳳문화(하쿠호 문화)는 각각 백제와 신라의 문화
동경대학의 역사 교과서인 「일본사개설」은 성덕의 섭정기라 주장하는 593년부터 621년까지 아스카 지방에 있었던 문화를 아스카문화라 한다. 일제유사사학은 대화개신 이후 710년까지를 하쿠호문화라 한다. 그러나 아스카문화는 백제의 문화이고 그 하한 시기는 대체로 668년경이며, 하쿠호문화는 신라의 문화이며 아스카문화 이후부터 7세기 말까지이다. 즉 각각의 문화는 백제와 신라 지배 하의 문화이다.
일제유사사학은 아스카문화가 그리스, 사산조 페르시아, 북위, 북주문화가 집결하여 이루어진 문화라고 하며 백제의 문화임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일제유사사학은 호류지 소장품 중, 하쿠호 문화재의 하나인 법륭사 금당벽화는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밖의 호류지 소장품은 아스카문화에 속한다고 주장하나, 현재의 호류지는 백제 때 건립한 법륭사가 화재로 모두 타고 없어진 다음 7세기 말에 다시 재건된 것으로, 재건 법륭사 소장품 가운데 668년경 전에 제작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백제가 제작한 것이고, 그 이후에 제작한 것은 신라가 제작한 것이다. 일제유사사학은 열도가 백제의 영토였고, 백제가 망한 후에는 신라의 부용국이었음을 부인하기 위해, 그들은 그리스, 사산조페르시아, 중국, 인도 등을 떠벌리고 있다. 자신의 조상을 부정하며 서구와 중국에 정서적으로 사대하는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부정하고 있다. 그들이 진정한 자신들의 역사를 찾지 않는 한 그들은 영원히 정신병적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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