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한 상고사 주요 보완 내용 (3) - 백제 수도의 변동

역사회복 2025. 2. 17. 17:53

(10) 백제 수도의 변동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이유

전술한 바와 같이 소서노의 위례성(미추홀)이 BCE 18년 건국 시 도읍지이고, BCE 5년 온조의 찬탈 시 온조의 위례성(서도 한성)이 두번째 수도이다. 두 위례성은 모두 황하 동쪽 제수 북쪽의 韓에 있었다. 그 후 문주왕이 韓의 웅진으로 천도하기 전까지는, 근초고왕이 동도 한성으로 수도를 옮긴 시기를 제외하고는 서도 한성이 백제의 수도였다. 서울에 근초고왕릉만 있는 것은 서울이 근초고왕 시기에만 백제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문주왕이 천도한 웅진은 황하 동쪽

문주왕이 475년 천도한 웅진은 韓의 웅진이다. 문주왕은 천도 이듬해인 476년 대두산성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는데, 대두산성은 온조왕이 마한을 CE 8년 멸망시킨 직후인 CE 9년 쌓은 성이므로 韓 지역에 있는 성이다. 마한을 멸망시킨 후 1년만에 한반도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대두산성은 웅진 북쪽이며 한수 이북과 멀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웅진이 수도가 되었으므로 웅진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시켜야 하며, 주민을 멀리 이동시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웅진을 한반도 웅진으로 보며, 대두산성을 주로 아산 일대로 보는데, 이는 소설에 불과하다. 한수 이북의 주민을 아산까지 이동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공주 남쪽의 산성을 강화하는 것은 고구려에 대한 대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478년 해구와 연신이 대두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삼근왕은 반란을 제압한 후 479년 대두성을 두곡으로 옮겼다. 이는 대두성에 대한 중앙의 통제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476년에 백제가 송나라에 보낸 사신이 고구려의 방해로 돌아왔는데 이는 한반도에서 사신이 출발해서가 아니라, 고구려 첩자에 의해 사신 파견이 누출된 데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무령왕은 한반도 웅진으로 천도

무령왕은 韓 웅진에서 한반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전술하였듯이 韓 지역에서 고구려에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패배하여 옮긴 것이므로 천도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왕이 538년 사비로 천도하므로 공주에는 무령왕릉만 존재한다.

 

무왕은 익산으로 천도

무왕은 사택씨 등 부여의 귀족 세력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자신의 근거지였던 익산으로 천도하였다. 「관세음응험기」에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사를 신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의 왕성과 제석사 유적, 제석사 명문 기와가 「관세음응험기」의 내용을 증명한다. 익산 쌍릉 중 대릉은 매장된 인골 분석상 무왕릉으로 추정된다. 『삼국사』는 무왕 시, 사비와 왕도를 구별하고 있어, 왕도는 익산임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임에도 무왕 33년 즉 632년에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다. 이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백제의 귀족이 아닌 신라의 선화공주였음을 의미한다. 의자왕은 왕이 된 후 사비의 귀족세력과 대립하지 않기 위해 다시 사비로 천도하였을 것이다. 『삼국사』는 의자왕 시 사비가 왕도임을 명시하고 있다.

백제의 주된 왕도였던 서도 한성과, 서도 한성 남쪽의 웅진은, 韓 지역에 많은 퇴적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땅 밑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다. 본고의 타당성은 韓 지역의 백제 유적과 유물의 발견에 의해 명확히 입증될 것이다.